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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사태는 한국미술계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천경자 사태는 한국미술계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 윤범모 가천대·미술평론가
  • 승인 2015.11.0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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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청춘의 문, 화선지에 먹, 채색, 145×89cm, 196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천경자의 트레이드 마크인 꽃, 여인, 뱀이 한 화면에 모두 나오는 대표작으로서 22세 때의 결혼과 첫딸을 낳았던 과거의 경험을 슬프고 우울한 기억으로서 회상하는 작품이다. 20대의 삶의 고통의 상징이자 수호신이었던 뱀이 다시 등장해 화관이 올라가던 자리를 대체했고 대신 가슴에 한 송이 붉은 장미가 드리워져 있다. 60년대의 작품 에 등장하던 우울하지만 행복에 겨운 낭만적 여인은 혼자 남은 여인의 고독과 질곡 많았던 세월의 회한을 지닌, 서늘하다 못해 섬뜩한 눈빛을 지닌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했다. 출처=국립현대미술관

천경자가 돌아왔다. 환상과 동경을 깨고 돌아왔다. 아니, 돌아왔다고 인정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에서 그의 이름은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여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천경자 화백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시 한국 미술계가 웅성거리고 있다. 갑자기 전해진 천경자 화백의 사망 소식은 정부, 국립현대미술관, 가족, 화단 모두가 얽혀있는 ‘천경자 사태’를 만들면서 소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한 사람의 순수한 예술가는 증발하고, 소문만 무성해진 것이다. 한 시대의 우람한 거인의 타계 소식에 씁쓸하게 겹쳐지는 이 기이한 풍경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미술평론가 윤범모 가천대 교수가 ‘천경자 사태’를 짚었다.

천경자는 환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의 화사한 그림이 그랬고, 특히 이국적 풍광은 더욱 환상으로 다가 왔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시절에 그는 남태평양이라든가 아프리카 지역을 누비면서 신문에 연재했다. 경이로움, 바로 그 자체였다. 시원스런 드로잉과 맛깔스런 에세이는 대중적 호기심을 독차지했다.

1970~80년대의 천경자는 청소년 세대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특히 ‘여류’ 명사로서 그의 이름은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명성은 인기작가 반열에 끼어 있었고, 또 그림값의 고공행진에 기여했다. 천경자는 政府였다. 미술사적 평가와 무관하게 그의 명성은 그만큼 위력으로 넘쳤다. 피폐했던 시절에 그는 환상이자 憧憬이었다.

천경자의 화단사적 의의는 무엇보다 채색화의 복권에 기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본화의 잔재라고 폄하 받던 채색화, 하여 채색 물감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자신 있게 들어내는 것을 꺼려 할 때, 천경자는 채색으로서 예술가적 입지를 높였다. 채색이라는 표현 형식 이외 천경자는 새로운 화풍을 구사했고, 또 뱀과 같은 특이 소재를 차용해 자신의 독자성을 수립했다. 전통회화의 창조적 계승에 주력했다.

무엇보다 천경자는 ‘여류화가’로서 여성의 사회적 공간 확보에 기여도가 컸다. 거기다 그는 전업화가로서 ‘화가’라는 직업의 독자성을 온몸으로 보여 줬다. 그런 화가가 노년의 시기를 잠적해 대중적 관심사로부터 거리를 뒀다. 그야말로 화가의 자의반 타의반 외국 생활은 한국 미술계의 부끄러운 현실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천경자가 돌아왔다. 환상과 동경을 깨고 돌아왔다. 아니, 돌아왔다고 인정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에서 그의 이름은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여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보도에 의하면, 천경자는 지난 8월 별세했고, 공식적 장례식은 치루지 않았단다. 아니, 이럴 수가! 더군다나 화가의 유족들조차 사망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니, 이 또한 무슨 변괴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녀(이혜선)는 단독으로 화가의 유골함을 들고 ‘천경자 상설 전시실’이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을 다녀갔다고 한다. 그것도 절대 비밀이라는 지침 아래. 이런 사실은 두어 달이 지나서야 무슨 ‘후일담’처럼 들려왔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을까.

‘천경자의 불행’은 「미인도」 사건과 연결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 중의 하나인 천경자의 「미인도」 작품을 복제해 대중에 보급했다. 이 복제화가 화근이 돼 미술관과 작가 사이의 진위 논쟁이 벌어졌다. 1991년의 미술계를 뜨겁게 달군 사건이었다. 미술관과 감정위원회는 진품 판정을 내린 반면, 작가는 가짜라고 주장했다. 자식도 못 알아보는 어미가 어디 있냐는 논리였다.

작가는 위작인 이유를 설명하면서, 어깨 위의 나비와 머리 위의 흰꽃을 그린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이미 발표한 다른 작품의 예에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결국 작가는 절필 선언을 했고, 예술원 회원자격까지 반납하고자 했다. 그리고 뉴욕으로 떠났다.

천경자는 지난 2003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어 그의 투병생활은 의사소통조차 어려운 참담한 세월을 맞이해야 했다. 환자는 10여 년 동안 장녀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런 불행 속에서 지난해 ‘대한민국예술원’은 무지막지한 행패(?)를 보였다. 지난 10년간 천경자를 본 외부인사가 없으니, 본인의 살아 있음을 증명하라고 했다.

참으로 희한했다. 화가는 이미 사망했는데, 유족이 사망신고하지 않고 수당(매월 180만 원 지급)을 받는 것처럼 모욕을 줬기 때문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작가 측은 아예 예술원 탈퇴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한번 예술원 회원이 되면 살아생전에 탈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작가의 생존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예술원은 수당 지급을 중단했다.

당시 언론이 ‘천경자 미스터리’라며 예술원을 두둔하자 나는 ‘예술원 미스터리’라고 받아치는 칼럼을 냈다. 나의 글을 본 장녀는 전화통화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또 뉴욕에 오면 어머니를 만나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어머니는 살아있지만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장녀의 발언은 쉽게 수긍하기 어려웠다. 아마 오랜 세월 병간호를 하면서 쌓인 피로감과 더불어 ‘어머니 독점욕’ 같은 것이 고착된 것인지 모른다.

언론은 ‘천경자 사망’을 보도했지만, 사망 관련 의구심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드디어 장녀를 제외한 유족 5명은 기자회견을 통해 기가 막힌 사실을 털어놓았다. 차녀(김정희)는 큰언니(이혜선)가 어머니의 별세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유골의 안치장소도 모른다고 했다. 유족은 “갑작스런 비보와 수수께끼 같은 소식에 슬픔과 함께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해야 할지 며칠 시름에 젖어 있었다”며 장례식은커녕 추모행사조차 없이 망자를 보낼 수 없다고 토로했다.

형제 사이에 재산 분쟁은 없다고 강조했지만, 장녀 이외 유작을 갖고 있는 유족은 없다고 말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확인해 줬다. 그러면서 이들 유족은 정부와 서울시에 요구했다. 이는 금관문화훈장 추서의 철회를 재고해달라는 것과 예우 차원의 추모행사 개최였다. 이들 두 가지 사안은 참으로 민망한 요구이기도 하다. 어찌 유족이 이런 부탁까지 할 정도의 천박한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인가.

‘천경자 사태’에서 우선 문책 대상은 예술원일 것이다. 화가에게 모욕을 안기면서, 결국 수당지급까지 중단한 실책은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지급 정지했던 수당을 한꺼번에 준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일국의 작가에 대한 예우가 수준 미달이었음을 입증시켰으니, 뭔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마땅하다고 본다.

예술원은 무엇 때문에 막대한 세금을 소비하면서 존재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과연 예술을 옹호하고 진흥시키기 위한 기관인가. 문화부 역시 훈장 문제 등으로 깔끔하게 대응했다고 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망자에 대한 모욕주기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훈장 추서 불가라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불가에 대한 내용이 너무 졸렬했고, 또 그런 사실을 굳이 언론에 발표해 망자를 욕보이게 할 필요가 있는가. 사실 그동안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예술가들의 면면을 보면, 천경자 옆에 서 있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과연 훈장 수여에 따른 합리적 선정기준이나 있는지 의심마저 든다.

서울시립미술관도 잘했다고 칭찬 받을 입장은 아니라고 본다. 장녀가 유골함을 들고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사명감을 가지고 설득해 사망 사실을 알리면서 추모행사를 추진했어야 마땅했다. 사망 사실의 비밀 요구에 소극적으로 복지부동한 것은 공공기관으로서 적절한 대응이라고 볼 수 없다. 게다가 서울시립미술관은 ‘천경자 단독 전시실’까지 독점하고 있는 미술관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천경자 관련 모든 일을 관할할 1차 기관이라는 의미이다. 더불어 「미인도」 진위문제를 장기간 방치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도 떳떳한 입장은 아닐 것이다. 공공기관의 공공성 담보가 중요하다.

천경자 사태, 정말 불행한 일이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일그러진 한국 미술계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천박한 우리 미술계의 자화상 같기 때문이다. 새삼 적재적소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특히 공립기관의 사명감과 전문성 문제가 대두되는 사태였다.

정말 적재적소의 문화예술계, 이런 세상이 오기를 기대한다. 하여 예술가가 제대로 대우 받고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세월이 도래하기를 기대한다. 천경자 화가의 별세, 삼가 명복을 빈다.

윤범모 가천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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