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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반도 여순 만충묘에 내리는 비
요동반도 여순 만충묘에 내리는 비
  •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한국근대사
  • 승인 2015.11.2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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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한국근대사
▲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지난 11월 16일 오전 요동반도 여순의 만충묘에 비가 내렸다. 분묘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우리 일행은 만충묘 앞에 한 줄로 서서 묵념을 올렸다. 경건하게 조성된 경내에는 우리뿐이었다. 하얀 비석과 낡은 크루프 대포가 121년 전의 참극을 전해주는 듯 했다.

1894년 11월 21일 동아시아 최고 요새인 여순이 일본군 제1사단의 총공격을 받았다. 청국군은 무너졌고 성내가 점령당했다. 선봉 부대인 제2연대와 제15연대 3대대가 살육을 시작했다. 이어 혼성 제12여단 소속인 14연대와 24연대가 가세해서 청국 병사와 주민을 구별하지 않고 살육을 자행했다.

여순만을 건너 피신하려던 사람은 육지에서 쏜 총에 맞아 바다 속에 수장됐다. 부녀자와 아이들도 도처에서 처참하게 희생됐다. 24일까지 4일 동안 계속된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36명뿐이라고 한다.

제1사단장은 토사번 출신의 야마지 모토하루 중장. 스파이로 활동하다가 통역을 맡던 코노 켄이치는 사단장 명령에 따라 학살했다고 증언했다. 1천500명에서 6천명, 또는 1만 5천명을 헤아리는 희생자는 백옥산 동쪽 기슭에 집단 매장됐다. 1994년에 백주년을 맞이해 만충묘를 정비하면서 처참한 상태가 드러났다. 그때 발굴한 일부 유해와 유물이 ‘만충묘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서양 기자들이 이 사건을 세계에 알렸다. <타임즈> 1894년 11월 28일자와 <뉴욕 월드> 1894년 12월 12일자 등에 실린 생생한 기사는 외교 문제로 비화됐고, 일본 정부는 변명에 급급했다.

일본군은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도 학살을 자행했다. 전국 도처에서 동학농민군을 살육한 것이다. 근대 일본군의 첫 외정은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양성한 육군은 7개 동원사단으로 참모본부 지휘 하에 전쟁을 개시했다. 첫 침략전쟁이 7월 23일 제5사단이 무단으로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사태였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지만 무라타 소총과 스나이더 소총을 가진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화승총과 창칼밖에 없는 수천 동학농민군은 일개분대 정도의 일본군에게 번번이 무너졌다.

가장 큰 전투가 벌어진 공주 우금치를 비롯 상주, 선산, 진주, 홍주, 해미, 청풍, 청주, 문의, 증약, 괴산, 보은, 금산, 연산, 논산, 원평, 태인, 장흥, 강진 등지는 학살의 현장이 됐다. 관군이 진압군에 동원되어 앞장을 섰고, 민보군은 근거지를 수색해서 돌아갈 곳을 없애버렸다. 붙잡힌 동학농민군을 어찌나 잔혹하게 살육했는지 목격자가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여러 지역에 산재한 희생자들의 집단매장지는 아직 한 군데도 발굴되지 않고 있다.

만충묘에서 떠오르는 글귀가 일본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만든 <시사신보>의 기사였다.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 “중국인은 장구벌레, 개돼지, 거지, 오합산적이다.” 이 신문은 정훈교재 역할을 했다. 일본군이 벌레와 짐승을 죽이는데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한국 근현대사는 한국 사료만으로 연구할 수 없다. 적어도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 국가의 사회변화 과정과 근대화운동을 함께 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리하여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정책이 침략과 대응, 식민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전환된 실상을 밝혀내야 한다. 그 시작이 중국에서 표현하는 여순대도살과 한국에서 미완성 상태인 동학농민군의 희생을 함께 찾아보는 일이다.

여순에 비가 오면 만충묘로 흘러내리지만 동학농민군 학살지에 비가 오면 땅 속으로 스며든다. 이제 121년 전의 아픈 역사는 현장에서도 역사교과서에도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한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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