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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 필요한 시대
교양이 필요한 시대
  •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 승인 2016.02.2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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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

경희대 후마니타스 교양교육연구소가 지은 『우리가 사는 세계』 (천년의상상, 2015)는 책 표지에 명시돼 있듯이 ‘새로운 스타일의 기초교양(서)’다. 많은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선명한 주제와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주력한 책이다. 마치 아동도서처럼 그림과 사진들에 아낌없이 지면을 할애했으며 노인들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글자도 크다. 과학혁명으로부터 출발해 사상혁명, 정치혁명, 경제혁명, 개인 및 대도시의 탄생, 그리고 동아시아 세계의 뒤늦은 근대화까지 근대 세계의 형성과 발전에 대해 아주 고전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근대 비판’이라는 맨 마지막 장만 없었더라면 서구적 근대를 지나치게 이상화했다는 오해를 살만했다. 절반이 도판인 이 책은 ‘기초교양’의 전달에 주력한 나머지 대학생보다는 고등학생용이라고 평가절하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대학의 현실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지식의 양이나 난이도가 아니다. 물론 정보의 정확성도 문제가 아니다. 늘 아쉬운 것은 교양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교양 말이다.

이 짧은 지면에 ‘교양’의 엄밀한 정의나 개념사―예컨대 ‘자기함양’을 의미하는 독일어의 빌둥(Bildung) 개념 등―에 대해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적어도 고전적인 의미의 교양이란 사고할 수 있는 힘과 관련된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태양계를 관찰한 후 지구가 돈다고 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실험과 검증이 근대적 경험과학의 성립을 촉진시켰다는 지식은 그 자체로는 교양 축에 속하지 못한다.

이 평범한 지식이 교양으로 고양되려면 상식을 의심할 수 있는 지성과 용기로 변환돼야한다. 교양을 지닌다함은 단지 지식을 습득하는 차원을 넘어 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분별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순응주의, 맹종, 진리 독점, 이런 것들은 과학 발전의 장애물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듯 들리는 이 책의 가르침은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 결코 가볍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현실이 원래 다 그런 거야’라는 식의 속물적 순응주의, ‘최고존엄(?)’에 대한 맹종, 묻지마식 국정교과서 편찬 등은 다른 나라 얘기가 아니다. 여기에 우리 대학사회를 옥죄고 있는 사영화, 교육부로의 종속화, 비민주적 학사운영, 자체 검열, 그리고 영어강의와 영어논문의 절대시 풍조까지 더한다면 그야말로 지성의 말살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이 요구하는 수준은 너무 낮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높은 편이다.

과학혁명 이래 서구세계가 이룩했던 사상혁명, 특히 계몽사상에 대한 찬사는 이 책의 기본 골자를 이룬다. ‘감히 생각하라!’―‘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라는 지극히 계몽주의적인 슬로건이 다시금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는 경고문으로 채택된다.

이 책은 16세기까지 기술 선진국 지위를 유지하던 중국에서 왜 과학문명이 태동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조지프 니덤의 물음을 소개하며 그 원인을 탐구와 비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결핍에서 찾는다. 이러한 해석을 이미 한물 간 유럽중심주의의 복권이라고 봐야할까? ‘미완의 프로젝트’라는 하버마스의 근대관을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것을 보면, 이 책은 유럽중심주의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근대를 규범화하고 있는 것만큼은 명약관화하다. “근대문명에 대한 발본적인 성찰과 비판, 우리는 그것을 탈근대라고 부릅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이 책의 기본성격이 변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양은 케케묵은 것인가? 차라리 그렇다면 좋으련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교양이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 사실 우리 사회의 학문적 풍조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듯, 빨리빨리 습득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서구의 과학혁명은 이 땅에서는 하루빨리 뒤쫓아가야할 의무사항으로 받아들여져 왔고, 여타 인문사회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시대의 문제에 대한 고뇌 대신 영어논문의 실적이 중시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대학인들은 스스로 너무나도 교양이 없음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는가. 서양학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도 내세울 나 자신만의 이론을 가지고 있는가. 목전의 현실을 부족하나마 그럴듯하게 설명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1990년대 중반에 출간된 미국 역사가 린 헌트, 조이스 애플비, 마거릿 제이컵의 공동저작 『역사가 사라져갈 때: 왜 우리에게 역사적 진실이 필요한가(Telling the Truth about History)』 (김병화 옮김, 산책자, 2013)에는 ‘배움의 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저자들은 우리 밖의 현실에 대해 독립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 민주주의 사회 고유의 개방적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팽배하던 시절에 나온 주장치고는 너무 복고적이라 할 수 있지만 현 시점에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창조적’ 담론만 만들어내면 그 내부의 폭발력으로 인해 세상을 뒤집어놓을 것만 같았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호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들이 우습게 여겼던 객관적 지배구조가 더더욱 굳건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지식의 혁신성이나 정교함이 문제이던가. 배움의 공화국은커녕 무지의 공화국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전진성 부산교대·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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