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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수상 : 남극관의 『謝施子』를 읽으면서 든 생각
●독서수상 : 남극관의 『謝施子』를 읽으면서 든 생각
  • 교수신문
  • 승인 2002.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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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07 10:11:27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근자에 南克寬(1689∼1714)의 ‘謝施子’를 읽었다. 2백자 원고지로 67면 밖에 되지 않는 간단한 수상록이다. 모두 1백 92조목의 수상이 실려 있는데, 각 조목은 길어보아야 2백자 남짓이고, 9자에 불과한 짧은 것도 있다.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스럽게 써내려 간 것이다. 이러니 글마다 제목이 있을 리 없다. 짤막한 글모음이지만, 내용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불과 26세로 요절한 사람의 글이지만, 문학과 철학, 언어학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넓은 독서와 깊은 사색의 흔적이 역력하다.
옛사람의 책을 읽다 보면, 이런 류의 저술을 종종 접한다. 널리 알려진 성현의 ‘용재총화’가 그 대표적인 것이고, 최근 수삼 년 동안 내가 푹 빠져 있었던 金昌協의 ‘農巖雜識’나 洪奭周의 ‘鶴崗散筆’ 등도 바로 그런 류다. ‘大東野乘’이니 ‘稗林’이니 하는 총서는 이런 저술을 한데 거두어 모은 것이다. 이런 저작들은 애시당초 무슨 형식이랄 것도 없고, 장르의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그야말로 隨想隨錄의 자유를 흠뻑 누리고 있는 글이다. 굳이 筆記類 산문이란 이름으로 포괄하지만, 전공자가 아니면 의미가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서양식이라야 알아듣는 세상이니, 에세이라고 부르면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옛사람이 남긴 문집을 더러 읽었지만, 그들이 정작 마음을 먹고 쓴 글에 감동을 한 적이 드물다. 오히려 이런 수상수록의 산문을 보고 공감하는 바가 컸고, 조선시대의 문학과 예술, 기타 풍속에 관한 알토란 같은 지식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홍석주의 문집에 실린, 장중하면서도 자로 잰 듯 치밀한 구성을 자랑하는 산문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분방하게 토로한 ‘학강산필’에 더 매혹됐던 것이다. 형식의 구애를 떨치고 나온 그의 생생한 사고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정된 글쓰기의 형식은 오랜 시간 인간이 창조해낸 최적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식견이 남달리 뛰어나고 글쓰기의 재능이 빼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형식은 되레 글쓰는 사람을 옥죄는 차꼬가 되는 것이다. 형식에 얽매여 자신이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식견이 없는 사람에게 형식은 식견의 빈곤과 사유의 천박함을 감추는 편리한 방패막이가 된다. 형식의 구속을 벗어 던지되 깊은 학문과 사색의 온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글쓰기야말로 글쓰는 사람이면 바라마지 않는 경지이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행복은 아닐 것이다.
명색이 교수요, 연구자이니 논문을 쓰는 것이 나의 소업이다. 그런데 요즈음 논문 쓰기가 괴롭다. 이런 저런 곡절 끝에 논문집의 등급이 정해지자, 각 학회마다 요구하는 사항이 까다로워졌다. 지켜야 마땅한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용보다 시시콜콜한 형식 요건을 ‘준수’하느라 두통이 날 지경이다. 행간의 크기에서 활자 포인트까지 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기야 이런 것은 익숙해지면 그만이니, 참는다 치자. 그런데 文體까지 간섭의 대상이 되니, 괴롭기 짝이 없다. 어떤 잡지에 글을 투고했더니, 내용보다 문체를 문제삼아 이러쿵저러쿵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어떤 발표회장에서는 선배 교수님으로부터 문체가 이상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글쓰는 이의 솔직한 느낌일랑 아예 접고 무미건조한 문체로 써야만 논문이 되는 것 같다. 논문의 게재 여부를 가리는 심사과정까지 ‘엄정’해졌으니, 나의 문체에 나의 느낌을 싣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성싶다.
내가 논문이라고 쓰는 글의 수명은 몇 년이나 될까? 학계의 말석을 더럽히고 있으니, 나의 글이 이따금 남의 인용목록에 오르기는 하지만, 그것도 몇 년에 불과하다. 정년퇴직을 하거나 죽고 나면 나란 사람은 물론이요, 나의 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럴진대, 형식에 매여, 심사에 구속돼,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고 남의 이야기나 각주에 주렁주렁 달아 놓고 ‘논문’이라고 포장하면서 글을 계속 써야만 할까? 3백년 전에 쓰여진 남극관의 ‘사시자’를 읽으며 떠오르는 부질없는 생각이다. 나는 언제 그런 자유를 누려볼까? 이 갑갑한 세상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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