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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의 권력
호칭의 권력
  • 이기홍 /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02.11.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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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유학을 왔다가 미국에서 자리 잡은 친구를 방문했다(필자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의 한 대학에 방문연구자로 와 있다). 아버지인 친구는 고등학생인 딸아이를 韓國語로 나무라고 딸아이는 자신의 입장을 英語로 설명하고 있었다. 자식을 꾸중하는 대부분의 한국 아버지들이 그렇듯, 친구는 감정이 격해지면서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다가 딸아이의 답변에서 ‘you…’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는지, 문득 ‘유라고 부르지마, 아버지라고 불러’라고 말꼬리를 잡는 것이었다. 당연히 딸아이는 ‘유라고 부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고 항변하였다. 부모거나 선생이거나 그 누구라도 ‘유’라고 불러가면서 자라온 그 아이로서는 아버지의 지적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했고, 아버지에게는 못내 불만스러웠겠지만, 그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됐다.

하기야 필자도 자식한테 ‘유’로 불린다면, 특히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는, 적잖이 불쾌할 것이었다. ‘유’라는 호칭은 아버지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와 위상의 함축을 사상한 채 부모와 자식을 그저 단순한 객체들로 환원시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정성을 다해 돌보고 뒷바라지하면서 키워 온 자식이, 끈끈한 情을 지운 채 ‘너, 당신’이라고 부른다면 허망하고 야속하기 짝이 없을 듯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딸아이로서는 아버지라는 3인칭의 호칭보다 ‘유’라는 2인칭의 호칭이 부모에 대한 친밀한 감정을 훨씬 많이 담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라는 호칭이 위계와 권력을 내장한 수직적 사회를 구성하는 언어인 반면 ‘유’라는 호칭은 대등한 주체들의 수평적 사회를 구성하는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에는 없는 한어의 복잡하고 미묘한 높임법 자체가 복잡 미묘하게 위계지어진 사회구조의 표현인 듯하다.

그러니까 ‘유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라고 불러라’는 이야기는, 딸아이에게 그 동안 살아온 수평적 사회를 버리고 아버지가 한국에서 가져온 수직적 사회를 수용하라는 명령인 셈이었다. 아버지에게 권력이 부여되는 수직적 사회에서는 그 명령이 강제될 수 있었겠지만, 수평적 사회에서는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것이었다. 결국 그 명령은 아버지의 수직적 사회와 딸아이의 수평적 사회의 차이를 드러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패배’를 가져왔다. 두 사회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에 대한 판정은 논란거리더라도, 어느 하나를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에 대한 판정은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가 아닌 ‘교수님’으로 불려온 필자도 그 동안 학생들에게 수직적 사회를 강요하면서 그 호칭에 내장된 권력을 얼마나 교묘하게 행사해 왔는지 모르겠다.

이기홍 / 편집기획위원·강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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