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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 기능 뛰어넘어 고려인들이 추구하고 갈망하던 이상향 표현
문방구 기능 뛰어넘어 고려인들이 추구하고 갈망하던 이상향 표현
  • 교수신문
  • 승인 2015.11.1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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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18 청자동화오리연적 (靑磁銅畵鴨形硯滴)

고려시대 널리 유행하던 文樣중에 물가풍경무늬(蒲柳獸禽文)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자적인 것으로 서정적인 고려인들의 내면세계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물가풍경무늬는 고려 건국이래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자주 사용하던 연꽃, 龍, 飛天 등과 함께 지속적으로 도자기, 금속공예, 나전공예 등의 문양으로 사용됐다.
물가풍경무늬의 구성요소 중에 물위를 헤엄치고 하늘을 나는 오리(鴨)는 가장 대표적인 동물로 등장한다. 오리는 삼한시대 蘇塗의 솟대나 괴정동 출토 儀禮用 靑銅器의 솟대무늬와 夫餘國의 鐵劍 손잡이 끝장식, 한국식 청동검의 손잡이 끝장식으로도 사용됐다. 삼국시대에는 오리모양의 토기도 다수 제작됐으며 남북국시대 신라의 금속공예무늬로도 자주 사용됐다. 우리민족과 깊은 인연이 있는 오리(鴨)는 고대사회에는 인간과 천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자 역할을 해 신에게 인간의 염원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으며 금실 좋은 부부를 뜻하기도 했다. 물속에 사는 오리는 농경사회에 풍요로운 물을 제공하며, 많은 새끼를 낳아 多産을 의미하고 ‘鴨’字에 갑옷‘甲’字가 있어서 장원급제나 벼슬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러한 오리의 상징적 의미는 고려시대 문방용구인 硯滴에서도 나타난다.

연적은 벼루나 彩硯에 일정한 양의 물을 부어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器物이며 재질은 도자기, 토기, 금속기, 옥석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고려시대 청자와 조선시대 백자로 많이 제작됐고 대체로 고려청자연적과 조선초기백자연적은 출토품이고 조선후기백자연적은 傳世品이 많다. 고려시대 청자연적은 거의 像形靑磁로 人物, 動物, 果實 등 다양하게 제작했으나 현존하는 수량은 많지 않다. 高麗靑磁硯滴중에 모자사이의 정을 가장 잘 표현한 간송미술관의 「원숭이모자연적」(사진①)과 「청자오리연적」(사진②),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의 천진난만한 「靑磁童子硯滴」, 「靑磁童女硯滴」(사진③ ④)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꼽힌다.(사진⑤)의 「청자동화오리연적(靑磁銅畵鴨形硯滴)」은 높이 9cm, 길이 13cm로 국보 제74호 「청자오리연적」(사진①)보다 약간 크고 통통하며 제작기법과 형태는 거의 동일하다. 온 몸에는 비색의 청자유약을 두껍게 시유했으며 고개를 약간 쳐들고 물위에 떠 헤엄치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꼬인 연줄기의 연꽃봉오리를 입에 물고 등에도 자연스럽게 작은 연꽃봉오리와 연 줄기, 연잎이 얹혀있다(사진⑥). 날개와 꼬리깃털의 표현도 陰刻으로 섬세하고 정연하게 조각했으며 눈매와 부리의 표현 까지도 세밀화를 그리듯 빈틈이 없다(사진⑦ ⑧). 살짝 꼬인 연 줄기 끝의 연꽃봉오리를 입에 꽉 물은 형상으로 연꽃봉오리에서 물이 나오게 만들었다(사진⑨). 등에는 연잎받침의 入水口위에 커다란 연꽃봉우리의 뚜껑으로 끼웠으며, 뚜껑인 연꽃봉우리 중앙에 구멍이 길게 나있어 뚜껑을 닫았을 때 그 속에 물이차서 뚜껑이 흔들리지 않게 했다(사진⑩).

이 청자동화오리연적으로 미뤄 생각해보면, 간송미술관의 청자오리연적도 입에 문 것이 파손되기 전에는 작은 연꽃봉오리를 물고 있었을 것이다(사진⑪). 오리의 두 눈은 눈의 윤곽을 조각하고 酸化鐵顔料를 눈동자로 찍어서 검게 표현했다(사진⑨). 특히 중요한 것은, 입에 문 연꽃봉오리의 끝부분과 등에 얹혀 진 작은 연꽃봉오리의 열린 틈 속에 酸化銅顔料를 사용해 채색한 것이다. 결코 남발하지 않고 절제된 산화동안료의 붉은 채색이 청자오리연적의 아름다움에 頂點을 찍었다(사진⑫ ⑬). 고려청자에 산화동안료를 사용한 사례는 매우 드물며 청자연적에 산화동안료를 사용한 사례는 더욱 稀少하다. 아울러 세계최초로 발색이 까다로운 산화동안료를 도자기문양의 채색으로 사용한 高麗人의 창조정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사진⑭ ⑮ ⑯).

그동안 청자오리연적의 제작방법은 먼저 점토로 오리를 성형한 후에 어느 정도 건조시키고 세로로 반을 잘라 속을 파낸 후 다시 접합하고 세부문양을 조각하고 손질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원장 한성욱)에서 발굴한 전남 강진군 사당리43호 청자가마 폐기장에서 출토된 길이 16cm의 대형 오리연적의 초벌파편을 보면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인다(사진⑰). 점토로 오리모양을 만들고 일정시간 건조한 후 오리의 바닥부터 둥글게 파내기 시작해 몸속을 긁어 파내고 파낸 바닥을 뚜껑처럼 다시 덮어서 붙였다(사진⑱). 그리고 없어진 머리 부분은 별도로 성형해 붙였을 것이다.

이 「청자동화오리연적」 역시 위와 같은 방법으로 성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몸통에 유약을 두껍게 바른 후, 바닥에 묻은 유약의 일부 닦아내고 작은 돌받침을 사용해 번조했으며 빙렬은 없다(사진⑲ ⑳). 몸통에 골고루 스며들은 청자 유약의 발색이 맑고 투명하며 골이 깊게 패인 곳에는 청자유약이 두껍게 흘러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고려청자 비색의 濃淡을 만들어 한층 더 조화로운 색감을 발휘한다. 오리연적이 水中君子인 연꽃과 함께 조각된 것은 단순한 문방구의 기능을 넘어 고려인들이 추구하고 갈망하던 이상향을 표현한 것이다.

이 「청자동화오리연적」은 실제로 연적에 물을 넣고 出水의 실험을 한 결과 일정한 양의 물줄기가 고르고 힘차게 뻗어져 나와 실용성과 장식성을 겸비한 高麗匠人의 깊은 뜻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고려시대 청자오리연적 중에 가장 세련되고 보존상태도 좋으며 예술성이 높은 유물에 속한다. 이 작은 연적 하나로 고려인의 격조 높은 예술성과 당대 세계최고의 도자기제작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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