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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많은 제자들에게
나의 많은 제자들에게
  • 교수신문
  • 승인 2016.02.1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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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 철학

이 글은 『철학과 현실』 107호에 실린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철학)의 「나의 인생, 내가 걸어 온 길」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나는 내가 교수이기 때문에 주로 국내 또는 외국에서 교수직을 담당한 제자를 가까이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교수직도 다양하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을 때였다. 교포들에게 강연을 끝내고 나오는데 뜻밖의 제자를 만났다. 내가 담임했을 때 제일 키가 작았기 때문에 출석부 1번이었던 윤탁순이었다. 미국에 와서 춘원의 자제였던 이영근과 같이 물리학 교수가 됐다는 애기는 듣고 있었다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이영근 박사는 미국대학의 교수로 남고, 자기는 큰 딸의 사정이 있어 캐나다 토론토대의 교수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최초로 한국인 정교수가 됐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공연히 흐뭇한 기분을 느꼈다. 분야는 다르더라도 자랑스러운 제자들이다.

내가 가서 이삼일, 삼사일씩 머문 제자들의 이름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모두가 비행기 여비를 대주면서 초청을 하곤 했다. 세인트루이스대의 곽노균 교수도 그랬다. 공업경영학 교수인데 그의 저서가 북경대의 교재로 채택돼 북경대를 방문한 일도 있었다. 뉴욕대의 변혜수 교수는 내 영향으로 철학을 했다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한국에는 더 많은 제자 교수들이 있다. 십여 명이 훨씬 넘는다. 고려대의 대학원장을 지낸 한배호 교수는 자기 자전적 저서 속에 나와의 관계를 상세히 애기하고 있을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연세대의 민경배 교수는 고등학교와 대학 때 제자이면서 지금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오래 전에는 강운도 춘천에 강연을 갔다. 세 교수가 갔는데 고려대의 조승순 교수도 같이 강연을 했다. 고등학교 때 제자다. 오세탁 교수는 청주에 산다. 다양한 재주가 있어 여러 분야에서 일했다. 충북대의 법대 학장직도 맡았다. 지금도 스승의 날과 신년이 되면 전화로 인사를 해온다. 청각이 나보다도 좋지 않아 잘 듣지 못하니까 전화 내용이 항상 비슷하다. “선생님이세요? 저 오세탁입니다”로 시작해서 자기가 할 얘기만 다 하고는, “기회가 생기면 뵈러 가고 싶습니다”로 끝난다. 제자 오재식은 서로 잊지 못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기독교신앙이 돈독했다. 아카데미하우스를 주관하는 강원룡 목사와 WCC 운동에 오랫동안 동참하고 있었다. 정치적 성향은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어 박정희 정권 때는 외국에 나가 있어야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월드비전 이사로 있을 때였다. 새로운 회장을 선출해야 하는데 보수진영교단 출신의 목사들이 후보가 되곤 했다. 내가 정진경 이사장과 협의 끝에 오재식 제자를 추천했다. 오랫동안 강 목사 사람이었는데, 내 청을 받는 대로 수고해줬다. 6년 동안 좋은 업적을 남겨줬다. 한번은 강원룡 목사를 만났더니, 그렇게 오래 나와 함께 지냈는데 은사가 찾으니까 홀딱 가버렸다면서 웃고 있었다. 후에 암으로 투병하는 고생을 했다. 위험스러운 병이었다. 그러면서도 한번은 우리 집을 방문했다. 나는 喪配하고 혼자 있던 때였다. 그는 사모님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자주 들르곤 했으니까 내 아내도 반겨주곤 했었다. 돌아갈 때는 내가 쓴 책에 ‘제자 오재식 군에게’라고 싸인을 해주면서, 우리 옛날로 돌아가자면서 웃었다. 그는 병중이었는데도 환하게 웃으며 돌아갔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어떤 날 아침, 신문을 보다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봤다. 마음이 무거웠다. 제자의 문상에 늙은 내가 가도 되는가 싶어 죄송스러웠으나 문상을 갔다. 그 환하게 웃던 얼굴 그대로였다.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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