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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물든 전설 … 신의 戰士들은 과연 그곳에 묻혔을까?
달빛에 물든 전설 … 신의 戰士들은 과연 그곳에 묻혔을까?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12.0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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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52.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도시 아이하눔
▲ 락 데 슈발리에 성채(시리아 홈즈) 사진 이정국

“진정한 지도자는 길을 알고, 길을 가고,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다”-존 C. 맥스웰(미국 성직자)

 꿈을 꾸었나보다. 우즈벡어로 ‘Lady Moon’이라는 뜻을 가진 아이하눔(Ai-Khanoum 혹은 Ay Khanum)은 옥수스 강을 굽어보는 언덕 위에 고고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참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곳이었다. 드디어 아프가니스탄에 왔고 동북방 쿤두즈 주에 자리한 아이하눔을 만나게 됐다. 아무다리아 강과 콕차 강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에우크라티데이아(Eucratideia)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진 옥수스강 위의 알렉산드리아. 아무다리아를 그리스인들은 옥수스(Oxus)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밤하늘에는 온달이 걸려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보름달이 뜨면 거기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이 나타난다고 한다. 아이 하눔의 말뜻도 ‘달 속의 얼굴’이라고 한다. 전설이 사실이 된 것일까. 달빛 아래 간다라 조각상에서 봄직한 신비한 미소―그걸 영어로는 ‘archaic smile’이라 한다고 파키스탄 친구 아미르 잔(Amir Jan)이 말해줬다―를 띤 여인이 언덕 위 궁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흔들자 순식간에 내 눈앞에 나타났다. 가만, 낯익은 얼굴인데…… 순간 잠이 깼다. 손에 들린 중앙아시아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 고대 도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알렉산더 대왕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그가 정복한 지역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가 세워졌다. 페르가나 분지 남서부에 세워진 ‘가장 먼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the Farthest)’라는 뜻을 지닌 Alexandria Eschate, 힌두쿠시 산맥 남쪽 기슭에 세워진 Alexandria in the Caucasus 등등. 아이하눔도 그 중 하나. 지중해에 면한 이집트 북안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도 그렇다. 시저의 연인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이 통치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의 중심이 알렉산드리아였다. 이 도시의 별명은 ‘지중해의 신부’, ‘지중해의 진주’. 이곳 어딘가에 예수의 제자 마가(영어로는 Mark, 이탈리아어로는 Marcos)의 시신이 묻혀있었다.

부는 넘쳐나지만 달리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던 베네치아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다는 마가의 유해를 들여오기로 한다. 마가를 베네치아의 상징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828년의 일이다. 당시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은 이슬람 압바스 왕조 치하였다. 시신을 빼내오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돈이 되는 일이면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이 있다. 무슬림들이 혐오하는 돼지비계에 마가의 시신을 싸서 배에 싣고 무사히 베네치아로 반입하는데 성공했다.

수호성인으로 모시기로 한 마가의 시신을 안치하고 베네치아의 도제(doge, 총독)는 성당 건축을 결정한다. 국제적 무역항이었던 베네치아는 정보가 넘쳐났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았다. 마가를 위한 성당은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의 聖 사도 대성당을 모방하기로 한다. 마침내 832년 비잔틴 양식의 성 마르코 대성당이 완성된다. 그 후 폭동으로 소실됐다가(976년) 2년 후 재건되고(978년), 1063년부터 1094년까지 공들인 작업 끝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됐다. 이 성당의 백미는 화려한 외관이 아니라 내외부의 모자이크에 있다.

제4차 십자군 원정(1202~1204년) 때 베네치아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 선박들에 성전을 치를 병사와 무기, 식량을 싣고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야 하는데, 그건 하느님을 위한 일인데, 가라는 성지에는 안 가고 동방 기독교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호소로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 모두가 마지막 성전(?)에 참가한 터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속수무책 당했다. 결국 십자군 원정은 그 후 50년이 지난 1254년까지 네 차례나 더 결행돼야 했다.

무늬만 십자군이었던 성전을 빙자한 탐욕스런 돼지들은 막대한 재화와 보물을 약탈했고, 약탈품은 당연히 베네치아로 흘러들어갔다. 이때 유입된 유물의 일부가 성 마르코 대성당을 장식하고 있다. 청동으로 제작된 네 마리의 말 조각상 ‘콰드리가(quadriga)’가 그것이다. ‘콰드리가’란 로마 시대에 전차경주 때 사용된 4두2륜 전차를 뜻하는 단어다. 대성당의 내부에 깔린 대리석 판석들도 소피아 대성당에서 뜯어온 것이라고 한다. 이스탄불에 있는 이 성당 꼭 가볼만하다.

▲ 아이하눔에서 출토된 헤라클레스상

한 세기 반 이상의 지긋지긋 오랜 세월에 걸쳐 치러진 십자군전쟁을 통해,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아드리아 해에 면한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 베네치아는 당시 유럽에서 최고 부자가 된다. 물 위에 세워진 도시 베네치아는 선박 건조와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세상의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미지의 세상, 가보지 못한 나라에 대한 동경의 한숨이 성 마르코 성당 앞 광장의 커피하우스 ‘플로리안(Florian)’의 실내를 가득 채웠다. 1720년 12월 19일 처음 영업을 시작했으니 5년 뒤면 300년 역사를 지니게 된다. 모차르트, 괴테, 바그너, 바이런, 디킨즈, 프루스트 등 수많은 예술가와 지성인들이 이 카페의 단골이었다.

자연스레 이곳 베네치아에서 인문의 꽃이 활짝 피었다. 플로리안은 당시 유일하게 여성의 출입이 허용된 카페였다. 베네치아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부럽기 짝이 없는 선망의 대상 카사노바가 활약하던 무대, 피도 눈물도 없는 유대상인 샤일록이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의 돈벌이 무대도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에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면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해안이다. 거기도 베네치아였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가 바로 그 동네 출신이다. 생각해보면 셰익스피어도 수상하다. 단 한 차례도 영국을 벗어난 일이 없다는 그가 어떻게 『베니스의 상인』은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 『베로나의 두 신사』, 『줄리어스 시저』,『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등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다수의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과연 셰익스피어는 가공의 인물이고 숨은 셰익스피어는 근대 프리메이슨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며 장미십자단의 회원인 프랜시스 베이컨일까.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Titus Andronicus)』라는 잔인한 비극적 복수극의 주인공도 로마제국의 장군이라고 한다. 조만간 이 작품을 구해 읽어봐야겠다. 누가 쓴 것이든 거기서 인간의 본질과 역사가 남긴 교훈을 엿볼 수 있을 것이므로.

다시 우리의 관심을 아이하눔으로 기울여보자. 이곳은 알렉산더 대왕이 박트리아와 소그디아(Sogdia)에서 한참 전쟁을 벌이고 있을 무렵인 기원전 329~327년 사이 헤파에스티온(Hephaestion)에 의해 건설됐다고 한다. 물론 신도시가 아니라, 예부터 있던 페르시아 도시를 재건한 것이다.

여기에 키네아스(Cinenas) 사당이 있고 그리스어로 쓰인 비문이 있었음이 확인됐다. 석회암으로 된 비문 안치대가 남아 있고 사라지고 없는 비문 끝부분 좌우에 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성지 델포이에 새겨져 있는 / 옛 성현들의 귀한 말씀 / 클레아르쿠스가 정성껏 베껴 / 멀리서도 빛나는 키네아스 성소에 적는다 / 어려서는 순종하라 / 젊어서는 자제하라 / 어른이 되어서는 공정하라 / 나이가 들면 조언을 구하라 / 죽을 때는 슬퍼하지 말라.”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옥수스의 알렉산드리아’로 비정된 이 고대 도시 아이하눔 유적의 또 다른 이름은 에우크라티데이아(Eucratideia). 에우크라티데스 대왕(Eucratides the Great)이라 불리는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에우크라티데스 1세(재위 기원전 170~145년 추정)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는 쿠데타로 박트리아에서의 에우티데무스(Euthydemus) 왕조를 전복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iochus IV Epiphanes)의 사촌인지, 아니면 박트리아 왕국의 관리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건 피를 부르는 권력욕이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명예욕이다. 그가 죽을 때 슬퍼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이하눔이 박트리아 왕국의 수도였는지도 확실치 않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발굴과정에서 대규모 약탈과 화재 때문에 이 도시가 소실됐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나 언제 누구에 의해 파괴됐는지는 여전히 미궁 속이다. 다만 출토된 비문 일부를 통해 도시 중심에 세워진 사당의 주인공이 키네아스이며 델포이 아폴로 신전에 새겨진 옛 성현의 말씀을 아이하눔 키네아스 사당의 碑銘으로 옮긴 사람이 클레아르쿠스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먼저 클레아르쿠스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키프러스(Cyprus) 섬 쏠리(Soli 혹은 Soloi) 출신의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Aristotle's Peripatetic school)에 속했던 인물이다. 그는 동방의 문화에 대해 다양한 글쓰기를 했으며, 아이하눔이라는 박트리아 도시로 여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키네아스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에피루스의 왕 피루스의 친구이자 테살리(Thessaly) 지역의 장관이었던 인물이다. 에피루스의 피루스(Pyrrhus of Epirus, 기원전 319/318~272년)는 헬레니즘 시기 희랍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 쪽의 재종형제(6촌간)이다. 그는 20세가 갓 넘은 나이로 미케아 시대부터 에피루스(Epirus)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부족국가 몰로쏘이(Molossoi) 왕국의 희랍부족장이었고 나중에는 에피루스와 마케도니아와 시실리 섬에 위치한 시라쿠사의 왕이 됐다.

키네아스는 이런 막강한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실세였다. 말하자면 옥타비아누스에게 있어서의 아그리파와 같은 존재인 셈이다. 그런 키네아스를 기리는 사당이 아이하눔에 축조된 것이다. 당시 그리스와 박트리아의 주종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기원전 6세기 무렵 메디아 왕조 페르시아의 23개 사트라피(satrapy, 속주) 중 한 곳이었던 박트리아는 알렉산더의 동방정벌 이후 셀레우쿠스 제국(the Seleucid Empire)의 속주가 된다. 셀레우쿠스 제국은 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이 분할되는 과정에서 셀레우쿠스 1세(Seleucus I Nicator)에 의해 건립된 헬레니즘 국가다. 제국의 최대 영토는 아나톨리아 중부와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투르크메니스탄, 파미르, 인더스 계곡을 포함했다. 셀레우쿠스 왕조는 기원전 323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존속했다.

풍요로운 농업적 기반 위에서 비교적 순조롭게 발전하던 박트리아는 기원전 145년경 아무다리야강을 넘어온 유목민 집단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희랍의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n)에 의하면, 시르다리아 강 북쪽에서 남하한 스키타이 집단 가운데 ‘아시오이(Asioi), 파시아노이(Pasianoi), 토하로이(Toharoi), 사카라울로이(Sacarauloi)’라는 네 유목부족이 아무다리아 강 남쪽의 박트리아 지방을 공격해 빼앗았다고 한다.

박트리아를 중국 漢에서는 大夏라고 불렀다. 후대에는 吐火羅라고 했다. 『前漢書』 「西域傳」 第66 大月氏國條를 보면 大夏와 月氏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대하에는 본디 대군장이 없었고 성읍들은 때때로 군소의 수령[小長]을 뒀다. 주민들은 나약해서 전투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월지가 이주해 오자 모두 그에 신복했다.…… 다섯 명의 흡후가 있다. …… 모두 대월지에 복속해 있다.”

『後漢書』 「西域傳」 第78 大月氏國條가 大夏가 처한 상황을 잘 전달해준다.

“월지가 흉노에 멸망당하자 마침내 大夏로 이주하고, 나라를 휴밀(休密)·쌍미(雙靡)·귀상(貴霜)·힐돈(肹頓)·도밀(都密)로 나눠 모두 五部의 흡후가 됐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서 귀상흡후인 구취각(丘就卻)이 (다른) 4흡후를 멸하고 스스로 왕이 돼 국호를 귀상(쿠샨)이라고 했다. …… 월지는 그 뒤로 극도로 부강해졌다. 여러 나라들은 모두 그 나라 왕을 ‘貴霜王’이라 칭하지만, 한나라는 그 옛날의 칭호를 써서 ‘대월지’라고 부른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大夏 즉 박트리아를 멸망시킨 유목집단은 다름 아닌 월지라는 부족연맹체에 속한 4개의 부족이었으리라 싶다. 대하는 월지의 지배를 받으며 5部 흡후로 나눠진다. 5部 흡후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흡후란 월지부족연맹체를 구성하는 부족장 내지 小王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康居에도 다섯 小王과 그들이 통치하는 영역이 있었다. 5部 흡후를 아는 것은 월지의 서천 경로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 창세기는 노아의 아들을 셈(Shem), 함(Ham), 야페트(Japheth)라고 전한다. 한편, 『부족지』의 저자 라시드 앗 딘은 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 투르크 종족들은 노아(Noah)의 아들 아불제 칸, 그의 아들 딥 야쿠이의 네 아들에게서 나온 후손들이라고 말한다. 네 아들은 카라 칸, 오르 칸, 쿠르 칸, 쿠즈 칸이다.

장남 카라 칸의 아들 중에 오구즈가 있었다. 이 아들이 신(알라)에게 귀의하면서 투르크 종족들이 둘로 갈리었다. 이방의 신을 받아들인 오구즈 지지파와 반대파로. 오구즈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해와 달과 별, 하늘과 산과 바다였다. 참 자연친화적이자 대단한 이름 짓기다.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오구즈의 여섯 아들들은 약속이나 한 듯 아들 넷씩을 뒀다. 막내아들 바다(딩기즈, Dinggiz)의 네 아들 중 막내인 키닉(Qiniq)이 분가해 키닉씨족의 선조가 된다. 훗날 이 씨족에서 셀죽이라는 족명의 기원이 될 셀죽(살쥑 Salj¨uk)이라는 영웅이 두카크(Duqaq)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성은 티무르알릭(Timuryaligh). ‘鐵弓으로 된’이라는 뜻이라고 하나 나의 해석은 다르다.

이들 셀죽 집안사람들은 10세기 말 24개 씨족으로 구성된 오구즈 야브구 부족연맹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시르 다리아(강) 하류의 우안 즉 잔드(Jand) 방향에 있는 키질 오르다(Kyzyl Orda) 근처를 둔영지로 선택한다. 셀죽 다섯 아들들은 이름이 아르슬란, 미카일, 무사, 유수프, 유누스였다. 이로 미뤄 셀죽이 景敎(네스토리우스교) 신자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당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페르시아계 사만조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샤머니즘을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무슬림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들 셀죽 투르크는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카스피해 북쪽 초원을 접수하고 오늘날의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에 해당하는 코카서스 지방을 수중에 넣는다.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출하면서 비잔틴 제국과 맞서게 된다. 터키라는 국가명의 배경에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수립한 나라를 셀죽 술탄국이라고 한다. 술탄(sultan)은 이슬람국의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셀죽 제국 술탄들에게 있어 셀죽은 전설적 영웅이자 조상이다. 셀죽을 현대 터키어로는 셀축이라고 표기한다. 앞서 말했듯, 그의 삶은 오구즈 야브구 부족연맹에서 시작됐다. 10세기 후반,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오구즈 야브구의 시르 다리아강 하류에 있는 겨울 수도 얀기켄트(Yangikent, ‘새 도시’)를 떠나 잔드 일대로 이주했다.

셀죽 집단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사만 왕조와 동맹을 맺고 이교도 투르크인들과 전쟁을 벌였다.

그를 계승한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셀죽 투르크 제국(1037~1194년)은 중앙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다스리던 수니파 무슬림 왕조다. 제1차 십자군의 공격 대상이 바로 셀죽 왕조다. 십자군(the Crusades)이라는 명칭은 이 聖戰에 참가했던 그리스도교 군사들의 의복에 십자가 표지를 붙인데서 유래한다.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이라는 멋진 영화가 있다. 이미 1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4차 십자군 원정을 다룬 영화인데 이슬람을 믿느냐, 기독교도냐 하는 문제와는 상관없이 상당히 감동적이다. 리암 니슨, 제레미 아이언스, 올랜도 블룸, 에바 그린 등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일품이다. 사라센 황제 살라딘 역을 맡은 시리아 배우 가산 마수드의 카리스마도 대단하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웅장한 성채가 있다. 실제 건축물은 시리아 홈즈(Holmes)에 있는 ‘기사들의 성채’라는 의미의 ‘Crac des Chevaliers’다. 십자군의 마지막 성채인 이곳은 멀리서 조망하는 것만으로도 그 견고한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윽고 “왜 여기에 어떻게 이런 성채를 지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저 성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뒤를 잇는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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