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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적 동물무늬가 인상적인 고려불교 고승의 器物
해학적 동물무늬가 인상적인 고려불교 고승의 器物
  •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5.12.0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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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19) 청동상감 ‘정진대사’명 세발항아리 (靑銅製象嵌‘靜眞大師’銘三足壺)
▲ 사진① 청동상감_정진대사_명 항아리

연구자들이 해외답사를 할 경우 대부분 그 나라의 문화유적을 탐사하는 목적으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얻기 위해 빈틈없는 답사일정을 세운다. 많이 볼수록 많이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중요한 문화재를 접했을 때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은 있지만 감상하고 느낄 시간이 없는 아쉬움도 있다.

필자의 해외답사는 대부분 해외에 있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조사가 우선이고 짧은 답사기간에도 항상 하루 이틀 정도의 여유시간을 마련해 놓는다. 박물관이나 공공기관에 소장된 유물의 조사는 사전에 약속된 일정에 따라 일이 진행되지만 개인소장의 유물을 조사할 경우는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번에 조사한 유물 역시 귀국 당일에 급히 성사돼 헛걸음을 간신히 면한 사례였다.  

이 청동 항아리는 둥근 몸통으로 양옆에는 동물 얼굴모양의 손잡이가 달려있고 세 개의 다리는 중심을 잘 지탱하도록 밖으로 약간 벌어져 있다(사진 ①). 항아리의 높이가 38cm이고 입 지름이 21cm로 제법 크고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器物이 아니다. 이 유물을 조사하기 위해 지인에게 부탁한 이유는 항아리 몸통에 새겨진 銘文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몸통에는 ‘至元三年丁丑’, ‘鳳岩寺大師靜眞’이라는 명문이 양쪽 손잡이의 옆에 세로로 상감돼 있는데 당연히 ‘봉암사’와 ‘대사정진’이 눈길을 끌었다(사진 ②).

봉암사는 경북 문경에 있으며 신라 九山禪門 중에 하나다. 신라 헌강왕(879년)때 智證大師가 창건했고 고려 태조8년(935년) 靜眞大師가 중창해 많은 고승을 배출했다. 현재는 조계종의 특별수도원으로 평상시는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돼 있으며, 매년 부처님 오신날 하루만 개방하기 때문에 전국의 불교신자와 관광객 등 하루에 1만여 명이 넘게 찾는 유명한 사찰이다. 점심 공양의 쌀만 15가마니가 넘고 공양시간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5시간이나 되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연출한다. 그리고 조계종의 특별 수련도량으로 스님들의 冬安居나 夏安居 때는 전국에서 100여명의 승려들이 모여들어 수련한다.

그러면 정진대사는 누구일까.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兢讓(878년~956년)이다. 그는 25년간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신라 경애왕 때 돌아와 봉암사를 중창했고 고려시대에는 태조, 혜종, 정종을 禪門에 들게 했으며 王朝의 교체로 인한 혼란기 불교중흥에 큰 역할을 했다. 79세로 입적해 고려 광종16년(965년)에 ‘靜眞’의 시호를 받았고 靜眞大師圓悟塔碑와 靜眞大師圓悟塔이 봉암사에 건립됐으며 보물 제171호, 보물 제172호로 지정돼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사진 ③).

청동 항아리의 몸통에 또 한줄 새겨진 ‘至元三年丁丑’은 고려 충숙왕 때인 서기 1337년으로 ‘至元’은 元나라 혜종의 연호다. 그러면 정진대사가 입적한지 381년 후에 이 청동 항아리가 만들어진 것으로,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정진대사를 추모하는 器物로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다. 즉,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활약하던 정진대사가 381년 후인 고려 말까지도 계속해서 존경받고 고려시대의 불교계에 큰 영향을 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동 항아리의 밑바닥은 오랜 기간 불길에 닿은 흔적이 남아있지만 처음부터 불에 올려놓고 사용한 조리기구로는 보이지 않으며 傳世되는 과정에서 청동항아리의 용도가 변한 것으로 보인다(사진 ④). 커다란 항아리형태의 몸통은 鑄物이 아니고 4장의 기다란 靑銅板을 두드려서 접합해 만든 일종의 방짜기법으로 매우 특이하며 입술부분은 밖으로 짧게 말아 두들겨서 접었다(사진 ⑤).

▲ 사진⑥ 항아리의 입구, 부분

손잡이와 다리는 獸面모양으로 별도 주조해 청동 못으로 몸체에 고정했다. 특히 동물 얼굴무늬의 손잡이는 입을 벌리고 활짝 웃는 모습으로 해학적이며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아지처럼 친근하다. 얼굴의 두 귀와 턱 아래 수염에 청동 못으로 몸체와 연결해 고정시켰다. 다리는 밖으로 약간 벌어진 동물 얼굴 모양으로 3개를 붙였는데, 다리속이 빈 주물로 따로 제작해 두 개의 청동 못으로 몸체에 고정 시켰으며 생김새는 온화하고 해학적이다(사진 ⑥ ⑦ ⑧).

몸통 양면에 상감기법으로 梵字와 寶相花文을 대칭으로 새겨 넣었는데 銀象嵌이 아닌 朱錫象嵌으로 보인다. 은상감에 비해 제작비용은 많이 절감되지만 주석의 부식이 심해 상감된 부분이 많이 떨어졌나갔다(사진 ⑨). 보상화문은 梵字를 사이에 두고 위아래 대칭으로 네 송이의 꽃을 장식했다. 이 청동항아리는 고려말기의 주조기술, 상감기술, 용접기술과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방짜기술의 원형까지 확인할 수 있는 특이한 형태로 정확한 제작 년대를 알 수 있어서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문양사와 범자의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는 유물이다(사진 ⑩ ⑪ ⑫).

▲ 사진⑨ 항아리의 다리

유물표면의 부식상태와 상감상태 등을 종합해 보면 땅속에서 出土된 유물이 아니고 제작된 이후로 678년간 傳世돼온 유물이다. 678년 전에 봉암사에서 정진대사를 위해 제작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찰에서 봉암사의 정진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佛敎史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정진대사와 관련된 器物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또한 고려시대의 불교에 있어서 정진대사의 位相을 가늠하게 해 주는 유물이다.

후삼국시대 이후 몽고의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 의병전쟁, 6·25전쟁 등의 수많은  전란을 겪은 봉암사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도 건재하고 수백 년을 함께 잘 견뎌온 한 점의 유물이 당시의 시대상황과 우리 민족의 잊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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