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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금수저’들의 차별과 배제를 넘어설 길은 없는 것일까?
‘상징 금수저’들의 차별과 배제를 넘어설 길은 없는 것일까?
  • 김종영 경희대·사회학과
  • 승인 2016.03.0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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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_ 교수임용과 흙수저

상징폭력을 휘두르는 한국 교수집단을 감시할 집단이 없다. 언론이든, 기업이든, 정치인이든, 실제 조폭이든 간에 이들의 조폭문화는 설사 성공적일지라도 경찰, 검찰, 언론, 시민단체 등에 끊임없는 감시를 받아왔다. 하지만 ‘상징 금수저’들로 이뤄진 한국 교수집단의 상징폭력행위를 감시할 집단은 없다. 진보적 학자들조차 대부분 이 부당한 상징폭력을 휘두르는 일원인데 누가 어떻게 이들을 감시한단 말인가.

요즘 한국사회에 회자되는 말 가운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있다. 이 말들은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상징폭력’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에 유학한 한국인 엘리트들을 장기 분석한 『지배받는 지배자』를 출판해 화제가 됐던 김종영 경희대 교수가 이 문제를 ‘교수임용’에 대입해 진단한 칼럼을 <교수신문>에 기고해왔다. 비록 ‘칼럼’ 형식으로 쓴 글이지만, 김 교수 자신이 심층 면접에서 확인한 부분이기도 한 아카데미의 폐색증에 대한 이 글은 한국 아카데미가 극복해야할 깊은 문제의식이 담겨 있어 이를 전재한다.

A는 8천만원의 ‘딜’을 받고 한 동안 고민에 빠졌다. 교수가 되고 싶다면 내라는 ‘갑’ 대학이 요구한 돈이었다. 한국 대학의 임용 과정에 대한 나의 연구에서 많은 면접자들이 말하듯이 “교수와 강사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에 A는 이 제안을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않았다. 조심스레 부모님께 이야기를 꺼냈지만 “돈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면접자들 중 돈을 내라는 대답을 처음 듣는 터라 재차 확인을 했지만 A는 ‘웃으면서’ 사실이라고 재확인해 주었다. 그 웃음은 ‘우리 바닥에서 다 아는 이야기인데 새삼 뭘 그렇게 놀라시나요?’라는 의미였다.

B는 교수가 되는 조건으로 ‘을’ 대학으로부터 5억원의 딜을 제안 받았다. 나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헛웃음을 지으며 “진짜예요?”라고 물었고 B 역시 ‘웃으면서’ 재차 확인해줬다. 나는 A와의 인터뷰를 떠올리면서 8천만원을 요구한 ‘갑’ 대학이 양심적(?)이라고 생각했다. B는 교수직에 지원하는 친한 또래 친구들이 있다. B는 명문대 학사-명문대 박사로 이어지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강사직으로 천대받고 있어서 같은 처지에 있는 C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C는 B에게 ‘병’ 대학으로부터 수십억의 딜을 받았다고 실토했는데 B는 C의 이야기를 덧붙여서 내게 전해줬다. B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을 대학은 정말 양심적이네요!”라고 말하며 박장대소를 쳤다. 이 에피소드들이 과장되고 특수한 케이스들을 선별한 ‘센세이셔널리즘’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아직도 A와 B의 웃음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우리 바닥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인데 아직도 모르셨나요?(하하하)’

“수십억원 내라”는 요구, 특수한 케이스일까?

이 바닥은 흙수저에게 무차별적인 차별이 가해지는 한국대학의 예체능계열이다. 한국대학의 교수임용 중 가장 혼탁한 곳이 예체능계열이고 중간이 인문사회계열, 상대적으로 가장 깨끗한 곳은 이공계열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공계열은 대부분 업적(능력)평가가 영어논문으로 일원화돼 있고 실력도 저널의 인용지수(impact factor)로 객관화돼 있다. 돈을 요구하는 대부분의 학과들은 예체능계열이며 인문사회계열과 이공계열에서 돈을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돈을 요구하는 곳은 드물지만 인문사회계열의 교수임용 또한 문제가 많다. 미국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D는 한국의 모 대학에서 교수직을 하다가 교수임용문제로 선배 교수들과 싸우다가 미국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케이스다. 합리적 성격의 D 교수로서는 미리 내정자를 정해두고 교수임용이 이뤄지는 과정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선배 교수들과 고함을 지르며 싸웠던 그는 도저히 한국에서 학문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미련을 버리고 미국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D교수에게 미국대학의 임용과정에 대해 물었는데 그 과정은 ‘SO COOL’했다. 내정자도 없으며, 임용을 둘러싼 파벌도 없다. 만약 지원자 중 모교 출신이 있다면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특정 대학 출신을 밀지도 않는다. 조건을 갖춘 사람은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라고 여겨지는 한국 사회학과 교수집단을 보자. 한 서베이 조사에 의하면 한국 사회학자 중 72.7%가 진보, 16.8%가 중도, 10.6%가 보수였다. 이 통계는 경험적으로도 일치하는데 사회학 관련 학회나 세미나 때면 진보적 사회학자들이 득세한다. 이런 집단적 압력 때문에 감히 자기가 보수라고 말하는 사회학자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이들 중 보수정권의 실정에 ‘비분강개’해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사회를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최근 나는 한국대학에 재직 중인 사회학과 교수 집단을 전수조사했는데 그 숫자는 총 236명이었다(각 학과의 웹사이트와 KRI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했다). 그중 여자 교수는 19.5%, 남자 교수는 80.5%였다. 2013년 한국 대학 전체를 볼 때 남자 교수 비율은 76.9%이고, 여자 교수의 비율은 23.1%였다. 평균에도 못 미친다. 참고로 미국 대학의 여자 교수 비율은 2011년 기준 43.9%였다.

박사학위 출신 국가별로 보면 미국 유학파가 53.2%, 국내파가 28.5%, 그 외 국가의 유학파(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가 18.3%였다. 유학파의 비율이 압도적이며 그 중 미국 유학파의 비율이 절대적이다. 한국 사회학과 교수 중 학부 출신을 기준으로 하면 서울대(40.9%), 연세대(16.3%), 고려대 출신(13.7%)을 합한 비율은 70.9%였고 나머지가 29.1%였다. 이 숫자들을 보면 남성이 여성에게, 미국 유학파가 국내파에게, SKY 출신이 비 SKY 출신에게(또는 서울대 출신이 비서울대 출신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배제는 통계적으로, 경험적으로 증명된다. 이러한 차별의 조직적인 ‘과정’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나는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의 5장에서 자세히 밝혔다. 이런 차별과 모순이 득세하는 곳이 ‘진보적’ 사회학계라는 곳이다.

누군가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런 차별과 배제가 없는 곳이 어디 있냐고. 능력주의에 바탕해 가장 유능하고 우수한 사람을 뽑은 결과일 뿐이지 그것은 차별과 배제가 아니라고. 다시 통계를 보자. 밸 부리스(Val Burris)는 미국 대학의 94개의 사회학과의 교수임용을 조사했다. 이중 ‘Top 5’ 대학 출신(박사 기준)이 전체 교수진의 3분의 1을 차지했고 상위 20위가 교수진의 70%를 차지했다. 상위 20위 밖의 출신학교 교수진은 나머지 30%를 여전히 구성하고 있다. 부리스는 이것이 매우 불공평하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곧 미국대학의 교수임용도 어느 정도 차별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진의 출신 학교 비율과 비교한다면 미국 사회학계의 교수 구성 비율은 너무나 민주적으로 보인다. 실제 미국대학의 교수임용 과정(『지배받는 지배자』의 8장)에 대한 나의 인터뷰에서 미국대학 교수들은 임용과정에 문제점은 있을 수 있으나 불공평하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대로 내가 인터뷰한 거의 모든 한국대학 교수들은, 그들이 이미 특권적인 교수직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수임용 과정이 지극히 불공평하다고 열변을 토했다.

능력주의 외피에 감춰진 상징폭력의 실체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진보적 학자들이 득세하는 사회학계에서도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들 중 절대 다수가 ‘상징 금수저’이기 때문이다. 학위는 한번 취득하면 바뀔 수가 없기 때문에 성취지위이자 귀속지위이다. 명문대 학위는 하나의 ‘상징’으로 교수임용에 필수 자원이다. 진보적 학자 대다수도 자신의 학벌과 학연으로 이익을 봐 왔다. 이들은 좋은 학벌을 가진 ‘상징 금수저’들로서 ‘상징지대(symbolic rent)’를 추구한다. 상징지대란 자신이 가진 상징권력으로 상징적 재화와 지위의 독점을 추구하며 지대 추구(rent seeking)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생산하는 것이 없이 이를 통해 이익을 보는 것을 말한다. 곧 ‘상징 금수저’들은 ‘상징 흙수저’들에겐 부당한 상징폭력의 가해자들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은 학위, 자격증, 증서, 공인된 지위(가령 교수직)와 같은 상징권력이 휘두르는 힘을 말하며 가해자와 피해자(또는 가해 그룹과 피해 그룹)가 있음을 의미한다. 물리적 폭력과 상징폭력이 다른 점은 행위자가 이 폭력을 암묵적 동조 또는 무지 하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상징폭력은 다시 정당한 상징폭력과 부당한 상징폭력으로 나뉠 수 있으며 때로 이 경계는 애매모호하다.

가령 박사학위가 없다면 통상 한국에서 사회학과 교수직에 지원할 수 없으며 이는 박사학위 미소지자에게는 상징폭력이지만 대체로 정당하다고 사회적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미국 대학에선 박사과정수료생(all but dissertation, 흔히 ABD라고 한다. 박사학위논문만 남겨놓은 상태)들도 교수직에 지원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의 어느 학과가 박사학위가 있는 사람만 교수직에 지원할 수 있게 한다면 대학원생들은 이를 ‘부당한’ 상징폭력이라고 여길 것이다. 일본의 경우 교수가 된 한참 후에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허다했다. 따라서 ‘정당한’/‘부당한’ 상징폭력의 경계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어쩌면 ‘상징 금수저’들이 휘두르는 상징폭력은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서울지 모른다. 왜냐하면 첫째 이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상징폭력은 암묵적 동조 또는 무지 하에 이뤄지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물리적 폭력보다 잘 보이지 않는다. 부당한 상징폭력을 휘두른 ‘상징 금수저’들은 이렇게 항변할지 모른다. “우리가 누굴 때렸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누굴 때렸는지 말해 보십시오.” ‘상징 흙수저’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어서 항변하지 못할 것이다. 이 물증은 통계나 집단적인 조사를 통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둘째, A, B, C, D가 들려준 이야기의 경우 모두 눈에 보이고 물증이 있으나 공론화하기 어렵다. 이들은 여전히 사회적 엘리트들이기 때문에 대학의 부조리와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설사 현재는 엘리트가 아니라도 미래에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들과 맞서거나 이들의 부조리를 공론화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위험한 일이다.

셋째, 상징폭력은 능력주의의 외피에 씌워져 있기 때문에 비판이 어렵다. 사회학계에서 당신이 미국 유학파의 득세를 문제 삼는다면 당신은 “미국 유학파가 교수로 많이 임용되는 것은 그들의 실력이 우수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인종주의나 여성차별주의는 역사상 항상 능력주의의 외피를 지녀 왔다. 백인은 흑인보다 우수하며 그렇기 때문에 백인은 세계 역사를 이끌어갈 짐(흔히 ‘백인의 짐’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백인 남성의 짐’)을 지고 있다는 식의 논변이다. 이 인종주의의 논변은 여성차별주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남성은 여성보다 우수하고 강하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와 공동체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질뿐만 아니라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남성들은 주장한다.

넷째, 상징폭력을 휘두르는 한국 교수집단을 감시할 집단이 없다. 최근 「내부자들」 「베테랑」 「검사외전」 등의 한국 영화들은 한국사회의 조폭문화를 잘 보여줬고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언론이든, 기업이든, 정치인이든, 실제 조폭이든 간에 이들의 조폭문화는 설사 성공적일지라도 경찰, 검찰, 언론, 시민단체 등에 끊임없는 감시를 받아왔다. 하지만 ‘상징 금수저’들로 이뤄진 한국 교수집단의 상징폭력행위를 감시할 집단은 없다. 진보적 학자들조차 대부분 이 부당한 상징폭력을 휘두르는 일원인데 누가 어떻게 이들을 감시한단 말인가. 

한국대학과 미국대학의 교수임용과정의 비교연구를 하던 중 인터뷰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우연히 한 유학생과 차에 동승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미국 모 대학의 예체능계열의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한국대학의 교수라고 소개했다. 미국의 광활한 벌판을 가로지른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그는 초면의 나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당연히 교수임용인데 그는 절친한 친구들을 통해 자신의 분야에서의 한국대학 교수임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최근에 자기의 선배 중 돈으로 교수가 된 사람이 있다면서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돈도 많은 집안의 사람이 교수직까지 꽤 찼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나 분하고 불합리하다는 것이었다.

금수저의 상징권력으로의 손쉬운 전환은 흙수저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는 나를 향해서 “교수님, 저같이 돈 없고 가난한 대학원생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초면인 나에게 이런 울분과 하소연을 털어놓는 그가 한편으론 측은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해서 나는 엷은 웃음을 띤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금빛 햇살 아래 펼쳐진 벌판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김종영 경희대 교수·사회학과

필자의 연구분야는 지식사회학, 교육사회학, 과학기술사회학, 사회운동론 등이다. 최근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을 출간했으며 이 책으로 한국사회학회 ‘올해의 저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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