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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짚어낸 조선의 지식 유통 경로
외국인이 짚어낸 조선의 지식 유통 경로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
  • 승인 2016.02.15 1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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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헌학

조선 시대의 지식은 어떻게 유통됐을까. 이에 대한 해명이 없지는 않다. 예컨대, <경향신문>에 연재된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글(2015년)이 좋은 사례다. 이를 통해서 그동안 몰랐던 많은 사실을 새롭게 배웠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다. 그의 글이 조선 시대의 지식의 유통구조와 사회구조의 관계를 보여주는 큰 그림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면의 한계 탓일 것이다.

그러는 중에서 이와 관련된 아주 귀한 연구를 접하게 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구는 한국에서 책으로 출판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책에서 드러나는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은 학문적으로 함께 생각해 볼만한 것이었다. Space and Location in the Circulation of Knowledge (1400-1800): Korea and Beyond(ed Marion Eggert·Felix Siegmund·Dennis Wuerther, Frankfurt am Main: Peter Lang, 2015)가 그 책이다.  

가장 눈길이 가는 덕목은 지성사 일반의 관점에서, 책에 따르면 ‘지식사회학’(sociology of Knowledge, 「해제」 11쪽)의 관점에서 조선 시대의 지식유통구조와 사회구조의 관계를 조명한 점이다. 전체 연구를 기획한 에거르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최근 십년 사이에 ‘지식’에 대한 논의는, 그것이 지식생산이든, 지식유통이든, 지식의 성격변화에 관련된 것이든 간에, 문화연구(역사적인 것이든 당대적인 것이든)에서 점점 더 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발전이다. 이 분야에서 학제간의 협동 작업이 증가하고 있음이 이를 정확하게 비춰준다. 그 결과로 학문, 예술, 학술제도, 정치를 더 이상 하위 체계의 고립적인 것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 모두의 성격을 규정하는 ‘지식’이라는 더 큰 체계에서 바라보도록 됐다는 점이 또한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비록 다양한 접근 방식들이 있음에도 말이다.”(「서문」 7쪽)

다른 무엇보다도 하도 자주 들어서 이제는 진부해진 표현인 ‘학제간연구’ 혹은 ‘융합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언명에 눈이 간다. 이른바 ‘산학협동’이라는 명목 아래 도무지 궁합이 맞지 않는 분야 간의 짝짓기가 강요되는 시절에 이른바 융합연구는 이런 방식으로 시작돼야 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책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지식이라는 보편지평에서 지식의 유통구조와 운동방식을 살피고, 그것이 사회구조와 사회관계의 성격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살피겠다는 것이 책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책은 전문적으로 분화된 개별학문들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 다른 학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느 쪽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매파 개념으로 ‘지식’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설득력이 있는 시도다. 지식세계에서 융합은 일차적으로 개념과 개념이 만나는 것이지, 다짜고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의 논리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우격다짐으로 예를 들면 인문학과 공학이 만나야 융합연구로 인정되는 우리의 실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책이 연구의 출발-전제로 삼고 있는 문제의식은 의미 있다.

책이 눈길을 사로잡는 또 다른 덕목은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지식사회를 살필 수 있다는 점이다. 책에 수록된 글들은 대체로 국내의 연구 동향과 궤도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하게 읽어보면 조선의 지식사회를 동아시아의 지성사적 맥락에서 살피고 있다. 예컨대 루(Pierre-Emmanuel Roux) 교수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일본의 박해사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흥미롭고 근거 있는 접근 시각이다. 물론 앞으로 본격적인 논의를 거쳐야 할 논의일 것이다. 어쨌든 루 교수의 글은 조선을 외부의 시각에서도 바라볼 때에 이해가 더 총체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책에서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덕목은 책에 수록된 글들이 ‘지식’을 동적인 대상으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지식을 운동체로 파악했다는 얘기다. 이는 중요하다. 하나의 지식이 생성 혹은 수입돼서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 집단, 사회 제도, 혹은 예술, 무술, 기술로 물질화, 제도화, 문화로 자리 잡는 과정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식을 운동체로 보는 시선은 보편적인 지성사의 관점에서 조선 지식사회의 특징을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조선의 지식 사회를 인류 지성사의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는지의 물음과 직결돼 있다. 보편적인 지성사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은 조선 지식사회의 성격 규명에 있어서 새로운 접근 시도라 하겠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책은 아쉬운 점을 드러낸다. 다른 무엇보다도, 지식 운동이 사회 구조의 변화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의 물음과 관련해서 서양 지성사가 중세의 신본주의에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로, 또 근세의 계몽주의로 이행할 때 지식이 어떤 영향을 행사했는지를 아무런 여과 없이 보여준다. 사실 이 책에서 내심 기대했던 것도 실은 이런 종류의 해명이었다. 즉 지식이 조선의 지식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영향력을 통해서 조선 사회가 어떤 질적 혹은 양적 변화를 야기했는지에 대한 해명을 말이다.

하지만 책은 전체적으로 조선 지식사회의 성격 규정을 내리지 않는다. 이것이 많이 아쉽다. 물론 「해제」에서 연구자들은 이 연구가 이제 막 시작했음을 천명하고 있다. 해서, 후속 연구를 기대한다. 여기에 조선의 지식사회를 연구함에 있어서 ‘서간’ 교류나 비문 연구와 한자에서 한글로의 지식 이동 경로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면 좋을 것이다. 특히 한자에서 한글로의 이동 경로에 대한 추적은, 그것이 단순한 번역 활동에 대한 고찰을 넘어서서 동아시아에서 특히 한국에서 지식이 어떻게 운동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총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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