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15:10 (수)
정치, 그 가벼움
정치, 그 가벼움
  • 설한 편집기획위원 / 경남대·정치철학
  • 승인 2016.01.04 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딸깍발이] 설한 편집기획위원 / 경남대·정치철학
▲ 설한 편집기획위원

최근 돌아가는 정치상황을 보면 여야를 막론한 당·정·청 정치권의 가벼움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정책 혼선은 수시로 이어지고, 굵직굵직한 계획이나 결정들이 잇따라 변경, 철회 또는 유예되기 일쑤다. 朝令暮改식으로 이루어지는 잦은 정책 변화와 남발, 원칙 결여 등으로 정치권이 국민의 불신을 자초하고 불필요한 갈등과 비용만 유발하고 있다. 진중해야 할 정치인들의 잦은 말 바꾸기와 입장번복은 일상화돼 무책임과 정쟁이 난무하는 소모적인 정치를 부추긴다. 일단 발표하고, 반발하면 수정하는 임기응변식 정치는 탁상공론과 중구난방으로 시간만 허비하다 결국 졸속 처리로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의 정책결정과정 투명성은 144개 국가 중 133위에 머물러 있으며,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는 97위로 최하위의 부끄러운 수준이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피로감이 누적되면 국민들은 정치에 무감각해지거나 냉소적이 된다. 사회에는 편법과 불법이 고개를 들게 되고 국가와 사회기강은 무너지며 책임정치는 당연히 기대하기 어렵다.

한시적이고 잦은 정책 변경으로 혼선을 빚었던 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교육정책, 사시 존치 문제, 시간강사법 등은 우리나라 정책이 얼마나 일관성 없이 진행돼 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 최악은 1993년 수능 도입 이후 18번이나 변경된 대입제도로 정부의 대입정책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들의 신뢰를 무너뜨린 지 오래다. 대학구조개혁평가는 공정성과 신뢰성, 투명성이 의문시되고,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 부화뇌동하는 대학들은 시류에 따른 학과 개명과 통폐합을 밀어붙이고 있다. 교육목표에 대한 확고한 철학의 부재 속에 교육당국이나 대학의 근시안적인 행정이 이 나라의 교육을 멍들게 하고 있다.

한편 법무부의 ‘사시 폐지 4년 유예’ 방침은 법조계와 국민여론을 사분오열시켰다. 전문적인 특수 분야 정책을 두고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전화 여론조사를 근거로 한 법무부의 일방적인 연기 발표는 절차적 미숙함과 함께 졸속 행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법률 규정을 무시한 법무부의 설익은 정책 발표는 혼란만 부추기며 국민의 신뢰를 잃어 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시간강사의 신분 안정과 처우 개선을 취지로 제정된 시간강사법이 또다시 2년 유예되었다. 2011년 법 통과 이후 지난 5년간 교육 당국은 변변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시행을 미루며 허송세월했다. 당국이 법만 만들어놓고 시행은 유예하는 무책임한 상황은 계속되고 논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정책의 일관성 결여는 곧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정책 혼란과 표류로 나타나 결국 정책의 실패를 가져온다. 물론 민주화 이후 효율성 위주의 논리에서 벗어나 형평성과 민주성의 정책 이념도 강조되면서 기존 정책의 보류, 수정, 변경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기도 하다. 그리고 상황 변화와 미래 변수에 따라 정책조정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도 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근간이 되는 일관성에 대한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 수준이어야 한다. 국민들에게 정책의 신뢰성과 미래 예측성을 심어줘야 국민들이 거기에 맞춰 안정적으로 행동을 조정하고 장래를 설계한다.

민주화는 진전되었지만 우리의 정치는 오히려 경박스러워져 가는 모양새다.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무거운 이슈는 끊임없이 불거지는데 정치권은 무엇을 믿고 이렇게 가벼운 것일까. 국민은 실험대상이 아니며 결코 어리석지 않다. 가벼움을 부채질하는 정치 속에 국민의 삶은 불안하다. 가볍고 빠르며 감각적인 시대일수록 정치가 무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정치권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면 국민의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정치는 한참 더 무거워져야 한다. 정치인들이여, 가벼워진 정치를 경계하고 자중하라. ‘국민의 신뢰가 없으면 바로 설 수 없다(民無信不立)’는 말이 새삼 느껴지는 요즘이다.
 

설한 편집기획위원 / 경남대·정치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