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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신은 왜 세계 곳곳에서 홍수를 일으켰을까?
성난 신은 왜 세계 곳곳에서 홍수를 일으켰을까?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 영어학
  • 승인 2015.11.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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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50.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

 

▲ 길가메시1: Neo-Assyrian clay tablet. Epic of Gilgamesh, Tablet 11: Story of the Flood. Known as the "Flood Tablet". British Museum(런던).길가메시 서사시의 일부가 기록돼 있는 점토판. 대홍수와 방주의 건조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기원전 650년경의 것으로 확인된 아시리아의 점토판이 니네베에서 발견돼 현재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수메르어로 기록된 기원전 3세기경의 길가메시 서사시 원본 점토판은 인멸됐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대홍수 이야기다. 우드나피시팀의 이야기에서 보듯 신은 인간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고 소란스러워지자 인간을 벌주기 위해 홍수를 일으킨다. 성경에서도 신은 사악하고 교만해진 인간들을 징벌하기 위해 홍수를 일으킨다.  이런 면에서 길가메시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닮은꼴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몸집이 우람하다는 것 외에는 여성보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

 

그간 여러 차례 昭武九姓에 대해 살펴봤다. 중앙아시아 河中지방(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강 사이의 오아시스 지역)에 새로운 삶의 둥지를 튼 이들은 월지족이었다. 기원전 2세기 흉노에 패해 본거지인 현 중국 감숙성 기련산맥 일대의 목초지를 떠나 西遷한 월지의 무리가 힘든 유랑을 끝내고 마침내 정착한 곳은 소그디아나로 알려진 河中지방이었다. 낯선 땅에 자리를 잡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운 월지인들은 고향 昭武城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姓을 昭武로 삼았다. 이들이 세운 나라가 康國(오늘날의 사마르칸트)을 비롯해 아홉이기에 중국 史書는 昭武九姓이라 기록했다. 월지인 중에는 이주를 마다하고 고향 근처에 머물기를 선택한 무리가 있었고, 이주 도중에 마음에 드는 곳을 택해 그곳에 머문 집단도 있었다. 이런 離散의 역사는 부지기수다.     
 
바빌론 幽囚 혹은 捕囚(Babylon Exile or Captivity)는 유대인의 고난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오랜 저항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587년 칼데아 왕조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성경에는 느부갓네살로 나옴, 기원전 630년경~562년, 재위: 기원전 605~562년)왕에 의해 유다 왕국이 멸망한다. 그리고 유대왕 시드기야를 위시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다. 예루살렘은 이미 기원전 597년에 함락됐고, 이때도 여호야긴 왕을 비롯한 수천의 유대인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50여년이 지난 기원전 538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Cyrus) 대왕(성경에서는 고레스왕)에 의해 유대인은 속박에서 풀려난다. 키루스 대왕을 유대인들은 은인이자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렀다. 성경 이사야서 45장 1~3절은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핍박 기간 동안 유대인은 민족정신과 종교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예언자이자 제사장이던  에제키엘(Ezekiel, 성경 에스겔서의 주인공)은 미구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불어넣었고, 장로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관리했다. 안식일이 정해지고 유대교 회당(synagogue)이 처음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로 추정된다. 또한 경전을 정리해 구약성서의 기초를 만들었다.

은인인 고레스 대왕에 의해 속박의 사슬에서 풀려난 유대인들은 수차례에 걸쳐 바빌로니아를 떠나 본향으로 돌아왔고, 일부 유대인들은 계속해 바빌로니아에 남아 있었다. 이 결과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됐다. 구약에서 말하는 디아스포라(the Diaspora)는 바로 바빌론 유수 이후의 유대인의 離散에서 비롯됐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대제국 페르시아의 화려한 선진문화를 엿보았다. ‘불생불멸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빛과 지혜의 신)를 섬기는 불의 종교 조로아스터교를 통해 유일무이한 절대 신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유일신 여호와가 인간을 심판한다는 신에 의한 인간 행위의 윤리판단을 도입했다. 결국 바빌론 유수는 단순한 민족적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독이 약이 된 셈이다.

유대인들에게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악인이지만, 바빌론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왕이었다. 그의 업적을 여기서 칭송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가 고향 메디아(Media, 카스피 해의 남쪽에 있던 고대 페르시아 왕국)의 푸른 산과 나무를 그리워하는 아내 아미티스를 위로하기 위해 왕궁 안에 짓도록 했다는 ‘空中庭園(Gardens of Babylon)’은, 비록 지금은 사라져 없지만,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도 의아해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다. 이 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는, 즉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에 만든 옥상 정원으로 유프라테스 강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물을 댔다고 한다. 역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타지마할을 지은 무굴제국의 샤자한 왕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남의 땅에서 오래 살다보니 유대인들의 문화 속에는 부득불 다른 문화의 요소가 포함돼 있다. 문화는 전파되게 마련이고, 문화 간 접촉 과정에서 갈등과 수용이 이뤄진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닮은 홍수 신화가 다른 곳, 다른 문화권에서 목격되는 까닭은 문화가 모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木道令」이야기라는 홍수 설화가 있다. 어느 민족, 어느 문화에고 홍수설화나 신화가 존재하는데, 대개 인간의 탐욕에 대한 신의 복수라는 형태로 인류의 문명이 파괴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 것은 어떨까.

 

“옛날 하늘의 선녀가 땅에 내려와 계수나무 밑에서 쉬다가 나무의 정령에 반해 관계를 가져 아들을 낳았다.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고 소년은 나무 밑에 가서 나무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놀아서 목도령 즉 나무도령이라고 불리게 됐다. 하루는 나무가 소년을 부르더니 앞으로 큰 비가 와서 자기가 넘어지거든 자기의 등에 타라고 일렀다.

어느 날 갑자기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그치지 않아서 세상이 온통 물바다를 이뤘다. 넘어진 나무를 타고 떠내려가던 나무도령은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개미를 만나 아버지인 나무의 허락을 받고 그 개미들을 구해줬다. 또 모기떼들도 구해줬다. 마지막에 한 소년이 살려달라고 하는 것을 보고 구해주자고 했더니 나무가 반대했으나 나무도령이 우겨서 그 소년을 구해줬다.

비가 멎고 나무도령 일행은 높은 산에 닿았다. 두 소년은 나무에서 내려와 헤매다가 한 노파가 딸과 시비를 데리고 사는 집에 정착하게 됐다. 나무도령이 구해준 소년은 그 딸을 차지하려고 노파에게 나무도령을 모함해 어려운 시험을 당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구해주었던 동물들이 와서 도와주어, 결국은 나무도령은 그 딸과 결혼했고, 구해 준 소년은 밉게 생긴 시비와 결혼했는데 이 두 쌍이 대홍수로 없어진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됐다. 그리고 후일 목도령은 백두산 신선이 됐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조지 스미스(G. Smith)의 『창세기에 대한 칼데아식 설명(The Chaldean Account of Genesis)』(1876)에 실린 길가메시 삽화. 출처=https://tl.wikipedia.org/wiki/Gilgamesh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이다. 桓因 庶子 桓雄이 弘益人間의 큰 뜻을 품고 내려온 곳도 백두산 神檀樹 아래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웅녀를 만나 檀君 王儉을 낳는다. 이렇게 역사는 시작됐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 건국됐다. 청동기 시대가 시작될 무렵이다. 이때부터 제기, 농기구, 무기류로 청동기를 사용했으나 생활도구는 여전히 석기가 지배적이었다.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은 발달된 무기 덕분에 힘을 얻어 더욱 전쟁에 열을 올렸다.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2,300년 경, 이란 고원 서부에 고대 인도-유럽 인종에 속하는 유목민족이 등장했다. 앗시리아인들은 이들을 구티족이라고 불렀다. 구티족의 본거지는 현 이란의 수도 테헤란 남서쪽으로 400km 정도 떨어진 중부 자그로스 산맥의 고대 도시 하마단 주변이었다.

구티족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에 번성했던 바빌로니아 왕국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실제로 구티족은 수차례 바빌로니아 왕국을 침입하고 점령한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싸움을 먼저 건 쪽은 구티족이 아니었다. 기원전 2300년 경 아카디아 제국의 사르곤(Sargon)왕은 본거지인 산악지대에 살고 있던 구티족 왕 사를락(Sarlak)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구티족은 기원전 2230년경 바빌로니아(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쳐들어가, 기원전 2193년에는 마침내 엘람(Elam)을 전복시키고 수메르 전 지역을 휩쓸었다. 구티족 지배자들은 약 1세기 동안(기원전 2130년경까지) 권력을 잡았지만 바빌로니아 전역을 장악하진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중에 구티 왕조의 지배 하에서 라가시(Lagash)의 엔시(도시 국가의 지배자 혹은 왕자를 가리키는 수메르 칭호) 구데아(Gudea)가 수메르의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문화예술이 발전하고 라가시는 황금기를 구가한다.

그리고 구티족은 기원전 2082년 수메르인에게 정복당한 뒤 근동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일부 학자들은 구티 왕들의 이름이 중국 서역에서 활동하던 吐火羅族의 인명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구티족이 바빌로니아를 떠나 동쪽으로 이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구티족의 후손들이 멀고도 힘든 여정을 거쳐 파미르를 넘어 마침내 기원전 1000년경 타림분지 서쪽 끝자락의 오아시스 초원지역에 도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토화라족이라는 명칭은 후대 그리스 역사학자들이 붙인 것이다.

무수한 산악과 사막으로 둘러싸인 땅을 발견한 토화라족은 더 나아가 기련산맥을 넘어 하서회랑에 자리를 잡고 중국 문명과 접촉하기 시작한다. 중국 고대 문헌은 이들을 禹氏, 禹支, 禹知 등으로 기록했고, 후일 사마천은 月支라고 표기했다. 월지족의 정확한 기원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러나 월지족이 토화라족의 일부라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오늘날 월지는 사라지고 없다.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하루아침에 땅 속으로 사라질 리는 없다. 변성, 변복을 하고 어딘가로 숨었거나 역사가 그들을 소홀히 해 눈 깜빡할 사이 그들의 발자취를 놓친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 어딘가에 월지가 있다고 말하거나, 우리들 중 누군가가 월지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이다.

이 세상 영원한 것은 없다. 生이 있으면 반드시 滅이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의 홍수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mortality)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필경 죽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운명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을 극복하려 애를 쓴다. 길가메시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공포를 겪은 이후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을 불멸의 길을 찾는 데 매달린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내용은 이렇다.

“우루크(Uruk)의 지배자 길가메시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으로 3분의 2는 신, 3분의 1은 인간인 초인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그의 압제에 불만을 터뜨리자 天神 아누(Anu)(수메르어로는 안)와 母神 아루루(Aruru)는 길가메시의 힘을 낮추기 위해 엔키두라는 힘센 야만인을 만든다.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싸우고 예상외로 길가메시가 이기자 둘은 친구가 된다. 둘은 삼나무 숲의 괴물 파수꾼 훔바바를 정벌하는 모험에 떠나 그를 죽이고 우루크에 돌아온다. 길가메시가 여신 이슈타르(Ishtar)(수메르어로는 이나나)의 유혹을 뿌리치자 이슈타르는 아버지인 아누에게 길가메시를 징벌하기 위해 하늘의 황소를 내릴 것을 요청한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하늘의 황소를 죽인다. 신들은 엔키두가 훔바바와 하늘의 황소를 죽인 데 대해 분노하고 엔키두를 죽인다. 친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길가메시는 영생의 비밀을 듣기 위해 죽지 않는 유일한 인간인 우트나피시팀(Utnapishtim)과 그의 아내를 찾아 나선다. 고생 끝에 우트나피시팀을 만나 대홍수에 대해 전해 듣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얻지만 모두 실패하고 우루크에 돌아온다.”(위키백과에서 인용)

▲ 길가메시2: 새롭게 발견된 길가메시 서사시 V 점토판 일부. 이 점토판은 기원전 2003~1595년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를 가리킨다. The Sulaymaniyah Museum(이라크).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Epic_of_Gilgamesh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영생이나 불멸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대홍수 이야기다. 우드나피시팀의 이야기에서 보듯 신은 인간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고 소란스러워지자 인간을 벌주기 위해 홍수를 일으킨다. 심술궂은 신이다. 성경에서도 신은 사악하고 교만해진 인간들을 징벌하기 위해 홍수를 일으킨다. 이런 면에서 길가메시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닮은꼴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핍박과 고난이라고 할 바빌론 유수와 같은 전쟁의 상처가 인류 역사에 예기치 않은 긍정적인 흉터를 남긴 셈이다. 문화의 모방이 그것이다.

길가메시 홍수 설화에서는 7일간 큰 비가 내렸다고 한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는 기원전 2348년경에 큰 비가 40일간이나 내려 1년 10일간 홍수가 계속됐다고 한다. 노아의 홍수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2300년경 동방에도 대홍수가 발생했는데 바로 堯舜시대의 9년 홍수가 그것이다.

또 기원전 3500년경에도 중국대륙에 홍수가 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물의 신 共工과 불의 신 祝融이 싸워 공공이 졌고, 그래서 그의 무리가 하늘에서 떨어져 不周山을 들이받아 산허리가 무너져 웅덩이와 골짜기에 물이 넘쳤는데 이를 여와(女)가 보수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길가메시의 홍수설화는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 문화권에서 전해지던 이야기를 기원전 2000년경에 점토판에 기록한 것이다. 수메르 홍수설화의 지우수드라王, 길가메시 서사시의 우트나피스팀, 구약성경의 노아는 배를 만들어 생명을 구했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그밖에도 여러 면에서 이들 세 홍수 이야기는 놀랄 만큼 유사하다.

놀라운 것은 또 있다. 알타이 지방의 홍수 설화도 길가메시나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닮은꼴이다.

“나마(Nama)는 성품이 어질어 天神 텡그리(Tengeri)로부터 큰 홍수가 날 것이니 산 위에 배를 만들어 놓으라는 경고를 받았다. 나마는 소준울, 사르울, 발릭스라는 세 아들을 시켜 큰 배를 만들었다. 곧 홍수가 나서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다. 홍수가 그치고 배가 산꼭대기에 걸리자 큰 까마귀부터 차례로 새 세 마리를 날려 보냈으나 한 마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네 번째로 비둘기를 날려 보내니 자작나무 가지를 물고 돌아왔다.”

주인공과 신의 명칭만 다를 뿐 내용은 길가메시나 노아의 방주 홍수 설화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어찌 된 일일까. 알타이 설화 즉 투르크족 땅의 설화가 수메르나 유대인 설화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문화 보편주의에 기인한 우연의 일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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