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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대학가 성희롱·성폭력, 근절책 없나
[기획특집] 대학가 성희롱·성폭력, 근절책 없나
  • 설유정 기자
  • 승인 2002.12.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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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성폭력 사건, 저마다의 인식들
일부 대학서만 예방교육…교수들 자정운동

질문. 다음 중 과연 어느 것이 성폭력에 해당할까.
1. 과제와 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에 있는 여학생에게 “옷을 왜 그렇게 입고 다녀? 바지 말고 치마를 입는 게 어때?”라고 말한 경우
2. 강의가 막 시작된 강의실. 몇몇 여학생들이 앉을 자리가 없어 강의실 뒤편에 서있다. 이 때 교수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우스갯소리로 “서있지 말고 마음에 드는 남학생 골라 무릎에 앉아”라고 말한 경우
3. 과 행사 후 가진 회식 자리. 열심히 했다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이리 가까이 앉아봐” 또는 “선생님한테 술 한 잔 따라봐”라고 말한 경우

“귀여워서” VS. “성희롱” 논란
잊을만하면 터져나오는 대학가의 성추문. 교수는 ‘귀여워서 쓰다듬었다’고 주장하지만, 학생들은 ‘성희롱’이라며 분개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최근 서울대에서는 ‘성폭력적 수업환경 근절을 위한 모임’이 강의 도중 교수들이 말한 발언들을 대자보화해 한바탕 논란이 일어났다. 여학생들에게서는 ‘시원하다’는 반응이, 그러나 일부 남학생과 남자 교수들 사이에서는 “서 있지 말고 마음에 드는 남학생 골라 무릎에 앉아”와 같은 이야기가 왜 성’폭력’의 범주에 해당되는지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들의 반응은 93년 ㅅ대 S교수 사건, 98년 ㄱ대 K교수 사건, 99년 ㅊ대 S교수 사건에서부터 최근, ㄱ대 K 교수 사건, ㅅ대 K 교수 사건, ㄷ대 K 교수 사건 등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대학가의 성추문을 이해하는 열쇠다.
2000년 1월부터 2001년 6월까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대학 내 성폭력 건수는 총 1백12건. 그 중 교수 또는 강사가 가해자인 경우는 34건으로 전체의 약 30%를 차지한다. 올해 들어 잇따라 결성된 ‘교수성폭력 뿌리뽑기 연대회의’와 ‘교수 성폭력 피해자 모임’에 접수된 사례만도 13건이다.
대학 내 성폭력 상담소의 한 전문위원은 “사회적 지위나 높은 지식이 성폭력의 예방약이 될 수 없다”라고 강조한다. 논문심사 및 진로문제의 칼자루를 교수가 쥐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교수 제자 간 성추행 문제가 불평등한 권력 관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은 더욱 자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성추문이 두부 자르듯 판단하기 어려운데다 오랫동안 터부시해온 문제이다 보니 교수들조차 용어에서부터 혼란을 느낀다는 점이다.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개념조차 확실치 않거나 강간 등 신체적 접촉을 통한 성적 폭력(sexual violence)만을 심각하게 대하는 경향이 큰 것은 사회 전반의 문제다. 1998년 대법원이 서울대 신교수의 성희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고, 대부분의 대학 규정에 성차에 의한 괴롭힘(gender harassment) 역시 성폭력 범주에 들어간다고 명시하고 있을 만큼 ‘진보적’으로 보이는 대학가의 현실도 사정은 이와 많이 다르지 않다.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 제2조 제2호에 따르면 성희롱은 업무, 고용 기타 관계에서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그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해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요구 등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반면 성폭력은 강간, 윤간 뿐 아니라 성추행, 언어적 희롱, 음란물 보이기 등 상대의 의사에 반해 이뤄지는 모든 성적 행위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현행 성폭력특별법에서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강제적으로 성적행위를 하거나 성적행위를 하도록 강요, 위압한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조국 서울대 교수(법학과)는 “엄격히 따지면 법률적으로 성폭력은 형사사건, 성희롱은 민사사건, 혹은 노동법의 범주에 해당된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형사 처벌을 가할 수 없다고 해서 성희롱의 피해가 더 가벼운 것은 아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정유석 부장은 “성폭력의 강도가 후유증의 크기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라며 “권력관계에서 자신이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노와 자괴감이 다양한 형태의 상처로 나타나게 된다”라고 강조했다.
조주현 계명대 교수(여성학과)는 “이러한 생각의 골을 좁히기 위해서는 교수를 대상으로 하는 성희롱·성폭력 방지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라고 제안한다. 1999년 남녀차별금지법 제정과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으로 기업에서의 성희롱 예방 교육은 의무사항이 됐다. 금호그룹의 한 담당자는 “신입사원 교육에서 사원들은 생각보다 넓은 성희롱 범위에 놀라고 한번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대학가에서 신임교수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교육을 실시하는 곳은 계명대, 동아대 등 일부에 국한돼있다.
올해 교육인적자원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3백52개 대학 가운데 성희롱·성폭력 예방을 위한 학칙을 개정하거나 관련 규정을 만든 대학은 3백25곳으로 무려 92.3%에 이른다. 하지만 정비된 관련 학칙은 학칙일 뿐, 실제 예방 의지 여부는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올 8월에 개정된 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처리에 관한 서강대의 학칙 개정 중 ‘~을 할 수 있다’와 같이 ‘안하면 그만’인 내용이 상당부분 ‘~을 해야 한다’로 바뀌었다. 그러나 새롭게 신설된 ‘피해자는 사건 처리 과정과 관련하여 신분상 어떠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단, 피해자가 본 규정에서 정한 사건처리 절차를 따라야 함을 전제로 한다’라는 규정에서 알 수 있듯 여전히 사건의 본질보다 피해자의 처리 과정상의 부족한 점을 꼬투리 잡을 수 있는 여지는 남아있다. ㅅ대 K교수 사건을 고발했던 대학원생은 이것을 ‘숨은그림찾기, 혹은 학교가 빠져나갈 구멍’이라고 꼬집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들
교수의 성희롱·성폭력 문제는 꾸준히 이슈가 됐지만 그에 걸맞는 징계와 자성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종종 상아탑의 오만과 보신주의로 비판받는다. 불투명한 처리과정과 학연·지연 등으로 얽히고 설킨 교수사회의 침묵은 교수의 폭력을 교수의 인권으로 대치하면서 상아탑을 성추문과 불신의 장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대학가의 성추문을 도려낼 수 없는 깊은 환부라 포기하기엔 이르다. 가장 긍정적인 것은 자기 개혁의 목소리다. 지난 12일 경북대 인문대학 교수회가 낸 ‘학원내 성범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은 “신성한 학원에서의 성범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으며 또한 어떤 이유로도 보호되거나 은폐돼서는 안 된다”라고 못박으며 “교수를 비롯해 교육현장을 책임지고 있는 학원의 모든 구성원은 성범죄에 대해 단호한 개선 의지와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추행 사건으로 해직된 동료교수의 복직 추진 운동에 가한 일침이다.
ㄷ대 K교수의 복직 서명운동에 참여했던 몇 명의 교수가 제출한 ‘서명철회문’ 또한 의미 있다. 한석정 동아대 교수(사회학과)는 철회문을 통해 “무심코 한 서명이 흉악한 일을 덮고, 정의를 구현하느라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사과하며, “그 사건에서 통해 드러난 끈끈한 학계 ‘커넥션’은 한국사회학계가 일군 그동안의 업적을 무색케 할만큼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대학 내 성희롱은 성폭력에 대한 교수들의 정확한 인식 공유와 학교 차원의 제도적 지원, 그리고 남성과 여성을 평등히 바라보는 시각의 마련 없이는 근절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성희롱·성폭력은 나와는 무관하다’라는 아카데미의 완고한 부정이다.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대학도 아직 성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함께 고민하는 일부 교수들의 목소리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직 남아 있는 ‘희망’을 본다.
이제 다시 맨 위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어느 것이 성폭력에 해당할까. 정답은 ‘모두 다 해당된다’이다.

설유정 기자 syj@kyosu.net·이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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