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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원명 경상대
  • 승인 2002.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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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서원명 경상대 농공학

"이번 시험도 오픈 북, 오픈 노트다. 에이포 용지 1장의 커닝페이퍼 준비하는 것 잊지 말고.”


매번 어김없이 녀석들의 야유와 탄식 소리가 쏟아진다. 이 시험방식을 택한 것은 내 과목들의 특성에 맞춰 학습효과를 거둔다는 목적도 있지만, 주된 의도는 불공정 게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원칙이 매몰되고 사기와 전횡이 방관되고 있는 현실이 두려워, 평소에 유독 원칙과 정직을 강조한 덕분인지, 적어도 내 과목에서만은 시험 중 부정행위란 없다.


항상 2시간의 시험 중 전반부 30여분의 퀴즈를 대비해 녀석들이 요약해오는 커닝페이퍼는 다양하다. 에이포 용지 앞뒷면에 식별 불능인 잔 글체로 도배를 해오는 착실파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빈손이거나 굵직하게 몇 줄 적어오는 여유파들도 있고, 착실파들의 자료를 그대로 복사해오는 얌체파들도 있다. 이렇게 공부에 대한 열의가 다르듯이 녀석들의 재능이나 특기도 다양하고, 성격도 제 각각이다. 노래나 춤, 대인관계에 능한 녀석들이 있고, 각종 운동이나 연극, 그림 등에 특출한 소질은 보이는 녀석들도 있다. 생김새가 다르고, 색깔이나 향기가 다를 뿐, 들꽃 같은 아름다움은 어디 비할 데가 없다. 매사 있는 그대로를 인정할 줄 알고, 한없이 겸손하며,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마음씨는 비단결처럼 곱다. 졸업 이수학점이 1백40학점으로 낮춰지면서 전공학점도 현저히 줄었고, 학기 당 강의 시수도 15주 밖에 안 돼, 주말에 시험이나 보강을 하기 일쑤지만, 묵묵히 따라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취업이 어렵다지만 직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고 인간관계도 성공적이다. 이따금씩 녀석들이 다니는 회사 상사들의 평을 들어보면, 인성과 성실성 면에서 더 바랄 바가 없단다. 그런 덕인지 해가 갈수록 졸업생이 진출한 회사로부터 추천의뢰 횟수가 잦아졌고, 주변의 권유로 전공에 대한 인지도와 선호도가 높아지다니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교탁에 박카스 병을 몰래 얹어놓는가 하면, 첫 봉급 탔다며 속옷을 사들고 오기도 하고, 까맣게 잊고 있던 녀석들로부터 명절 선물이 배달되기도 한다. 늘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고마운 성의에 짠한 감동을 받는다. 25년 전, 제자가 꼭 3백65명만 있었으면 했던 교수 초년의 바램이 어느 듯 졸업생이 1천명에 육박하게 됐으니,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다. 하루에 한 녀석씩만 만나도 3년 내내 신세질 언덕이 생겼다. 이보다 더 실한 자산이 어디 있겠는가. 경상도 녀석들이라 좀체 속마음을 들어내지 않는 편이고, 강한 억양 탓에 말씨가 거칠기는 해도, 숫기에 가려진 깊은 속내는 비단결이다. 된장찌개를 어찌 냄새나 색깔로 따지겠는가. 뚝배기에서 푹 끓은 진한 속 맛이 별미 아닌가.


올해도 취업이 어렵고, 지방대학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한 것 같다. 더욱이 토익이나 토플에 대한 요구가 지나치고, 학과의 정체성 문제까지 겹쳐 지원단계에서부터 자존심을 많이 상하기도 한단다. 멀쩡한 자식 무시당하는 것 부모가 못 참듯이, 4년 동안 공들여 가르친 제자들이 이런 수모를 당하는 꼴을 볼 때면 억장이 무너진다. 잘못돼도 한창 잘못됐다. 원칙도 기준도 없이 학문영역에까지 시장논리·경쟁논리 일색이니, 어느 장단에 맞춰 가르치고 배울지 알 수가 없다. 교육과 대학에 대한 근본 틀을 다시 짜지 않는 한 시험만능으로 인한 망국적 폐해를 극복하기란 백년하청이다.


뭐 하나 이루어 놓은 것 없이 나이만 먹으니 서글프고 부끄럽다. 어느 듯 제자들이 기른 자식들을 맡아 가르치게 됐으니, 나의 교직생활도 한 세대를 훌쩍 넘은 셈이다. 해가 바뀌어도 강의실에 앉은 녀석들은 늘 같은 나인데 나만 자꾸 나이를 먹으니,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고 서있는 장송처럼 무력하게 느껴진다. 교수생활 할만큼 했건만, 수업 전야엔 잠을 설치고, 강의시간이 다가오면 손톱 씹는 버릇은 아직도 여전하다. 게을러 준비가 부족한 탓인지, 타고난 무능 탓인지는 나도 모른다.


잘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도 벅차다. 그래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고 연구할 수 있는 대학의 실상을 정립하는 일에 한시도 소홀해선 안 된다고 다짐을 해본다. 늘 푸르고 싱싱한 녀석들이 가슴을 펴고, 꿈과 낭만, 희망과 이상을 맘껏 펼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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