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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비를 기억하는 사랑의 방정식, 22년 뒤 ‘모솔리움’을 낳다
죽은 왕비를 기억하는 사랑의 방정식, 22년 뒤 ‘모솔리움’을 낳다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11.1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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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51. 유목 왕국 무굴제국 그리고 문명사의 걸작 ‘타지마할’
▲ 아그라성과 타지마할 사진 이정국

믿고 사랑하던 아내가 죽자 샤자한은 일 년이나 칩거하며 그녀를 애도했다. 그가 슬픔을 추스르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의 등은 굽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는 온통희어있었다.

부르한푸르에 일시 묻혀있던 그녀의 시신은 금관에 안치돼 아그라로 옮겨졌다. 그리고 야무나 강변의 작은 건물에서 안식을 취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샤자한왕은 죽은 왕비를 위한 모솔리움의 설계와 건축을 구상하고 있었다.

 

“만물의 창조주도 실수를 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한 번은 금을 만들고, 한 번은 여자를 만든 것이다.”―인도 속담

 佛家에서는 인간이 버리기 어려운 세 가지를 三毒心으로 표현한다. 그 세 가지 독은 다름 아닌 貪瞋痴, 貪慾과 瞋와 愚痴다. 과도한 욕심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음을 말한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분하게 여기면 마음은 물론 몸도 편안하지 못하다. 욕심은 있으나 구하지 못하면 괴롭다. 어리석으면 無明의 길을 걷게 되고 잘못을 범하기 쉽다. 남을 욕하고  욕하면서 쓰라리다. 여기서 번뇌가 생긴다. 六煩惱라 해서 三毒心에 慢, 疑, 惡見을 덧붙이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번뇌 속에 사는 無明의 중생이다. 이광수 선생의 무명』을 되읽으며 어리석어서 안타까운 삶을 사는 존재들을 만나 내 어리석음을 위안 받을까. 이만큼 살았는데 언제까지 어리석을까 생각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가만히 있는데도 땀줄기가 줄줄 흘러내리는 비지땀을 처음 경험한 것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인 타지마할을 보러가서다. 1989년 8월 인도의 더위가 그랬다. 날씨도 그런 판에 홀연히 눈앞에 드러난 건축미의 백미 타지마할의 장관은 눈을 의심케 했다. ‘우아한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나는 생각했다. 완벽한 대칭의 대리석 건축물을 짓는데 연인원 2만 명의 노동력을 동원해 22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내 입에서 나온 거친 말은 “미쳤군!”이었다. 그러나 죽은 왕비를 못 잊어, 그녀를 위한 죽음의 궁전(mahal)을 지은 것이 결국은 전 세계 관광객을 아그라(Agra)로 끌어 모으는 결과를 낳았다. 이집트도 그렇듯, 인도도 조상 덕에 먹고 사는 나라다. 그런데 그 조상은 인도아대륙의 先主民인 드라비다족(Dravidians)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페르가나를 근거지로 하던 유목민이다.

유목민은 끊임없이 이동했다. 주로 동에서 서로 움직였다. 기원전 3세기 무렵 몽골 초원―당시의 명칭은 달랐을 것이다. 그것이 궁금하다―의 중심 세력은 月支(月氏)였다. 월지는 어떤 말의 音借語일까. 이 또한 아직 해결하지 못한 종족 명칭이다. 유목민들은 곧잘 동맹을 맺었다. 그러다가도 상황이 달라지면 어제의 동지를 배반하고 뒤통수를 치기 일쑤였다. 어제의 친구 부락을 약탈하는 건 다반사였다. 속성이 이러니 친선의 뜻이자 배반의 예방책으로 최고 존엄의 아들을 質子로 교환하고서도 안심을 못했다.

기원전 3세기 경 흉노는 월지에 선우의 태자를 인질로 보내야 하는 언더독(underdog) 신세였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 없고 세상에 변전하지 않는 것이 없다. 흉노가 浮上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지도자의 역할과 능력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혁명적 지도자를 만난 匈奴―이 한자어 명칭 또한 정확한 어음과 어의를 알지 못한다―는 주변 정복에 나선다. 東胡를 누르고 서쪽의 월지를 攻破한다. 이로 인해 유목민 이동의 서막이 열린다. 동호가 새로운 둥지를 찾아 만주 벌판 등지로 흩어졌다. 월지도 서천을 감행했다.

▲ 샤자한과 그의 왕비 뭄타즈 마할

새로운 주거지를 찾아 이동을 시작한 이래 흉노가 유럽까지 진출했고, 그로 인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도미노 현상을 낳았다. 이어서 柔然이 가고, 突厥이 움직였다. 이미 살펴봤듯 오구즈 투르크의 Qynyq 부족의 일파로 아랄해 근방 니샤푸르(Nishapur)를 근거지로 하던 셀주크 투르크는 힌두쿠시에서 아나톨리아 반도,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지배자였다. 아랄해에서 시작해 호라산으로 페르시아로 마침내 아나톨리아반도로 세력 범위를 넓혀가며 이동한 결과다. 십자군전쟁에서 서방 기독교의 동방 상대가 바로 이 셀주크 투르크 이슬람이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 그 이전에 몽골이 전 세계를 누볐다. 원나라가 망했어도 몽골인들은 이미 세계 곳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무굴제국(1526~1857년)은 북인도에 존재하던 이슬람 왕조다. 왕실 혈통은 인도 북방의 유목민이다. 15세기 말 중앙아시아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는 티무르 왕조의 후예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란 ‘옥수스(Oxus) 강 넘어’라는 뜻으로 흔히 ‘河中地方’이라 번역된다. 당시 페르가나의 군주이던 土侯(Amir) 우마르 샤이흐(Umar Shaikh, 1469~1494년)가 어린 왕자 바부르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떴다. 바부르(Babur, 1483~1530년)는 ‘호랑이’라는 뜻이다. 그가 후일 무굴제국을 세운다. 무굴(Mughul)이란 말은 페르시아어로서 ‘몽골’의 와전이다. 무갈(Mughal)이라고도 하고, 모굴(Mogul)이라고도 한다. 무굴의 자칭은 구르카니(Gurkani)인데 그 말뜻은 ‘사위, 부마(son-in-law)’다.

무굴제국의 5대 황제는 샤자한(1592~1666년, 재위: 1628~1658년)이었다. ‘샤자한(Shah Jahan)’은 페르시아어로 ‘세상’(자한)의 ‘황제’(샤)라는 의미를 갖는 칭호다. 그의 본명은 꽤 길다. 알라 아자드 아불 무자파르 샤 아붓딘 무함마드 쿠람(A'la Azad Abul Muzaffar Shah ab-ud-din Muhammad Khurram). 왜들 이렇게 긴 이름을 사용하는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이름을 통해 잘난 척하는 것이다.

샤자한은 바부르, 후마윤, 악바르, 자한기르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됐다. 부친인 전임황제 자한기르(Jahangir: ‘세상의 정복자)와 모친인 라지푸트(Rajput) 씨족 출신의 타지 비비 빌키스 마카니(Taj Bibi Bilquis Makani)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참고로 Bibi는 ‘말(horse)’이란 뜻의 페르시아어인데, 어쩌면 투르크어에서 차용된 것일 수 있다. 샤자한과 무굴제국을 세운 그의 4대조 바부르는 칭기즈칸과 티무르(Timur)의 후손이다.

칭기즈칸은 西夏의 수도 銀川이 함락되기 직전 탕구트인들과의 싸움에서 독화살을 맞고 죽음에 이르렀다. 말에서 떨어져 그랬다고도 한다. Timur는 절름발이였다. 그래서 그의 신체적 약점을 비꼬아 영어로는 태멀레인(Tamerlane: 절름발이 티무르)이라고 부른다. ‘세상의 제왕’ 샤자한에게는 나이가 한 살 아래인 뭄타즈 마할(Mumtaz Mahal, 1593~1631년)이라는 이름의 왕비가 있었다.

1607년, 샤자한은 당시 14세의 페르시아 귀족 가문 출신의 아르주망 바누 베굼(Arjumand Banu Begum)과 약혼을 한다. 이 약혼녀가 후일 샤자한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 뭄타즈 마할이다. Mumtaz Mahal은 페르시아어로 ‘the cradle of excellence’(Mumtaz)와 ‘palace’(mahal)이 합쳐진 말로 ‘아름다운 요람의 궁전‘이라는 뜻을 지닌다.이 둘은 5년 뒤인 1612년 결혼을 한다.

샤자한왕의 첫 번째 부인 역시 페르시아 사파비 왕가(the House of Safavi)의 딸인데 이름은 ‘Lady from Kandahar’라는 의미의 칸다하리 베굼(Kandahari Begum)이다. 나이는 뭄타즈와 동갑인데 그녀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대략 1593~1650년). 그녀는 죽어서 고향인 칸다하리 바그(Kandahari Bagh)에 묻혔다.

뭄타즈는 14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 7명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녀는 38세에 죽었다(1631년 6월 17일). 부르한푸르(Burhanpur)라는 곳에서. 14번째이자 마지막 딸 고하라 베굼(Gauhara Begum)을 낳다가 난산 끝에 사망했다. 무려 30시간의 産苦를 겪었다니 그 고통 겪어보지 않았어도 알만하다. 참고로 엄마와 딸 두 여인 이름 말미에 붙은 베굼(begum)은 투르크어에서 파생된 페르시아어로 왕족이나 귀족 집안 여성에 대한 경칭으로 쓰이는 말이다. 남성에 대한 투르크어 경칭 베그(baig)나 베이(bey: 高官이라는 뜻)에 상응하는 표현이다.

어린 왕비 뭄타즈에 대한 샤자한의 애정은 각별했다. 남편인 샤자한에 대한 왕비의 사랑 또한 깊었다. 궁정시인들은 왕비의 아름다움, 우아함, 동정심을 앞 다퉈 칭송했다. 왕과 왕비는 서로 신뢰하는 동반자로 사이좋게 무굴제국 곳곳을 여행했다. 심지어는 전쟁터까지 함께 다녔다. 왕비에 대한 믿음이 워낙 대단해서 왕은 자신의 왕비에게 무르우자(Muhr Uzah)라는 領地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녀는 궁궐의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 타지마할 근처에서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모습

믿고 사랑하던 아내가 죽자 샤자한은 일 년간이나 칩거하며 그녀를 애도했다. 그가 슬픔을 추스르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의 등은 굽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는 온통 희어있었다. 부르한푸르에 일시 묻혀있던 그녀의 시신은 금관에 안치돼 아그라로 옮겨졌다. 그리고 야무나 강(the Yamuna River)변의 작은 건물에서 안식을 취했다. 부르한푸르에서부터 모든 일을 지시하고 지켜보면서 샤자한왕은 죽은 왕비를 위한 모솔리움(mausoleum: 靈廟)의 설계와 건축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구상이 실행돼 ‘왕관(을 쓴 왕비)의 궁궐(the Crown Palace)’이라는 의미의 타지마할로 완성되는데 무려 22년이 걸렸다.

세월이 흘러 샤자한왕은 60대 중반의 노인이 됐고, 1658년 어느 날 병석에 눕는다. 뭄타즈와의 사이에 낳은 큰 아들 다라 시코흐(Dara Shikoh, 1615~1659년)가 섭정을 하게 됐다. 그러자 형제들의 증오심이 들끓었다. 어린 동생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들의 유산을 요구하며 군사를 이끌고 아그라로 향했다.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난 아우랑제브(Aurangzeb)가 군대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돼 사무가르트 전투(the Battle of Samugarth)에서 형인 다라의 군대부터 무찔렀다. 그동안 샤자한은 병에서 회복됐지만, 아우랑제브는 부친이 더 이상 통치 능력이 없다고 선포하고 그를 아그라성에 유폐시킨다.

샤자한은 그렇게 자신의 아들에 의해 軟禁생활을 하다가 죽음에 임박해서는 망령이 들었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다른 이도 아닌 더 없이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와의 사이에 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내다니. 야무나 강이 발 아래로 흐르는 아그라성에 유폐돼 저 멀리 뭄타즈가 묻혀있는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매일같이 통곡했을 노왕은 8년 뒤인 1666년 74세를 일기를 세상을 뜬다. 무슬림이었던 그는 칼리마 샤하다(Kalima Shahada: ‘증언’)를 읊조리며 마지막 숨을 거뒀다.

“라 일라하 일라-을라흐, 무하마두르 라술루-을라흐(lā ʾilāha ʾillā-llāh, muḥammadur rasūlu-llāh). 알라 이외 다른 신은 없도다. 무함마드는 신의 사자이도다(There is no god but God. Muhammad is the messenger of God).”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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