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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騷音이 새로운 텍스트의 시대를 열었다
그때 騷音이 새로운 텍스트의 시대를 열었다
  • 이희경 이화여대·음악학
  • 승인 2015.12.1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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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메트로폴리스의 소리들: 빈·파리·베를린·뉴욕, 20세기 대도시를 가로지르는 현대음악의 풍경』 이희경 지음|휴머니스트|382쪽|20,000원

1913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유럽의 대도시들에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도발이 이어졌다. 빈의 음악회장에서는 낯설고 불편한 소리로 악명 높던 쇤베르크 일파의 연주에 주먹다짐이 오가는 소동이 일어났고, 두 달여 후 파리에서는 디아길레프가 이끌던 발레 뤼스의 「봄의 제전」 초연 현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밀라노에서는 미래파 예술가 루솔로가 ‘소음예술’을 선보여 보수적인 음악계를 경악케 했다. 도시와 공장의 소음이야말로 기계문명 시대의 새로운 음악적 재료라며 ‘소음예술’을 공공연히 주창한 미래파 음악만이 아니라,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쇤베르크의 음악도 빈 청중에게는 끔찍한 소음이었고, 폭발적인 에너지로 분출하는 스트라빈스키의 역동적인 음악조차 파리 청중의 노골적인 반감을 샀다.

인간의 귀는 낯섦과 불편함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덮개 없이 항상 열려 있기에, 청각은 외부 환경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된 익숙한 것들을 더 선호한다. 현대미술에 비해 현대음악이 더 낯설고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공장의 기계소리와 내연기관의 엔진 소리가 지배하는 도시 공간에서 이전 시대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음악 대신 시끄럽고 무질서한 소리의 향연이 펼쳐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소리들은 ‘비음악적인 것’으로, 즉 ‘소음’으로 타자화 됐다. 듣기 싫다는 심리적 저항감에는 특정 사회나 개인의 취향 혹은 편견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누군가에게는 강렬한 비트의 헤비메탈이, 누군가에게는 아프리카의 타악기 음악이, 또 누군가에게는 장대한 클래식의 교향악이 한갓 시끄러운 소음일 수 있다. 심지어 베토벤의 후기 음악도 때론 빈의 추종자들에게 창자가 뒤틀릴 만큼 견딜 수 없는 소리로 여겨지곤 했다. 이렇게 통념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이 ‘소음’이다. 그래서 역으로 소음은 기존 사회에 저항하는 음악적 징표이기도 하다. ‘음악’과 ‘소음’의 관계는 언제나 정치적으로 작동한다.

 

소리의 재발견과 정적의 정치학

20세기 현대음악의 역사는 비음악적 소리로 여겨지던 타자로서의 소음이 체제 내부로 포섭되면서 점차 음악의 경계를 확장해나간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쇤베르크의 무조음악과 원초적 에너지가 폭발하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서 녹음된 일상의 소리를 변형시킨 구체음악이나 전자장치의 소리 합성에 의한 음악까지, 이전 세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소리들이 주류 사회의 질서나 지배적인 문화 코드를 변이시키며 새로운 음악적 표현 영역을 개척해갔다. 그 과정에서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급진적 메시지를 설파한 대표적 인물이 케이지다.

1952년 「4분 33초」라는 침묵 음악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한 케이지는 1930년대부터 이미 일상의 소음에 귀 기울였다. 축음기, 라디오, 신문지, 음료 캔, 초인종 등 소리 나는 주변 물건들을 악기로 써서 음악과 소음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소음으로 음악을 ‘만드는’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점차 주변 소음을 더 주의 깊게 ‘듣기’ 시작했다. 「4분 33초」는 그러한 케이지의 문제의식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다.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세 번 열었다 닫으며 3악장 구성을 알리고 초시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 곡이 처음 ‘연주’됐을 때, 4분 33초 동안 청중에게 들린 것은 밖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등이었다.

케이지는 이런 소리를 들은 다음이라면, 거리든 교외든 어디에서도 주변의 소리에 더 주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케이지에게 ‘정적’이란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무수한 소리를 듣기 위한 시작이자 조건이다. 그가 「4분 33초」를 쓴 이유는 바로 그 ‘정적’의 순간에, 늘 존재함에도 듣지 못했던 주변 소리들을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정적의 고고학은 정적을 통해 비로소 세상의 소리에 귀를 열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케이지 이후 많은 작곡가들이 급변하는 세상의 소리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1960년대 말 캐나다 작곡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셰이퍼는 ‘사운드스케이프(소리풍경)’라는 용어를 창안하며 소리를 통해 생명체와 환경의 관계를 다루는 음향생태학의 초석을 닦았다. 또한 녹음기술과 전자장치 등 음악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현대음악은 전통적인 음악회장을 벗어나 다른 예술과 결합하며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 환경을 새롭게 디자인한다.

전쟁과 혁명으로 점철되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낯선 지역의 문화와 접촉하며, 인류 문명을 근본적으로 뒤바꾼 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경험한 20세기의 작곡가들은 이 격동의 시대를 소리로 담아냈다. 당대의 지식인들, 다른 분야 예술가들과 깊이 교류하며, 타 문화와 새로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창조된 현대음악은 20세기를 이해하는 흥미로운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음악은 지극히 일상적인 경험이고 사유의 대상이라기보다 힘든 삶에서 안식이 필요할 때 찾게 되는 존재가 됐지만, 현대음악은 특유의 진지한 어조로 세상을 낯설게 만들며 우리의 감각과 의식을 확장시킨다. 세상의 통념과 인습에 맞서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감행한 현대음악에서 인문학적 사유의 계기가 촉발될 수 있는 것이다.

▲ 1911년 칸딘스키가 쇤베르크의 공연을 보고 온 직후 그린 그림이다. 그랜드피아노와 청중의 모습이 인식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거대한 면과 선과 색채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이 가운데 지배적인 효과는 ‘노란 소리’, 즉 소리의 인상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적 사유의 대상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대중음악과 시장을 점유한 과거 고전음악의 압도적 위세 속에서 여전히 현대음악은 니치에 불과하고 어렵고 듣기 힘들다는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추상화된 음악만 따로 떼어내기보다 그것이 생겨난 시대적 맥락 속에서 들여다본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시각예술과 달리 시간 속에서 흘러지나가 버리는 음악을 인문학적 담론의 대상으로 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등장한 디지털 미디어와 인터넷으로 음악적 경험의 폭이 획기적으로 확장되면서 소수의 그룹에서 생산되고 수용되던 현대음악조차 손쉽게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열렸다. 아마존뮤직이나 낙소스뮤직라이브러리 혹은 애플뮤직에 올라있는 현대음악의 수는 엄청나며, 유투브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거의 모든 현대 곡들을 접할 수 있다. 그만큼 현대음악의 장벽이 낮아진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음악에 대한 담론은 더 이상 일부 전문가들의 소유물이 아니다. 현대음악이라는 낯선 존재를 통해 20세기 문화사를 새롭게 경험한 후라면, 우리 시대의 삶과 예술을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희경 이화여대·음악학

서울대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한 후, 베를린예술대학에서 리게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리게티, 횡단의 음악』, 옮긴 책으로 『진은숙, 미래의 악보를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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