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5:15 (금)
학문후속세대의 패기 있는 사유의 실험을 기대한다
학문후속세대의 패기 있는 사유의 실험을 기대한다
  • 최익현 편집국장
  • 승인 2016.01.04 18:1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왜, 다시, 학술에세이 공모전을 개최하는가?

 

공모전에 관심이 있다면, 학술에세이의 성격과 의미, 주제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과 접근을 고민하는 게 좋다. 2002년 최종 응모작 60편의 절반은 이런 기본적인 부분이 결핍된 ‘논문 형식’의 글쓰기, 혹은 신변잡기적 에세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2년 <교수신문> 창간 10주년을 맞아 야심차게 진행한 기획이 바로 ‘제1회 학술에세이 공모전’이었다. “패기 있고 신선한 사유, 마음대로 날뛰면서도 제자리를 단단하게 잡고 있는 글들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기존의 논문적 글쓰기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 ‘삶과 세계에 대한 지적 명상’이라는 에세이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고, 우리 시대의 과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독창적 사유를 이끌어내자는 취지”를 내세운 기획이었다.
그러나 이 기획은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2002년 이후 ‘학술에세이 공모전’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했다. 그리고 13년의 시간이 흘렀다. 한국 대학의 급속한 변화와 변질은 그만큼 아카데미즘의 변화도 불러왔다. 학문공동체는 존재하지만 새로운 학문후속세대들의 진입이 점점 폐색되고 있는 것을 가장 큰 ‘불투명성’으로 꼽을 수 있다. 학문의 미래, 대학의 미래는 새로운 학문공동체 구성원을 길러내고, 이들을 어떻게 환대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들 학문후속세대에게 끔찍한 주문만 남발했지, 이들이 처한 절망과 좌절,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학문후속세대와 함께
<교수신문>은 13년 전 시도했던 ‘제1회 학술세에이 공모전’을 다시 호명해 이를 ‘학문후속세대와 함께 하는’이란 수식을 붙인 형태로, 다시금 속개하고자 한다. 만시지탄의 일이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대학문화 창달을 기치로 내건 <교수신문>의 지향성과 밀접하게 연결된 작업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번 학문후속세대와 함께 하는 학술에세이 공모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1년으로 잠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2001년 5월 <교수신문>은 ‘학술에세이 공모전 개요’를 이렇게 활자화했다. 정확한 명칭은 ‘학술담론의 대중화·학제적 사유를 위한 학술에세이 공모전’이었다. 생명을 주제로 내걸었으며, 응모자격엔 제한을 두지 않았다. 형식은 ‘주제에 대해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 글’로 설명했으며, 분량은 200자 원고지 100매 내외로 했다. 최종 응모작은 60편. 교수, 성직자, 가정주부, 대학생 등 다양한 응모자들이 목소리를 냈다.
당시 학술에세이 공모전을 알린 김재환 기자는 이렇게 썼다.

몽테뉴는 ‘에세’에서 “나 자신이 바로 내 책의 소재”라고 말한다.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를 거친 ‘근대인’ 몽테뉴가 당당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나’라는 말 속에는 중세적 보편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난 ‘근대적 개인주의’가 짙게 배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는 세계 앞에 홀로 선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에세이에 주목했던 문학비평가 루카치가 말한 대로, “스스로를 생각하고 발견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고유한 것을 만들어내는 예술형식”인 것이다.
에세이의 이런 주관적 성격은 지식인의 글쓰기가 ‘학술논문’의 형식을 띠고 있는 풍토에서 일정한 비판적 의미를 던져준다. ‘학문 제도’ 안에 포섭되는 학술논문의 글쓰기에서는 주체의 내면과 주관적 사유가 배어들 틈은 거의 없다. 개인의 내면은 억압되고, 주체는 메마른 형식주의 속에 익명화된다. 우리시대에 에세이가 요청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에세이는 추상적인 논리와 메마른 합리성만이 앙상하게 드러나는 글이 아니라, 섬세한 마음의 무늬와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는 글인 것이다.
‘학술에세이’의 개념을 조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좀 더 이해를 돕는다면, 이로부터 1년여가 지난 2002년 4월 5일 진행된 「기획좌담: 아카데미의 글쓰기, 이대로 좋은가」에 참석한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학)의 설명을 참고할 수 있다. 그 자신이 빼어난 필객이자, 정치한 정치사상에 입각한 에세이스트인 배병삼은 이렇게 지적했다.

에세이의 정신과 의미
“에세이라는 것은 논문쓰기에 사용되는 논리성과 객관성의 산을 넘어서 결국 ‘나’ 속에 담기는, ‘나’ 속에서 발효되는, 내가 씹어서 일종의 메아리를 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신변잡기적인 수필 수상의 맥락이 아닙니다. 에세이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사회성, 주제가 갖는 역사성들에 대한 고민들이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주제와 싸우고 그 싸운 결과를 공표한다는 것이죠. ‘나’가 명확하게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에세이라는 표현 속에는 다양한 글쓰기에 대한 갈증이 그 속에 농밀하게 녹아 있다고 봅니다. 진정한 에세이란 ‘사무침’이 미적형태로 표현된 것일 테죠. 논문이 기계적이고 물리적이라고 한다면, 에세이는 사무침으로 소화시켜서 피워낸 한 떨기 꽃일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성과 열정과 어떤 책임의식, 윤리의식이 함께 어우러질 때 나타난 사무침이 대중의 공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2016년 학술에세이 공모전에 관심을 둔 학문후속세대라면, 위와 같은 학술에세이의 성격과 의미, 주제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과 접근을 고민하는 게 좋다. 2002년 최종 응모작 60편의 절반은 이런 기본적인 부분이 결핍된 ‘논문 형식’의 글쓰기, 혹은 신변잡기적 에세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문후속세대와 함께 하는 학술에세이 공모전’은 오는 3월 25일까지 작품을 접수받는다. 최종 발표는 4월 11일(월) 유선으로 통보할 예정이다. 당선작은 4월 18일 <교수신문> 창간 24주년 기념호에 요약 발췌해 소개하며, 이후 단행본으로도 출간한다.
2002년과 달라진 점이라면, ‘학문후속세대’로 응모자격을 제한했다는 것, 글쓰기 분량을 조금 줄인 것을 꼽을 수 있다. 남의 언어를 빌린 무수한 각주들 뒤에  몸을 숨긴 기존의 논문 글쓰기와 다른, 패기 있고 신선한 사유와 실천의 언어를 기대한다. 상금은 대상 500만원, 최우수상 300만원, 우수상 150만원이다. 이 나라 학문후속세대가 처한 절박한 현실을 본다면, 상금 금액은 미미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작은 불씨 하나가 벌판을 사르는 불길이 되듯, 조금씩 지원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학문후속세대와 함께 하는 학술에세이 공모전’은 ㈜누리미디어(대표이사 최순일) DBpia가 후원한다. ㈜누리미디어 DBpia는 지식 콘텐츠 사업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곳으로, 1천200여개 학회와 논문서비스 제휴를 맺고 활발하게 아카데미와 교류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나그네 2016-01-10 02:39:30
평소에도 교수신문을 구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글을 읽다보니 공모의 취지와 사명의 훌륭함에 비해 홍보가 부족하게 될 우려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형태로, 그리고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는 형태로 공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