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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헛소동이 아니길
우울한 헛소동이 아니길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 승인 2016.02.22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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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추수를 마친 대지엔 휴경이 필요하다. 땅의 기운을 다시 돋우기 위해선 겨우내 눈과 비의 영양분을 흡수하고, 불을 놓아 병충해를 막는 등 땅을 쉬게 해줘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이 써서 지력이 방전되기 전에 재충전의 휴식은 필수적이다. 쉼은 새로운 일과 활력을 위한 한시적 내려놓음이고 인간 생명을 유지하는 순환의 핵심고리다.
 
최근 들어 대학에선 이 휴식의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아니 이미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국가사업과 대학의 구조조정을 위한 지리한 회의와 보고서 작성으로 교수들은 방학에도 쉴 틈이 없다. 이번 방학에는 특히 그랬다. 인문대학의 교수들, 특히 소장 교수들은 교육부의 인문학 육성사업의 일환인 ‘코어’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한 달 이상을 회의와 보고서 작성에 힘을 쏟았다.
            
필자가 속한 대학은 지방의 국립대학이라 다수 학과가 코어 사업의 여러 프로그램 중 미래 연구자 양성을 위한 심화교육 프로그램을 선호했다. 이 프로그램의 취지는 심화 전공 과정을 만들어 우수한 학생들을 대학원으로 유인해 미래의 연구자와 장차 대학 교육을 맡을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젊고 우수한 인재가 점점 줄고, 평생교육의 장으로 변해버린 대학원의 처지에선 미래 교육의 재생산을 위해선 꼭 필요한 사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 한편은 편치 않다.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학과가 언제 사라질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우수한 학생이 경제적 지원이라는 당근을 얻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할까? 안정적 연구직을 얻지 못해 연구를 포기하거나, 강의할 곳을 찾아 전전하는 연구자들을 보면서 과연 어느 명민한 학생이 공부에 자신의 운명을 걸 것인가.

중요한 것은 경제적 지원이나 우수한 인력의 배출이 아니라 그들에게 장차 안정적 연구직이나 교육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이다. 연구자에게 공부란 미래의 꿈을 위해 현실적 삶과 즐거움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는 고독한 싸움이다. 사람이 현재의 향락을 미래로 연기하는 것은 언젠가는 그것이 실현 가능할 것이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여건에선 고독을 견디며 공부에 매진할 수 있게 해주는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현재 인문대학은 급격히 변하고 있다. 얼마 전 통폐합을 염려했다면, 이제 그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인문대학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선 철학과는 한두 곳을 제외하곤 모두 문을 닫았고, 국어국문학과조차 통폐합된 곳이 등장하고 있다. 근대 국가의 이념적 기둥이었던 철학과와 국어국문학과의 통폐합은 바야흐로 근대대학의 조종을 알린다. 다른 학과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진 않다.

‘10년 뒤에도 과연 나는 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이 학문을 계속 유지하며 그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을 것인가?’ 최근 학문에 뜻을 둔 이후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이 책들은 누구와 공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개인적 취미생활을 위한 것이 되지 않을까. 솔직히 장담할 수 없다. 이러한 제도적 불확실성과 연구자들의 불안이 인문대학을 유령처럼 붙들고 있다.
 
2년 전 하버드대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주최한 여름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온 연구자 130여명이 거의 한 달 동안 세계문학 관련 세미나를 열었는데, 다른 것은 차지하고 참가자 중에 거의 30명이 중국 대륙에서 온 연구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몹시 흥미로웠다. 한국에서 온 연구자는 고작 2명뿐이었다. 연구자의 수나 민족성이나 민족주의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바람직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20년이 지났을 때 동아시아 학계에서 한국의 젊은 연구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두려왔다.

이런 현실을 인문대학의 현 상태와 연결해볼 때, 방학조차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연구자들을 정신없이 만드는 이 상황이 한국 인문학의 미래를 새롭게 형성해가는 희망의 몸부림이 아니라, 그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어가는 우울한 헛소동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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