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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분열의 감정적 원천은 공포 전가 전략이다”
“한국사회 분열의 감정적 원천은 공포 전가 전략이다”
  • 박형신 고려대 강사·사회학
  • 승인 2016.01.19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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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공포 감정의 거시사회학』 박형신·정수남 지음|한길사|429쪽|24,000원

아직 젊다는 점에서 그들이 퇴행적 행위를 할 가능성은 기성세대에 비해 낮고, 또 서로
경쟁자라는 점에서 그들이 조직화된 저항을 할 가능성도 낮다. 그 결과 그들의 행위는
수치심과 무력감에 의해 자기계발 및 체제순응의 양식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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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현 시점에서도 세계로부터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외부의 부러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그리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중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현재의 상황이 아니라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현재 고통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가능성이 보인다면, 희망이라는 감정의 지배를 받아 역동적 삶을 설계한다. 그러나 현재가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미래가 불확실하면, 그 희망의 불꽃은 시들고 어둠의 그림자가 엄습하며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아담 스미스가 일찍이 간파했듯이, 공포는 “우리가 앞으로 고통당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 행복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현재의 이중구조를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이 공포라는 감정이다.
감정은 이처럼 사회를 읽어내는 하나의 렌즈인 것만이 아니라 행위의 동인이 돼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근대사회의 형성을 ‘합리화과정’으로 묘사했던 막스 베버도 ‘감정적 긴장의 의식적 방출’이 사회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음을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감정과 이성의 이분법과 과학의 합리성 신화는 근대 사회과학에서 감정이 ‘그림자의 삶’을 살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감정 에너지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감정이 사회과학자의 눈에서 멀어지거나 그들이 애써 그것을 외면한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감정의 힘을 다시 포착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났다. 먼저 감정에 주목한 것은 프로이트 심리학에 근거한 ‘치료요법적 접근방식’이었다. 이 접근방식은 연쇄살인, 아동유괴, 성범죄 등 사회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부정적 감정(화, 증오, 적대감 등)에서 찾는다. 따라서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감정을 병리화 하고 그것의 치유에 집중한다. 우리 사회에서 감정관리·자기관리·자기계발의 담론이 유행하는 것도 이러한 경향에서 연유한다. 사회학에서도 감정에 관한 관심의 부활과 함께 전통적인 사회학적 시각의 틀 내에 감정을 다시 끌어들였다. ‘사회구성주의적’ 접근방식이라고 불리는 이 입장은 감정 역시 인간 행위와 사회제도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본다. 이 입장에 따르면,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슬픔이나 애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장례식의 규범이 있고, 사람들이 그 규범에 따라 감정을 조절하고 통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 인식과는 달리 우리는 이 책에서 ‘거시적 감정사회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 입장은 감정이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감정을 종속변수가 아닌 독립변수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간 이러한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사회운동과 감정의 관계에 관한 연구에서 일부 진전돼왔을 뿐이다. 전통적인 사회운동 연구가 사회운동을 비합리적인 무분별한 감정의 분출로 보았다면, 감정사회학적 시각에서는 분노와 같은 감정이 어떻게 사회운동을 유발하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켰는지를 분석해왔다.
그렇다면 거시적 감정사회학은 어떤 독특한 설명방식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사회가 직면한 최대 문제의 하나로 거론되는 청년실업을 예로 삼아 살펴보자.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이 문제는 넓게는 취업을 준비하는, 그리고 좁게는 취업에 실패한 청년세대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며 생존위기의 공포로 다가온다. 이러한 공포로 인해 청년들은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을 점점 더 드러내고, 잘 닦인 좁은 안전한 길에 올라타려는 청년들의 몸부림은 오히려 그들을 고도경쟁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한다.

치료요법적 접근방식은 이러한 청년들이 겪는 심적 고통을 ‘아픔’으로 진단하고 그 병의 원인을 그들의 능력 부족에서 찾고, 더욱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이 진단에서는 문제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 그러나 청년들은 ‘노오력’을 넘어 ‘노오오오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병은 낫기는커녕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제 불치병에 걸린 그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할 뿐이다. 반면 사회구성주의적 입장은 청년들에게 ‘전가된’ 고통의 원인을 사회에 되돌린다. 구조를 강조하는 사회학자들은 그들을 고통에 빠뜨린 사회구조를 규명하고, 문제는 사회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고치기 위해 ‘분노하라!’고 외친다. 그러나 대다수의 청년들에게 그 말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친다. 그들은 실업 공포에 분노하고 단결해 저항하기보다는 화를 내면서도 자기계발에 열중한다.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 우리의 거시적 감정사회학의 틀에 따라 분석하면, 그곳에는 상이한 ‘배후감정’이 작동하고, 그 배후감정에 따라 공포 감정이 상이한 ‘감정동학’을 통해 상이한 행위양식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공포가 자신이 아닌 사회구조에 의해 유발된 것으로 인지할 경우 분노라는 배후감정이 발생하고 사람들은 저항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반면 공포가 자신의 능력부족에서 기인한다고 인지할 때 수치심을 느끼고 자기계발을 통해 공포를 극복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 공포가 사회체계에 원인이 있지만 자신이 극복할 수 없다고 인지할 경우 무력감을 느끼고 체계에 순응하려하고, 공포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만 자신이 극복할 수 없다고 인지할 경우 체념하고 퇴행적인 행위를 하게 된다.

이러한 배후감정에 따른 행위양식을 청년세대에게 적용하면, 아직 젊다는 점에서 그들이 퇴행적 행위를 할 가능성은 기성세대에 비해 낮고, 또 서로 경쟁자라는 점에서 그들이 조직화된 저항을 할 가능성도 낮다. 그 결과 그들의 행위는 수치심과 무력감에 의해 자기계발 및 체제순응의 양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양식을 통해서조차 실업 공포를 탈출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그들은 최악의 상황, 즉 체념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자신들을 빗대어 청년들이 자조적으로 표현한 말이 이른바 ‘3포’, ‘5포’, ‘n포’ 세대이고, 그들이 고통과 공포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숨 막히는 ‘헬조선’이다.

한국사회의 청년세대가 처한 이러한 상황은 사회 전체에 어두운 ‘감정적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이것은 정부에도 또 다른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청년실업의 해결은 정권에게는 정치적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의 공포유발구조에 청년들이 적응하게 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현재 정부는 청년 일자리를 명분으로, 그리고 미래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을 빌미로 노동개혁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정부의 노동개혁 방식은 공포유발의 틀을 그대로 둔 채 단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청년세대의 일자리를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것을 통해 정권의 공포를 극복하고 일부 사회세력의 공포를 경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포를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만 한다. 이러한 공포 전가 전략이 바로 현재 우리 사회의 분열의 감정적 원천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시적 감정사회학은 배후감정과 감정동학을 통해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발생메커니즘을 밝혀내고, 대안적 정책의 가능성을 진단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실천적 성격 또한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박형신 고려대 강사·사회학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고려대 사회학과 초빙교수,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정치위기의 사회학』, 『오늘의 사회이론가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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