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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눈엔 은혜, 남눈에는 특혜
내눈엔 은혜, 남눈에는 특혜
  •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 승인 2015.12.2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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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⑨ 평가의 계절
▲ 일러스트 돈기성

‘12월’은 12월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살아온 한 해를 되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도 12월은 살벌하다. 한 학기의 긍정적 열매가 아니라, 지옥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성적평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들의 입장에서도 평가란 피를 말리는 주제다.

▲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그해 가을학기는 악몽으로 시작됐다. 개강 전날 오른쪽 귀가 먹통이었다. 월요일 아침에 찾은 이비인후과에서는 그것을 응급상황이라고 했다. ‘우측돌발성감각신경성난청’(한국질병번호 H91.2) 그 병은 학교를 탈출(!)하는 일로 이어졌다. 2주 입원하고 2주 순연하면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 막상 학기말이 되니까 숨이 막혔다. 

성적제출 기한이 임박해서야 기말시험을 치렀고 그날, 세 과목의 답안지 봉투를 모아들고 어둑해진 3층 복도를 빠져나오는 동안 갑자기 방망이 하나가 내 머리를 쳤다. 무슨 쓸모 있는 강의를 했다고 이 학생들을 줄세워 평가해서 그들 인생에 복과 화를 더하려는 것이냐!

물론 부임 한두 해 동안은 절대평가의 권위를 만끽했었다. 학생들이 성적에 목메는 것도 모르고 F학점을 날려가면서 그들의 성장에 촉진제를 준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순진한 세월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학에서 성적은 칼날로 변해갔다. 수강생이 20명을 넘으면 교수의 절대평가 권한이 사라진다. 학생들을 두부 자르듯 반드시 등급으로 나눠야 한다. 학생들은 절대평가 가능성을 보고 수강생이 몰리지 않는 과목을 노린다는 말도 들려왔다. 

교수 측은 절대평가로 교수의 권위를 세우기는커녕 학생들의 압력(?)에 굴하게 되기 십상이라서 차라리 부동의 상대평가를 선호한다고도 했다. 다만 B학점에 턱걸이를 하지 못하는 경우 그 아래는 교수의 재량권이 있다. 그런 것을, 졸업학기에 고지식하게 F학점까지 준 경우를 생각하면 이제사 가슴이 찢어지기도 한다. 참 괜찮은, 학과에 기여도도 높았던 학생이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는데, 바로 그래서 더 잣대를 구부릴 수가 없었다. 성적평가는 절대로 정성평가일 수 없으니까.

대학을 떠나 성적평가의 덫에서 해방됐으므로 마냥 행복한가. 아니다. 근년에는 바겐세일에 들어간 ‘행복’이라는 단어도 싫다. ‘한 줄 서기’평가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원은 360도지만, 한국인이 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니까. 그 끝에 재력 또는 권력이라고 새겨진 그곳만이 유효한 세상이라니,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이미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돼 버렸다. 아니, 평가의 기준이 아예 없다. 

한 나라의 국무위원이나 국회위원도 배신과 진실과 은혜와 같은 덕목으로 평가되는 세상이다. 정책과 그 실천과 결과로서 정량평가를 받아야할 직무를 수행하는 공인이건만. 거기에는 ‘이쁜 사람’ 말고, 외팔이건 한 눈이 멀었건 상관없어야 하건만. ‘내가 할 땐 단합인데 남이 볼 땐 담합일 수 있다’던 공익광고를 흉내내자면, 내 눈으로는 은혜인데 남의 눈엔 특혜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정성평가와 정량평가가 뒤범벅인 세상에서 어찌 살아야 괜찮은 삶을 산다고 할까.

많은 문학상이 태어나는 문단의 연말도 안개 속일 때가 많다. ‘예술 작품은 인간의 보편성에 바탕을 두고 길이 전승되는 재산이므로 국가적 또는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 국제PEN헌장 2항이다. PEN은 문학으로써 말 그대로 ‘세계 곳곳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려는 시도’에 대항하는 힘을 키우자 한다. 

세계는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한반도는 여전히 남북으로, 사회는 빈부로, 심지어 국민조차 혼이 정상인 국민과 혼이 비정상인 비국민으로 나뉘어 있는 오늘날, 삶이 어두워질수록 빛과 같은 문학이 요구된다. 밤하늘의 어둠이 짙을수록 별이 더 반짝이는 이치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문학이 문학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과연 어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한 해가 무기력한 회한 속에서 저문다. 나이테는 늘어 더 현명해져야 할 텐데, 새해는 늘 부담으로 다가온다. 내 주인공들의 불발을 기록하는 일 따위로 어찌 더 나아질 것인가. 쓰지 않을 수 없어 쓰는 것은 개인의 내적 필요일 뿐,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무용지물이다. 강의를 할 때는 억지(?) 학생들도 있었지만, 소설책에는 억지 독자가 없으니 정량평가로 보면 나는 더욱 깊은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전남대 독일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하인리히뵐학회장, 한국독어독문학회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도이칠란트·도이치문학』등을 썼다. 퇴임 후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장편소설 『표현형』 등을 내고 PEN문학활동상, 광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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