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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여성은 ‘문제’가 아니다
만파식적 여성은 ‘문제’가 아니다
  • 교수신문
  • 승인 2002.12.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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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07 10:03:25


며칠 전 한 여학생이 찾아왔다. 그녀는 수강중인 교양과목의 발표과제와 관련해 자료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라고 방문목적을 밝히긴 했으나 정작 그 과제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말하지 않고, 그 수업에서는 세 명의 여학생을 빼고는 담당교수를 포함해 모두 남자들이므로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할 것이라고 비장하게 덧붙였다. 가뜩이나 늦가을의 한기 때문에 움츠러져 있던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하도 진지하고 목소리가 절박했기 때문에 긴장하게 됐으나, 결과적으로 그녀를 어떻게 도와야 할 지 얼른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과제에 대해 다시 설명하도록 요청해 그녀의 패닉이 소위 ‘여성문제’라고 하는 가제 때문임을 알게 됐고, 그러는 와중에 그 수업에서 있었던 군경력 가산점제에 관한 격론에 대해 듣게 됐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강의실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여 군가산점제로 인해 여성들과 장애자들이 겪는 차별이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 같은 것을 충분히 토론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왜 그 여학생이 자신의 과제보다도 그 수업 참여자들의 젠더 구성을 역설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 날 오후 내내 함께 머리를 마주 대고 그녀의 과제에 관하여 ‘작전’을 짰다.
짧은 칼럼의 제한된 지면에 세세한 경험담을 옮긴 까닭은 새삼스레 진리탐구의 현장인 강의실에 사회현실의 이해관계가 침투해 있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해관계가 더욱 활발하게 노정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부한 얘기지만 강의실에서 배포되는 지식은 각 교육주체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 관한 것이며, 학생과 교수간의 관계, 또 학생들간의 관계는 강의실 밖의 삶의 현장에서 복제되고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왕 언급한 사례를 좀 더 소개해 보겠다. 그 여학생과 나는 우회적인 접근대신 정면돌파를 전략으로 삼고,‘여성문제’라고 한 용어부터 문제삼기로 했다. 모름지기 학문의 기본인 분류와 용어정의로부터 출발하자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아무 생각없이 대했던 그 단어가 갑자기 낯설고 흉측하게 여겨졌다.‘여성문제’라니. 여성이 문제라는 것인지, 남성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여성만이 갖고 있는 문제라는 것인지, 도무지 애매했다.
주택문제, 교통문제, 환경문제 등, 우리의 언어관습상 ‘문제’라는 말이 붙을 경우에 보통 그것이 수식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에 있지 못하여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내포한다. 그런데 ‘여성문제’라는 용어에서 타깃이 되는 것은 여성이 처해있는 상황이지, 여성 자체인 것은 아니다. 물론 가부장제 역사가 만들어놓은 고정된 정체성의 범주로서 ‘여성’은 문제가 된다. 그러나 현재 욕망하고 의지를 행사하고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존재로서 여성은 아직 생성중에 있으므로,‘문제’라는 수식어는 부적절하다. 남성지배의 역사가 남겨놓은 두터운 퇴적물 속에서 문제삼을 여성의 흔적을 어디 한 번 찾아보시라!
‘여성문제’라는 용어는 남성중심적 젠더체계의 이분법이 만들어낸 것으로서,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종의 범주가 실제로는 남성만을 대표하는 것이고 여성은 국외자처럼 문제있는 범주로 간주하여 배제했던 역사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입증해준다.
조한혜정 교수가 청소년 ‘문제’ 대신에 청소년 ‘존재’에로 관심을 전환하여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기획하는 자율적 주체임을 인정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나는 조한 교수의 말에 동의하며, ‘여성문제’에 대해서 유사한 제안을 하고 싶다. 여성들의 주변을 감시하며 문젯거리를 찾는 대신에 그들이 각자 자율적 주체로서 사회에서 새로운 입지를 만들어 가도록 고무할 선진적인 여성‘의제’를 도출하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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