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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과 관찰에서 현실에 개입하는 정신에 이르기까지
오감과 관찰에서 현실에 개입하는 정신에 이르기까지
  • 교수신문
  • 승인 2016.01.1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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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가상현실 시대의 뇌와 정신: 의식세계에 개입하는 과학과 새로운 인문학적 사유』 서요성 지음|산지니|384쪽|28,000원

 

감각, 지각, 오성은 물질적 의식에 속한다. 이때 뇌의 뉴런 활동이 감각 및 학습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의식, 이성, 절대지는 뇌로 소급할 수 없는 정신이다. 자의식이 점차 뚜렷해지는 과정에서 자아가 생긴다. 자아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의식을 펼쳐 나가는데, 이것이 사유이다.

 

이 책은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1편(1999)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기획된다. 그 공상과학영화는 이미 특수효과, 음악, 편집 부문에 아카데미상을 받았고, 후속편도 기획되고 있던 차였다. 개인적으로 학위논문에서 문학과 공연의 경계 장르인 연극에 천착하면서, 학문의 정체성 및 월경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의 학회논문에서도 이성과 감정, 물질과 정신의 상관성은 물론이고 연극과 철학, 역사와 예술, 과학과 인문학 등 학문의 통합적 이해에 관심을 뒀는데, 마침 학계에서도 학제간 개념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매트릭스」는 기상천외한 활극이 아닌 철학적 알레고리로 다가왔다. 주인공 앤더슨은 아바타가 돼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던가, 복제 프로그램이면서도 인간과 같은 외양, 지능, 언어를 구사하는 스미스 요원은 로봇의 진화된 버전이며, 뇌를 복제하고 정신세계를 완전히 파악한 전자 뇌세포의 가상인물을 비유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극한으로 발전된 과학기술 시대에 매트릭스의 설계자 아키텍트의 예언대로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갓 태어난 아기가 성장하면서 체험할 수 있는 세계로서 가상현실을 상상한다. 매트릭스 시스템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모든 인간의 목덜미에 장착된 바이오 포트(bio port)를 통해 뇌에 접속한다. 그 섬세한 전선들이 대뇌피질에 수천 개의 작은 전극으로 자리를 잡으면, 매트릭스 컴퓨터에서 주는 신호만을 인간이 지각하게 된다. 이처럼 뇌만 장악된다면,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가상현실이 끝내 현실을 완전히 대체하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영화에서 이런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에까지 다가가지 못한다. 가상현실은 완벽해 보이지만, 네오나 모피어스와 같은 돌연변이의 출몰을 막을 수 없다. 주인공들은 지난날 가축처럼 사육돼온 자신의 진짜 모습에 전율하며, 매트릭스라는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해방을 꿈꾸며 실제하지(exisieren) 않는 실재(Realitaet)를 자신의 이상으로 상상한다. 그들은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진짜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건설하려 하며, 그런 저항 앞에 매트릭스의 꿈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인류를 구해낸 정신은 무엇일까. 아키텍트의 체념적 고백처럼 매트릭스는 인간의 뇌 활동을 모방한 기계 환경에 불과하며, 인간의 정신은 뇌로 간단히 환원될 수 없다. 인류의 저항, 희생, 관용, 배려 등과 같은 이타심은 비물질적 정신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자 헤겔은 주저 『정신현상학』 (1807)에서 의식(감각, 지각, 오성)이 정신(자의식, 이성, 절대지)으로 고양되는 과정을 따라간 적이 있다. 의식은 궁극적으로 절대지로 향한다. 의식 및 정신 활동은 역동적이기 때문에 감각, 지각, 오성 단계를 거치고 자의식을 지나 이성을 넘어 진리로 고양되는 것이다. 의식이 정신으로 변신하여 자신의 심층부를 드러내는 일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감각, 지각, 오성은 물질적 의식에 속한다. 이때 뇌의 뉴런 활동이 감각 및 학습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의식, 이성, 절대지는 뇌로 소급할 수 없는 정신이다. 자의식이 점차 뚜렷해지는 과정에서 자아가 생긴다. 자아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의식을 펼쳐 나가는데, 이것이 사유이다. 사유는 외부의 대상에 대하여 독자성을 드러낸다. 사유를 통해 대상은 개념으로 다가온다. 그럼으로써 자아는 대상과 통일된다. 
특히 헤겔은 이성의 단계에서 이성이 관찰하는 정신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성은 주어진 현실에 개입하는 정신(Geist), 즉 행위하는 현실적 의식으로 도약한다. 정신은 기존의 도덕과 관습 등을 받아들이면서 현실에 적응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고쳐나가는 능동적인 의식이다. 정신은 현실과 모순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때로는 일탈적인 행위로 비춰질 수 있다. 정신은 주어진 환경을 변혁하고 모든 가치관 수용 문제를 개인의 존엄성으로 환원함으로써, 자의식을 현실세계에 대치시킨다.

이때부터 개인은 개체가 아닌 세상 변화를 주도하는 주체로 재탄생한다. 그는 생물학적인 존재의 한계성을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자신의 정신을 드러낸다. 자아는 정신의 단계에서 비로소 타자의 가치를 인정하고 상대방과의 통일을 의식하면서도 보편적인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개별 의식으로 드러났던 이성은 세상과 고립된 의식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임이 밝혀진다. 이제 정신은 개별과 보편, 부분과 전체를 매개하는 중간 의식으로서 이해된다. 자의식 단계에서 보였던 타자와의 부정적인 관계는 긍정적인 관계로 바뀌고, 대립적 관계들은 지양된다.
정신에서 모든 대상의 제약은 극복된다. 존재는 개념이나 사유로 파악되고, 사유는 존재가 되며, 현실도 직접적인 존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과 인간의 통일이 이루어진 절대지에서 감각과 지각이라는 대상적 의식이 완전히 극복된다.

이처럼 의식은 절대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점차 물질이라는 조건으로부터 벗어난다. 헤겔은 정신을 단일한 현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다양한 의식 양태가 지양된 결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이후 단계의 의식이나 정신이 이전 단계의 의식이나 정신의 특성을 보존하면서도 그것과 같지 않으며, 볼륨이 보다 커지면서 절대지에 접근한다. 헤겔은 정신이 감각적 지각의 상태에 머물기보다 이성적 상태로 나아가면서, 궁극적으로 뇌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인류를 분석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헤겔은 뇌가 관장하는 의식과 뇌가 상관하지 않는 정신에 관한 이론을 선취하고 있다. 뇌는 정신 활동의 계기로 작동하지만, 정신 모두를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주장은 현대 신경과학이 분석한 의식의 탄생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의식의 근원지는 뇌는 유전자, 원자, 분자, 세포, 혈액 등과 같은 물질들로 이루어진 신경세포 40억 개가 모인 곳이다. 그들 사이에는 물리학 법칙이 적용된다. 하지만 신경생물학자 코흐는 뇌에서 가장 발달한 물질이 의식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성에서 정신이 최고점에 도달한다는 헤겔의 정신현상론과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위대한 관념론은 사변 담론이 아니라 근원과 법칙을 설명하는 과학적인 진술과 동일한 위상을 누린다. 헤겔의 철학은 표현 수단이 다를 뿐, 신경과학적 측면에서 ‘명예’ 과학의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사료된다.
현대 철학자 들뢰즈도 철학과 과학을 예술과 더불어 사유의 세 가지 형식이라고 말한다. 철학, 과학, 예술은 첫째, 보이는 것을 다시 재현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점에서, 둘째, 세 가지 사유는 각각의 제한된 형식을 통해서 무한한 우주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서요성 대구대·독어독문학과
필자는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브레히트학회 편집위원장으로 있으며, 공연예술과 문예학, 모더니티, 과학과 인문학의 상관성에 관한 논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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