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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대학정론
  • 논설위원
  • 승인 2002.11.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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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30 14:55:43

요즘의 고시 열풍만큼 대학가의 황폐화를 보여주는 현상은 없다. 인문학의 위기와 이공계 지원 기피도 고시 열풍의 이면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수재들이 모였다는 서울의 이른바 일류대학들일수록 고시 열풍이 거세고 전공에 관계없이 너도나도 고시 공부에 매달리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기술고시가 가장 확실한 출세의 지름길로 여겨지고 있는 한, 대학의 경쟁력이나 교육의 내실화를 거론하는 것은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울대를 비롯한 수도권의 유수한 대학들은 고시학원이 된 지 오래이고 대학교육은 고시 공부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법대에서도 고시에 필요한 강의에는 전공과 관계없이 수강생이 미어터지고 고시와 관련 없는 강의들은 수강생이 없어 폐강되는 판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대학 자체에서 고시 열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공론화되기보다는 사석에서의 불평 정도로 끝나고 있다. 오히려 고시 합격자의 숫자를 그 대학의 위상과 연관시켜 고시준비생에 대한 공식·비공식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론에서도 부실한 대학 교육에 대한 질타와 처방은 무성하고 교육개혁의 청사진은 다채롭지만 고시 열풍을 어떻게 잠재우겠다는 대안은 찾아보기 힘들다.

문제의 원인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전통시대의 과거제도처럼 고시는 오늘날에도 신분상승과 입신양명의 확고부동한 평생보장제도이기 때문이다. 일단 고시에만 합격하면 일생 동안 특권적인 삶이 보장되니 누가 고시의 꿈에 매달리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고시 합격자들에 대한 과도한 사회적 보상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 인문학자나 기술자, 농민들에 대한 대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그러나 변호사나 고위공무원, 국회의원, 정치인 등 사회지도층이 고시 출신자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이를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로 스클의 도입이 지연되고 있는 것도, 고시 합격자 수를 늘리는 것도, 이들의 저항에 부딪쳐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사회적 합의와 공감을 끌어내는 장치 자체가 특정 이익집단에 장악돼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아직도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시민단체나 시민언론의 역할이 기대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양식있는 교수들의 목소리가 결집되고 증폭돼 사회적 합의에까지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를테면 법대 교수들이 일종의 양심선언을 통해 고시 열풍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는 것일까. 안타까울 뿐이다.

아울러 고시제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암기력 이외에 봉사정신이나 인성, 친화력 등의 요소를 같이 고려할 수는 없는 것인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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