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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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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02.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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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즐겨 낡은 종교의 이단자가 되리라”

일기를 쓰지 않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선생님의 편지를 다시 한 번 찾아보자고 책장 밑에 쌓아 두었던 헌 책더미를 정리하다가 선생님의 편지는 찾지 못하고 1956년에서 1958년에 걸쳐 내가 쓴 일기책 몇 권을 찾아냈다. 그 일기책을 뒤적거리다 1956년 12월 2일 일요일의 일기에 선생님 집회에 참석했던 일이 눈에 띄었다.
그 날의 선생님은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1장 10절 이하의 말씀과 맹자(孟子) 고자편(告子篇) 하에 나타나는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不亂其 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이라는 구절을 소재로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베드로 전서 1장 12절을 해석하시면서 천사는 없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돼있다. 아마도 이 모임에 천안농고를 나오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과 같이 참석했던 것 같으며 끝나고 커피숍에서 이 학생들과 담화를 나눈 다음 광화문에서 책을 한 권씩 구입하여 매주 목요일 10시부터 윤독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고 써있다.
즉 이 모든 사실이 1956년도의 나의 생활은 선생님의 집회를 중심으로 천안농고 출신 대학생들과의 독서모임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지고 있었던 사실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서 반가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당시 그렇게 일주일에 한번씩 모이는 자리에 여러 강사 선생님을 초청하여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분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어느 학생집에 모여서 당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철학교수이셨던 김기석(金基錫) 선생님을 모셔다가 말씀을 들었던 일과 말씀이 끝난 다음에 지금 여러분이 타기(唾棄)할 만하다고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사들도 젊었을 때는 여러분 못지 않게 고민도 많이 했던 사람들이란 점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남기신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흰 손’에 얽힌 선생님의 고백
선생님이 1952년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몇몇 사람들에게 낭독하셨다는 ‘흰 손’이라는 시는 상당히 긴 장편시(長篇詩)이다.
“마른 나뭇 잎조차/ 다른 잎으론 못 바꿀 개성이 있거든/ 너희는 꼭 같이/ 판에 찍은 그림으로/ 영원한 생명 사려느냐?// 피는 한 방울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 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려 달래 살고 싶더냐?// 너 살고 싶으냐?/ 대들어라, 부닥쳐라/ 人格의 부닥침이 있기 전에/ 대속이 무슨 대속이냐?// 여봐라!/ 예-이-/ 너 이 흰 손 가진 우상교도놈들을 끌어 내여/ 거룩한 내 집을 더럽히게 말라// 믿어! 너희가 믿었느냐? 내 뜻대로 살았느냐?/ 나는 영원히 일하는 영, 사는 영/ 흰 손 가진 너희를 나는 모른다”
장편시 ‘흰 손’ 중에서 위에 인용한 몇 연의 시에서 우리는 ‘흰 손’이 간직하고 있는 큰 뜻을 알 수 있다. 함 선생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해 보자. <사실상 그것(흰 손)은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이날껏 정통적으로 인정해오는 무교회에서도 그것은 그대로 가르치는 십자가의 공로로 죄 대속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사상에 반대하고 그러기 위하여는 인격의 자주성(自主性)을 살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20전래 내 마음속에 싸우고 찾아온 결과였다.>(전집 제3권에 수록되어 있는 ‘말씀 모임’이라는 글에서 수록). 이 글이 1967년 8월에 발표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생님이 오산에 재직하고 계셨을 때부터 고민해 온 당신의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1952년 크리스마스라는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생님이 천안농고에 처음 오셨다가 나에게 보내주신 1953년판 ‘수평선 넘어’의 마지막에 이 시가 수록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함 선생님께서 6·25 사변의 한가운데서 이 장편시를 써내려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선생님이 이북에서 38선을 넘어 남하해 선생님의 친우 송두용 선생의 오류동 자택을 찾은 날이 1947년 3월 17일이었다는 사실은 소개한 바 있다.
선생님의 글에 의하면 서울에 들어서자마자 류영모 선생님을 모시고 전라도를 한달 동안 돌아본 후에 송두용 선생님이 주관하시던 주일 모임에 나가곤 하였지만 그때는 책도 없었고 그저 마음을 들여다보고 파고, 성경을 고쳐 읽고 기도를 하는 일이 남하 후 오류동 노연태씨 집에 머물고 있는 동안의 선생님의 일과 전부였다. 그러다가 몇몇 친구에게서 서울에서 주일 모임을 하면 어떠냐 라는 의견이 나왔고 류영모 선생님도 이를 적극 권하시고 해서 서울 YMCA 2층 강당에서 주일 오후에 모임을 가지게 된 것이 함 선생님의 집회의 효시였다고 한다. 이렇게 당신의 모임이 시작된 데 대하여 당신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믿음의 증거를 하기로 나선 것은 환상을 보고 된 것도 아니요 비몽사몽 간에 계시로 된 것도 아니요 산천기도 금식기도를 해서 된 것도 아니요 영통을 해서 된 것도 아니다. 신학교 졸업을 하고 사람이 만든 제도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된 것은 물론 아니다. 선배들의 권, 친구들의 떠밂, 그리고 내 양심으로 생각함으로 된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말을 하러 나서는 순간까지 “또 무슨 말을 하나”하며 돌격명령은 이미 내렸는데 준비는 채 되지 못한 군인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하게 된다>(‘말씀 모임’에서).
여기서 선생님은 당신이 무교회에 머물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백 년을 두고 따라가도 미치지 못할 위대한 우찌무라(內村鑑三을 가리킴) 선생님이지만 그래도 나는 나지 남의 터 위에 세우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찌무라, 우찌무라’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그가 독립의 사람이면 나도 독립이 있어야지 그의 흉내는 내기가 싫어서 해방 이후 되도록 무교회란 말은 사용치 않았다는 것이다. 해방 후 십여년이 넘도록 일본 무교회 친구들과도 아무 교통 없이 지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편지라도 한다면 아무래도 제 모양을 과장도 않고 독립정신 팔지도 않고 나라 겨레의 부끄럼을 팔지 않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아예 교통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신은 나를 살리고 이 나라를 살리는 데는 우찌무라의 무교회 가지고는 될 수 없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오늘 나의 종교 우리의 종교를 발견해야 했다”고 외치고 있다. 셋째는 당신 보시기에는 역사가 돌격하는 군대와 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시체 치우는 사람으로만 보였다는 것이다. 고지를 점령하러 돌격하는 군인은 전우의 시체를 밟고 돌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앞장을 서서 달리는 예수의 깃발은 벌써 지평선 끝에 가물가물 사라지려 하는 듯한데 앞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모르면서도 앞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바로 참 종교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항해 싸우고자 ‘말씀모임’ 만들어
이래서 나온 또 한편의 시가 그의 ‘大宣言’이라는 시였다. 이 ‘대선언’으로 그는 무교회에도 선전 포고를 한 셈이 되었다. 1953년 7월 4일에 쓴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내 즐겨 낡은 종교의 이단자가 되리라/ 가장 튼튼한 것을 버리면서 약하면서/ 가장 가까운 자를 실망케 하면서 어리석으면서/ 가장 사랑하는 자의 원수가 되면서 슬퍼하면서// 나는 산에 오르리라/ 거기는 꽃이 피는 곳/ 히말라야 높은 봉 그윽한 골 피는 이상한 꽃같이/ 그 향 냄새맡는 코를 미치고 기절케 하는 꽃/ 그 꽃을 맡기 전 나는 벌써 취했노라>1953년 휴전이 되고 그해 가을에 서울에 올라오신 선생님은 다시 모임을 갖자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몇몇이서 류영모 선생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자는 의론이 제기되고 처음에는 대성빌딩을 빌려 가지고 모임을 시작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류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함 선생님이 말씀하신 후에 유영모 선생님의 말씀으로 이어졌는데 당시 세브란스 의과대학 김명선 학장이 에비슨관을 자진해서 내주어 장소를 옮기면서 오전 중에는 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고 오후는 함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다가 어느덧 류 선생님은 그만 두시게 되고 소위 에비슨관의 오후 두 시의 모임으로 정착이 되었던 것이다.
노자 첫 구절에 ‘名可名非常名’이라는 명제가 제시되어 있고 장자에는 ‘名者實之賓’이라고 설파된 대로 이름이 빚이요 거짓이요 허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10년이나 지속되 온 이 모임에 ‘말씀 모임’이라는 이름을 부친 까닭은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부치고 살기 때문에, 그리고 삶이란 하나의 조직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하여 이 이름을 붙여 조직체를 만드는 목적으로 삼는다고 연유를 기록에 남겼다. 그러나 이 ‘말씀 모임’이라는 이름보다는 함석헌 선생님의 일요집회로 더 많이 회자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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