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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것이 곧 많은 것’ 비워야 채운다는 것을…
‘적은 것이 곧 많은 것’ 비워야 채운다는 것을…
  •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 승인 2016.01.0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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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⑩ 닫는 문, 여는 문
▲ 일러스트 돈기성

행복이란 원하면 늘 불행하다. ‘그 누군가에게서도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기에 행복하다’는 셰익스피어는 새해를 맞아 하나의 돌파구를 준다. 밖에서 열어줄 문을 닫음으로써 안에서 열 수 있는 문이 생김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그 하나, 밖으로부터의 문을 기꺼이 닫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가까이에서는 대도시를 탈출해 농촌으로 향하는 이들을 본다. 그들은 광고가 소리치는 소비유혹을 ‘사뿐히 즈려밟고’ 땅으로 향한다. 늘 그들이 부럽다. 얼마 남지 않은 정년을 못 채우고 학교를 떠날 때 막연하게나마 그런 꿈이 있었다. 사람은 1차 생산에 종사할수록 의미가 있다고 믿고. 물론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믿음과 실천 사이의 거리는 하늘과 땅 만큼이다. 

▲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경제 최강국 독일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싹트고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미니멀리스트, 최소한주의자쯤으로 번역할 단어다. 원래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최소한도의, 최소의, 極微의’를 추구하는 예술 태도를 말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심미적 원칙에 기초를 두기 때문에, 장식적인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근본만을 표현하고자 한다. 1960년대 미술에서 싹 텄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 너무도 급속도로 변하는 정보사회의 복잡한 사회구조를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피로감을 느낀 현대인들이 단순하고 간단한 형태나 구조를 선호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삶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단적으로 ‘적은 것이 많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지 못하는 행복이라면 그 문을 닫고 다른 문을 열 준비를 하자는 것. 한 마디로 물질의 소비라는 이름의 문을 닫는 것이다. 소비가 미덕일 때, 사람들은 소비를 위해 일하고 돈을 벌고 물질을 소비하고, 소비가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이 아니었다면…….

이제 그 문을 닫으려는 사람들은 첫째 이미 소유한 것을 버리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100가지 물건으로 소유를 한정해놓고 버리기 시작한다고도 한다. 버린 자리에 새로이 들여놓는 것은 빈 정신, 비어있으므로 맑은 정신이다. 맑은 정신이란 광고와 정보에 현혹당하지 않은 원래의 정신, 그러므로 ‘나의 정신’일 어떤 것이라고 상정된다. 

‘버리기·최소한 덜어내기’ 새해에 이렇게 좋은 ‘각오’도 없을 것 같다. 버리기에 앞서 남길 것을 생각하는 데에도 명상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무엇이 내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더냐.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더냐. 그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일 것 같다. 아니, 그것이면 된다. 그 다음은 나머지 장식적인 것들을 버리기 시작하면 된다.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다보니, 우리 개개인을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최소 단위 ‘단자(모나드)’를 말했던 라이프니츠가 떠오른다. 물질이라면 그 최소 단위는 원자겠지만, 모나드는 물질이 아닌 정신으로서의 최소 단위이다. 활동하는 힘, 스스로 움직이고 발전하는 힘, 이 무수한 단자들은 각각 다르고 서로 독립해 있으며 창문도 없는 존재라서 서로에게 영향주지 않고 자신 속에 내재된 활동 원리에 따라 활동하고 발전한다.

거기까지가 중요하다. 이제 그 ‘독립해 있으며 창문도 없는 존재’로서 세상을 사는 방식으로 후퇴할 때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모나드의 본질적인 작용은 表象이다. 표상이란 외부의 것이 내부의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 모나드는 외부의 다양성에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양성이 단순성을 해치고 본질을 죽이는 상황이 도래했다. 부와 풍요와 또 정보의 홍수와….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혼재 속에서 하나 모나드로서의 본질만을 소유한 채 다시 표상을 시작하자, 최소한으로.

나의 신년의 ‘각오’라면 바로 이것이다. 바깥과 덜 소통하기, 움츠리기. 

지난 2년간 작은 문학단체의 장을 맡아서 몸과 맘이 아팠다. 맘 좋은 동료가 덤터기를 써 줌으로써 나는 다행히 도중하차할 수 있게 됐다. 날아갈듯한 이 진정한 기쁨을 안다면 그도 진정 기뻐해줄 것이다.

철학적 사유의 기반도 사회적 통찰도 모자란 채 붓 가는 대로 몇 글자 끼적거리던 이 난도 내게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문도 닫기로 한다. 또 다른 문을 여는 일은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사는 데 늦은 일이란 없다.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전남대 독일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하인리히뵐학회장, 한국독어독문학회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도이칠란트·도이치문학』등을 썼다. 퇴임 후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장편소설 『표현형』 등을 내고 PEN문학활동상, 광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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