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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 『젠더연구』(크리스티나 폰 브라운 외 지음, 탁선미 외 옮김, 나남 刊)
깊이읽기 : 『젠더연구』(크리스티나 폰 브라운 외 지음, 탁선미 외 옮김, 나남 刊)
  • 이수자 / 성신여대·여성학
  • 승인 2002.12.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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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07 10:08:59

젠더(gender) 개념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학문적으로 뿐 아니라 성별을 가리킬 때도 젠더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성별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는 옷차림’이라는 뜻으로, 젠더리스 룩(genderless look)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젠더는 1970년대 초반 여성학이 이론적 체계를 세워나가면서 생물학적 성(sex)과 구분되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이라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해 오늘날 학문적인 지위를 굳건히 차지한 개념이 됐다. 이로써 성평등을 지향하는 여성학의 중심개념으로 사용되던 젠더는 점차 가치중립적(value free)인 용어로서 여러 학문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남성학과 여성학의 매개 범주로서의 젠더

기존에 통용됐던 ‘여성성’, ‘남성성’ 개념에 비해 젠더 범주는 양성을 동시에 포착하면서 양성 사이의 본질주의적 구분을 극복하고 또 양성간의 경계를 이동 가능하게 만든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로써 페미니즘이 표방하는 양성평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남성학자들을 좀더 쉽게 양성관계에 대한 연구에 동참하도록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또한 젠더는 다양한 연구분야, 다양한 학문 전통과 또한 남성학자와 여성학자들 사이를 매개할 수 있는 범주로서 학제간 통합적 지식이 요구되는 시대적 학문경향에 힘입어 전통적 지식규범을 깨뜨리는 데 적절하다. 이로써 젠더연구는 개별 학문분야에서 여성과 성에 대해 진행된 상이한 담론들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통찰하게 하는 학문 분야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독일의 베를린 소재 훔볼트대 문화학과의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 교수와 독문과 잉에 슈테판 교수가 젠더연구 전공의 겸임교수로 재직하면서 동료교수들의 관련 논문들을 엮어 모은 ‘젠더연구’는 바로 이런 젠더 개념을 중심으로 독일의 지식체계가 어떻게 새롭게 조직되고 재편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젠더 논의는 서구 문화가 대상을 구별하고, 이항적 대립관계를 설정하고 위계적 질서를 생산해내는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함으로써 지식비판적(wissenschaftskritisch)으로 개별 학문 및 개별 학문 사이의 위계질서를 돌아보게 한다. 이런 기본 방향에 따라 젠더연구에서는 개별학문의 다양한 방법들을 수용하고, 차용하고, 변경해 젠더 문제를 중심으로 재생산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내고 있다.

1부에서 젠더연구의 이론적 차원에서의 일반적 이해를 다루고 있다면 2부에서는 개별학문 분야에서의 젠더논의를 다루고 있다. 즉 젠더주제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문학, 미술사학, 역사학은 물론이고 자연과학, 정보학, 음악학 등 젠더 문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은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와 방법론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들을 수록하고 있다.

젠더연구는 가치중립을 표방한다

‘젠더, 성, 역사’를 쓴 브라운 교수와 ‘젠더, 성, 이론’을 집필한 슈테판 교수는 지난 9월에 내한해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젠더연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이들이 주도하고 있는 훔볼트대 젠더전공의 이론적 토대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젠더, 성, 역사’에서 신체논의와 성정체성 논의를 연결해서 분석하고 있는 브라운 교수는 문화학이 갖고 있는 독특한 분석적 시각이 십분 드러난 논의를 전개하고 바로 이어 슈테판 교수가 ‘젠더, 성, 이론’에서 이런 신체와 성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새로운 정치개념과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젠더연구가 사회적 관계에 대해 비판적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변화시키겠다는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어 의견을 같이한다. 내한해서 ‘가면극으로서의 남성성’이라는 제목으로 학술대회에 참가했던 슈테판 교수는 지금까지 여성학에서 많이 논의되었던 여성성 뿐 아니라 남성성에 대한 논의가 젠더연구에서 활발함을 보여줬는데 이 책에서는 빌리 발터 교수가 이 논지를 잇고 있다.

젠더연구가 문화학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다분히 가치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여성학은 지식비판적인 태도와 개별학문 간의 학제적 연구가 기본이 된다는 면에서 젠더연구와 기본적으로 같은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양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특히 서구에서 30여년 간의 페미니즘 발달이 토대가 돼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정책적 지원이 풍부해지면서 가치중립을 표방하는 젠더연구가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면 한국에서의 여성학은 역사학자인 스콧(Scott)이나 벤하비브(Benhabib)같은 철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바대로 ‘역사의 주체임을 포기할 수 없고 사회적 성 정체성의 구성이 여전히 중요한 기획’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학문적 토대 위에 서있다. 이는 아마도 젠더연구가 객관성을 강조하는 기존의 학문분야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절실히 요구하는 여성학적 학문경향의 경계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근거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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