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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 체제 아래의 생활세계를 그려낸 秀作 …
사색과 성찰의 무게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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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12.28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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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_45강.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의 ‘밀란 쿤데라 『농담』’

지난 19일(토)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 45강은 강연 순서상으로는 올해 마지막 강연이다. 밀란 쿤데라의 장편 『농담』을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가 읽어낸 자리였다. 잘 알려져 있듯 이 소설은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떠오른 밀란 쿤데라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도대체 이 작품의 모든 것을 풀어놓는 단초는 어떤 ‘농담 한 마디’였을까.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원로 문학평론가인 유종호 교수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에서 석사를, 서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 대산문화재단 이사, 문화융성위원회 인문정신문화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이화여대를 거쳐 2006년 연세대 석좌교수로 퇴임함으로써 교직 생활을 마감했다. 2013년 제36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이 됐다. 저서로는 『책 문학은 끝나는가?』(2015), 『시와 말과 사회사』 (2009),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2001), 『문학이란 무엇인가』 (1998) 등이 있고 제51회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학부문(2006), 제16회 인촌상(2002), 은관문화훈장(2001), 제3회 대산문학상(1995) 등을 받았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19 80년대의 프랑스에서는 누구나 밀란 쿤데라 특히 그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비평적 반응이 극히 우호적이었고 독자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물론 이러한 축복받은 문학적 행운이 작품 고유의 내재적 가치나 미덕에서 유래된 것만은 아니다. 그 수용에 친화적으로 작용하는 지적·사회적 풍토와 연때가 맞아서 가능한 것이다. 쿤데라의 경우 소련군의 탱크 부대 진주로 막이 내린 프라하의 봄과 무관할 수 없다. 처녀 장편인 『농담』의 첫 불어판이 나온 것은 1968년 가을의 일로서 ‘사람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알렉산드르 둡체크가 모스크바로 공수돼 굴욕적 처우를 받고 온 직후였다. 전 세계 주시의 대상이었던 소련군의 프라하 진주와 그 여파는 한 보헤미아 작가의 열의에 찬 수용에 크게 기여했다. 훌륭한 작품은 언젠가는 진가를 인정받게 마련이지만 문학 외적 요소가 그 촉진에 기여하는 것은 흔히 목도되는 비근한 문화 현상이다.

▲ 밀란 쿤데라

스물다섯이 되기까지는 문학보다 음악에 경도했다고 쿤데라는 말하고 있는데 그의 문학적 첫 열정은 서정시였다. 1953년에 나온 시집 『인간: 넓은 정원』에는 ‘갑갑한 이데올로기 형성기’의 불안이 벌써 엿보였다. 그러나 1955년과 1959년에 각각 새 시집을 내고 있다. 혁명에 가담하는 시인이 주인공으로 돼 있는 두 번째 장편인 『삶은 다른 곳에』는 그래서 반자전적인 작품이란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1962년엔 그의 첫 희곡 작품인 『열쇠 임자』가 프라하 국립 극장에서 상연됐는데 그 암묵적 체제 비판 때문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63년에 얄팍한 단편집 세 권을 발표했는데, 이 중의 일부가 뒷날 『우스운 사랑』에 수록됐다. 이때부터 작가 쿤데라가 탄생한 셈이다.

첫 장편인 『농담』은 1965년에 탈고했으나 2년간의 검열 당국과의 옥신각신 끝에 1967년에 프라하에서 출판됐다. 처녀 장편 『농담』에 이어 『우스운 사랑』, 『삶은 다른 곳에』, 『이별의 무도회』, 『웃음과 망각의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을 내는데 모두 체코어로 쓴 것이다. 그 이후에 나온 『느림』, 『정체성』, 『향수』 그리고 15년의 공백 끝에 2015년에 나온 『하찮은 것의 잔치』는 모두 프랑스어로 쓴 것이다. 이 가운데서 가령 『이별의 무도회』 같은 작품은 없어도 크게 아까울 것이 없지만 모든 작품이 그 나름의 독자적 매력과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소설 이외에도 에세이 모음이 있는데 쿤데라 작품 이해를 위해서 그의 에세이는 필수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학 일반의 이해를 위해서도 더없이 유익하고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돼 있다. 작가로서의 방법적 자각에 이르는 과정과 그 궁극적 경지를 엿볼 수 있어서다.

『농담』을 고른 이유

쿤데라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모은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불멸』, 『농담』과 함께 쿤데라의 필독 수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굳이 『농담』 읽기를 선택한 것은 대충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이 작품은 쿤데라의 처녀 장편이다. 처녀작을 정독하는 것은 작가의 작품 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묘사하는 세목이 풍부해서 직접성의 충격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느림』 이후의 후기 작품들은 이에 비하면 작품 세목의 구체가 소루해지면서 많은 것이 생략돼 있다. 그의 사상은 철학적 사상이 아니라 소설적 사상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소설적 사상으로 충만해 있고 과거의 전통적 소설의 미덕이 두루 갖춰져 있는 것이 『농담』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이유가 된다. 생동하는 다양한 작중 인물들이 등장해서 사회의 여러 층위를 보여 준다는 점도 큰 강점이다. 남녀 주인공에 해당하는 인물 이외에도 수다한 군소 인물이 나오는데 모두 살아 생동한다.
 
20세기 역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체주의 체제의 등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유일 정당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지배되며 모든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행위가 그 안으로 흡수되고 포괄되는 정치 체제의 사례로서 파시즘과 나치즘, 스탈린주의를 지적할 수 있다. 전체주의 체제라는 20세기의 정치적 공룡 아래서의 생활 세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도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는 것이 『농담』 선택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유다.

『농담』은 소설만이 전할 수 있는 다양한 진실을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것은 사랑의 소설이면서 자연스레 2차 대전 전후 20년의 체코의 사회정치사를 보여 준다. 인간의 내면을 속속들이 보여 주며 역사 속에서 부침하는 생생한 인물들을 통해 사회를 보여 준다. 사람은 가지가지란 실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소설이란 장대한 허구는 세목의 진실에 의해서 현실성을 갖게 된다는 말이 있지만 『농담』에는 세목의 진실이 그의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풍성하다. 규격화된 정의나 선입견을 떠나서 강렬하고 재미있는 이 작품을 읽어 보는 것은 문학 읽기에서 좋은 새 경험이자 훈련이 될 것이다.

농담과 웃음

작품 표제가 된 ‘농담’은 작품의 여러 국면에 적용할 수 있으며 작가의 소설적 사고가 응축된 열쇠 말이다. 농담은 웃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농담조차 통하지 않는 억압적 분위기는 당연히 병영에서 한결 더 지배적이다. 사실 전체주의 사회는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병영과 다를 바가 없고 양자는 완벽한 상동 관계에 있다. 검정 표지 부대에서의 생활 강요는 반드시 징벌적 의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의 경험을 통해서 전체주의 사회에적응하라는 교육적 효과를 노리는 것이기도 하고 따라서 징벌이 아니라 재교육이란 말이 흔히 쓰인다.

농담과 웃음이 없는 세상이란 어떤 것인가. “처음으로 농담을 한 사람, 말에서 웃음을 마련한 사람은 누구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나서 조지 슈타이너는 “구약에 농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순수한 말놀이 機智는 비교적 근자에 생긴 전복적 발전이 아닐까?” 하고 적고 있다. 농담이나 웃음에는 사실 전복적인 요소가 있다. 웃음이 부조화 인지의 반응이라고 할 때 유일신이나 단일한 이념 체계가 지배하는 권위주의 사회에서 웃음은 유일 권위에 대한 암묵적 조롱이나 비판이라는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또 진지함의 반대라는 점에서 웃음이나 농담은 권력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된다. 『농담』이란 표제는 농담조차 허용되지 않는 전체주의 사회의 어둠을 함의하기도 하지만 결코 單聲的인 것이 아니다. 유혹에는 성공하나 복수에는 실패한 헬레나와의 정사를 두고 루드빅은 자기가 우스갯감이 됐다면서 그게 하나의 ‘농담’이라고 말한다. 루치에와의 격렬했던 사랑도 결국은 시시한 ‘농담’이란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농담’은 多聲的이고 모호하고 그래서 더욱 매혹적이다.

키치의 거부

이 작품의 결말은 모든 것이 확실하게 종료되지 않고 어중간하게 끝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쉽다.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어야 한다는 작품의 구조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삶과 역사의 구조와 대응하지 않는다. 작품 구조 논리에 충실하다 보면 정작 삶과 역사의 논리를 저버리게 된다. 따라서 삶과 역사에 충실하기 위해서 작품을 뚜렷한 결론 없이 어중간하게 끝낸 것이고 루치에의 경우가 바로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쿤데라가 성토해 마지않는 키치는 미학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진실 지향의 리얼리스틱한 태도의 문제가 아닌가. 쿤데라는 키치를 거부하고 작가의 소임에 충실하게 리얼리티를 택한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사건 위주로 보지 않고 의식의 변혁이나 새로운 자기 이해와 세계 이해를 중시할 때 사실 이 작품은 결코 어중간하게 끝나지 않는다. 제7부 1장에서 모든 것을 알게 된 루드빅은 루치에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반추와 성찰을 계속한다. 젊은 날의, 또 기억 속의 루치에가 당시 처해 있던 상황의 상관물이라면 상황이 변한 15년 후의 두 사람은 다시 낯선 타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작품이 리얼리티의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 소설은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제7부 19장을 따르면 루드빅은 민속 음악의 세계에 대한 사랑을 되찾게 되는데 그것은 정치 선전과 문화 관료와 사회 유토피아와 광고 등에 의해서 버림받은 그 황량함 속에서 그 궁극적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자기와 루치에가 모두 파괴되고 유린된 삶이기 때문에 동류이며 두 사람의 운명이 흡사하다는 성찰에 이르게 된다.

눈에 띄는 대로 옮겨 본 작중 인물의 이러한 사색을 곧 작가의 전언이라고 수용할 필요는 없다. 주인공 루드빅의 다양한 감개와 사색 중의 하나이며 그것은 그가 놓인 상황의 상관물이다. 도처에 보이는 이러한 사색과 성찰은 쿤데라 소설의 특징의 하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을 제대로 수용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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