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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獨은 새로운 의미에 접근하기 위해 나를 비우는 투쟁”
“孤獨은 새로운 의미에 접근하기 위해 나를 비우는 투쟁”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11.03 1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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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 『고독의 매뉴얼』 낸 백상현 한국프로이트라깡칼리지FLC 상임교수

“주체란 없다. 스스로 무언가를 이룩할 수 있는 개인의 의지와 같은 신화는 없다. 그래서 고독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비-선택의 상태에 대한 선택. 이 역설적 (비)선택이 바로 고독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의지의 공백에 대한 의지. 그것이 고독이다. 진리에 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면서도 동시에 최대한의 것은 마음의 문을 잠그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마음의 문을 잠그지 않는다면 마음은 미래에로 열리지 않는다.”

“고독한 자들의 공동체는 고독이라는 단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역설적 공동체를 구성할 것이다. 고독한 자들의 사회는 서로에 대한 가치판단으로 고정되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의 미래에 대해서, 그 가능성에 대해서 욕망하는 사회다. 고독의 공동체는 인간에 대해서 규정된 모든 편견으로부터 마음을 닫는 공동체이며, 도래할 규정, 언제나 새롭게 창조돼야 할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욕망하는 공동체이다.”

책의 부제가 ‘라깡, 바디우, 일상의 윤리학’인 『고독의 매뉴얼』(SFP위고 刊)은 232쪽 분량의 책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녹록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마치 시한폭탄같은 책이다. 책의 저자는 정신분석과 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한국프로이트라깡칼리지FLC 상임교수로 있다. 파리8대학에서 현대미술이론을 전공하고, 정신분석학·정신병리학·미학 등을 연구하며 라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백상현 교수다. 도대체 『고독의 매뉴얼』이란 책은 어떤 책일까. 저자에게 직접 물어봤다.

▲ 백상현 교수는 프랑스 발랑스의 에꼴 데 보자르에서 비디오아트를, 파리 8대학에서 현대미술이론을 전공했다. 파리 8대학에서 정신분석학, 정신병리학, 미학 등을 연구하며 라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프로이트라깡칼리지FLC 상임교수로 활동하며 프로이트라깡주의에 기반한 정신분석 임상가 양성에 힘쓰고 있다. 서울정신분석포럼SFP과 프랑스 렌느 2대학 ‘정신병리학_새로운 증상과 사회적 연대 센터’가 공동으로 설립한 HANS 아동청소년정신병리연구센터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이 있다.

△ 선생에겐 ‘미학자’라는 타이틀이 따라 붙는다. 대학에서 정신분석과 미학을 강의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건, 한국프로이트라깡칼리지FLC에서 상임교수로 있다는 점이다. 한국프로이트라깡칼리지는 어떤 곳인가?

“‘한국프로이트라깡칼리지’는 ‘서울정신분석포럼’이 올해 초 새롭게 단장하면서 만들게 된 정신분석 교육의 장이다. 2012년 정신분석가 양성을 위해 맹정현 박사에 의해 설립된 ‘서울정신분석포럼SFC’은 맹정현 본인을 비롯해 역시 『라깡 세미나 11』의 공동 번역자이신 이수련 박사, 그리고 고신대 의대 정신과 의사이자 교수이신 박시성 박사, 정신과 의사 김규호 박사, 광운대 김서영 교수 그리고 내가 함께 참여하는 라깡학파의 정신분석 교육-연구센터이다.

올초 한국프로이트라깡칼리지로 이름을 새단장하면서 보다 본격적으로 정신분석 임상가 양성 교육기관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또한 포럼은 지난 여름부터 프랑스 렌느 2대학과 공동으로 ‘한스 아동청소년정신병리학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라깡이론에 기초한 아동정신분석 임상 연구와 출판을 준비중이다. 포럼과 컬리지 그리고 센터가 추구하는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라깡학파의 정신분석 교육과 대중화다.”

△ ‘주어진 아름다움의 질서가 붕괴되는 기이한 유령적 아름다움의 장소로 돌아가는 실천’을 강조한 라깡주의 미학의 실천을 내세운 『라깡미술관의 유령들』을 발표했다. 다시 1년 만에 신작 『고독의 매뉴얼』을 내놨는데, 이번 책은 어떤 책인가? 간단하게 문제의식을 말해 달라.

“전작은 주로 미학의 영역과 윤리학을 연결하려 했다. 이번 새 책에서는 라깡 임상이론이라는, 본격적으로 정신분석-메디컬한 영역과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의 정치학을 연결하려 했다. 물론 이번에도 글을 쓰는 매개로 사용한 도구는 ‘유령’이라는 개념이고, 그에 따르는 다양한 예술작품들의 환영들을 이용했다. 이것이 둘 사이의 차이점이라면, 공통점은 정신분석과 철학의 이론을 일상의 영역에서 실천가능한 생활윤리로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누구나 읽고 실천할 수 있는 삶의 윤리를 말하고 싶었다.”

△ 정신분석과 미학 또는 철학의 결합은 자연스레 라깡, 바디우를 생각할 수 있다. 정신분석과 철학(미학)의 결합 혹은 그 넘어섬을 겨냥한 건 무엇 때문인가? 

“정신분석과 철학(미학)을 동시에 말하는 이유는 그 둘이 진리를 말하기 위해 가장 정교한 담론들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이트-라깡의 정신분석은 철학의 폐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후 철학, 특히 프랑스 철학은 프로이트-라깡의 철학-폐기-선언을 경유하고 그것에 적절한 변명을 제공하기 않고서는 다시금 철학으로 정립되기가 불가능한 상황을 맞이했다. 정신분석의 선언이 너무도 정확했기 때문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바로 이러한 정신분석의 요청을 가장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철학을 새롭게 정립한다.

내가 라깡과 바디우를 모두 참조해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20세기 인문학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제기로부터 나의 담론을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라깡과 바디우로 대표되는 정신분석과 철학의 연결은 20세기에 폐기된 진리의 개념을 다시 사유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절차로 보였다. 이 과정에서 겨냥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가능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그 어떤 진리의 환영에도 의존하지 않고 사유하는 것이 될 것이다.”

△ 선생은 ‘정신분석’과 ‘철학’의 결합을 통해 일종의 ‘유령학’을 호명해냈다. 『고독의 매뉴얼』도 이 ‘유령학’의 연장선에 있는 책 같다. 우리에게 ‘ 유령’은 데리다적인 것으로 친숙하다. 이 책이 유령학의 연장선에 있다면, 선생이 말하는 유령학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유령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데리다의 유령과도 멀지 않은 개념이다. 그러나 나의 유령 이론은 직접적으로 프로이트-라깡의 정신분석이 말하는 ‘환상 이론’과 관련이 있으며, 또한 바디우가 말하는 ‘공백’의 개념과 직결돼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인간의 모든 지각과 인식이 정교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환상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따라서 정신분석에서의 가장 진실한 순간이란 모든 환상의 신기루가 사라진 환멸의 찰나이다.

정신분석은 이것을 말실수, 꿈, 실착 등의 순간에서 찾는다. 바디우 또한 바로 이 순간으로부터 공백의 이론을 전개시킨다. 만일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바로 이러한 진리 부재의 민낯이 그 자체로 출현하는 순간 만큼은 진리의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라깡-바디우의 이 같은 환멸의 진리관으로부터 내가 끌어내려 했던 것은 유령의 존재 방식이다. 유령은 자신이 환영인지를 숨기지 않는 유일한 환영이기 때문이고, 바로 이러한 환영의 자기 폭로의 순간을 따라서 우리는 세계-고정관념의 지배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균열을 조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유령 개념은 정신분석이 말하는 ‘증상’ 개념과 동일한 것이며, 바디우 철학이 말하는 ‘사건’과도 동일한 것이다. 유령학이란 바로 이러한 개념들로부터 출발해 예술과 윤리 그리고 정신분석의 실질적 장소들을 횡단하려는 담론적 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이번 책에서 선생은 문학과 철학, 대중문화, 미술(회화)의 영역을 넘나들며 ‘고독’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는 한편, ‘타락하는 것’이 어떻게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절차인지를 논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고독인가? 일부에서는 파편화된 세계에서 ‘연대’를 더 강조하고 있지 않나?

“연대는 중요하며, 진보를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고독 없는 연대는 두 가지 숙명에 노출될 뿐이다. 첫째, 고정관념을 위한 전체주의적 연대가 그것이며, 둘째, 새로운 진리를 위한 것이었다 해도 그것을 다시 폭력으로 만드는 광신의 연대가 그것이다. 고독의 절차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해야함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고독이란 나를 비우는 작업인 동시에 주어진 이데올로기의 단어들을 고독하게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단어를 고독하게 만든다는 것은, 단어로부터 의미를 비워내는 것이다. 주어진 단어와 명제로부터 의미를 비워내는 것은 그것을 끊임없이 다시 사유될 수 있는 텅 빈 가능성의 장소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미 ‘평등’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 알고 있는 듯 행동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 평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 한정돼야만 하는 어떤 것일까. 의미의 고독 속에서 우리는 평등의 다른 가능성에 접근할 수도 있다. 가령, 시민권자들 사이의 평등이 아니라 불법체류자들에게도 그 권리가 부여되는 평등의 개념은 어떤가. 그들에게도 교육과 의료의 복지혜택을 무차별적으로 부여하는 평등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능한 것일까. 

고독은 나의 자아가 새로운 기표-의미에 접근할 수 있도록 나를 비우는 일종의 투쟁이며, 이것 없는 모든 연대는 주어진 세계의 유한성을 반복하는 허망함 이상이 아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고독이 없는 연대는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할 뿐이다.”

△ 흥미로운 설명이다. 이번 책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서로의 미래에 대해서, 그 가능성에 대해서 욕망하는 사회’라는 구절이다. 지금 우리에겐 제대로 된 ‘미래와 그 가능성’에 대한 논의나 담론들이 결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건 ‘고독한 자들의 공동체’가 미래와 그 가능성을 욕망하는 사회라는 선언 때문이다. ‘고독한 자들의 공동체’는 어떻게 미래를 욕망할 수 있나? 그것은 어떤 미래인가?

“라깡이론에서 윤리적 욕망은 죽음을 욕망함이다. 풀어말하면, 현재의 고정관념들의 죽음을 욕망함이다. 왜냐하면 나의 자아는 현재의 고정관념의 침전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권력이란 언제나 보수적이며, 현행 체제를 유지하려는 목적 이상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 보수-진보 진영의 모든 정치세력에 해당되는 말이다.

내가 고독한 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고정관념의 자아를 몰락시키는 새로움의 사건에 자신들을 개방하는 자들의 공동체였다.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세력을 의미하기보다는 그야말로 욕망의 양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독은 미래에 도래할 사건을 욕망할 수 있는 결정적 조건이다. 고정관념의 난립에 마음을 닫는 고독, 그리하여 도래할 사건에 매혹당할 수 있도록 자신을 고립시키는 자들의 공동체를 위한 조건.

△ 그런데 ‘욕망’은 정치와 연결되며, 어떤 주체를 전제해야 한다. 선생이 말하는 욕망은 ‘주체’와 어떤 관계인가?

“따라서, 고독한 주체의 공동체는 저항하는 주체들의 공동체이다. 만일 역사의 언어를 지배하려는 권력의 시도가 있다면,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역사를 고독 속에 남기는 것일 수 있다. 고독 속에서만 역사는 새롭게 그것을 욕망할 주체들을 소환할 것이기 때문이다.”

△ 이번 책은 ‘추리소설적 기법’이 도입됐다. 철학자들이 가끔 이런 수법을 활용한다. 추리소설적 구성은 긴장감과 흥미를 유발한다. 그런데 책을 보면, 추리소설적 기법을 활용한 건 근본적으로 삶을 이해하는 선생의 독특한 시각과 연결된 것 같다.

더 흥미로운 건, 선생이 이를 통해 ‘삶’과 ‘사건’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선생이 말하는 ‘사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다려야하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고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인가?

“사건은 기다리는 것이다. 20세기 인문학이 주체의 가능성 자체를 폐기 시키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 스스로가 무언가를 도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무얼 하든 나는 나의 고정관념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건을 기다리는 수동적 주체의 모습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능동적 주체보다 더욱더 강한 의지가 요청된다. 그리고 사건은, 정신분석의 증상이 그렇듯이 언제나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건은 삶의 균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세계의 관념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는 학생들의 숫자만큼의 사건들이 있다. 그러나 선생은, 학부모들은 그들이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한다. 어른들은 수능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학생들을 사건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거나, 아주 드문 순간에만 그럴 수 있다. 학생의 가능성을 믿고 기다려 주는 것, 이것을 위해서 선생에게는 초인적인 ‘수동성의 의지’가 필요하지 않나?

그리고 이 모든 현상들은 전적으로 추리소설의 형식을 닮았다. 그것은 답이 주어진 빤한 방식의 추리소설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이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텅 빈 진리의 장소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돼야 하는 그곳으로 도달하는 형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책에서 의존했던 ‘추리’의 형식은 푸는 추리가 아니라 해체하는 추리였다.

추리란 무엇인가. 그것의 사전적 의미는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에 이르는 것 아닌가. 내가 말하는 추리 소설 역시 앎의 유한성을 지움으로 해서 도달하는 무지의 영역을 추구하는 것이다. 비워지지 않으면 새롭게 채워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 파리8대학에서 정신분석학, 정신병리학, 미학을 연구했다. 어쩌면 선생은 한국 정신분석 학계에서 본격적인 ‘학문1세대’일수 있다는 말과 같다. ‘정신분석’은 오늘날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하나의 방법론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문학자나, 국문학자, 영화비평가가 ‘정신분석’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철저한 개념, 방법론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들의 ‘언어’는 왜곡된 이해에 바탕한 것일 수도 있다. 한국 정신분석학이 거듭나기 위한 과제가 있다면 무엇인지 듣고 싶다.

“무엇보다, 라깡의 정신분석은 임상이론이다. 임상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출발점으로 하지 않는다면 타영역에서의 이론적용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임상만이 라깡의 이론이 논해져야 할 영역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라깡의 이론은 임상을 뛰어넘는 인문학적 가치를 풍부하게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깡의 원전에 대한 번역과 해석의 세밀한 작업들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우리 ‘서울정신분석포럼’이 계획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작업들이다.

△ 앞으로 저술 계획은?

“현재 『라깡의 루브르』(가제)를 쓰고 있다. 정신분석의 시선을 통해 루브르 박물관의 존재와 작품들의 현상학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내년 1월을 목표로 출간을 준비 중이다. 덧붙이면, 『라깡 세미나 7의 독해』 역시 준비 중인데, 이것은 내년 봄에 출간될 예정이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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