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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비평을 ‘문체적 시각’으로 읽어낸다면?
김현 비평을 ‘문체적 시각’으로 읽어낸다면?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11.02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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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호 경희대 교수, <민족문학사연구>(통권 58호)에 ‘김현체’ 분석

비평가 김현의 유려한 문장과 문체에 대해서는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최근 <민족문학사연구> 통권 58호에 실린 오태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의 논문 「김현 비평에 나타난 ‘문체적 특성’ 연구」도 그런 논의에 하나의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사유의 문체’를 특징으로 한 김현 비평의 문체적 특성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오태호의 논문 결론 부분을 발췌했다.

 

김현에게 문학은 언어다. 언어미학주의자로서의 김현은 거친 언어에 대한 혐오감을 생래적으로 토로한 바 있다. 그의 사유하는 문체는 거기에서부터 탄생한다. 거칠게 조야된 텍스트는 야생의 사유만을 드러낼 뿐이어서, 김현은 의도적으로 언어와 사유와 행동이 텍스트 내부에서 삼위일체적 진실을 드러내는 저자들에 주목한다. 그것은 초기에는 미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태도로 드러나지만, 후기에 이르면 푸코와 지라르의 이론을 거치면서 현실적 억압의 조건들을 지속적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번역투의 문장으로 시작됐지만, 1960년대 초반의 장황한 듯 난삽해 보이는 현학 취미가 196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우리말글에 대한 자의식과 어우러져 안정되고 새로이 재탄생되면서 김현체는 변화된다. 그리하여 이종적 명명의 제목을 통해 우리말의 이질적 아름다움을 선보였으며, 의미의 지연과 지시어의 잦은 활용을 통해 저자와 텍스트의 욕망과 함께 공명하는 공감 비평의 실제를 보여줬다. 그의 문장 구조는 변증법적 사유 형식을 내장한 ‘부정을 통한 긍정’ 구조가 핵심에 자리한다. 이 구조는 고정관념을 수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복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망을 설정하기 위해 선택한 김현 특유의 인식론적 구조로서 양가적 역설의 사유를 불러오는 대표적 구조이자 형식에 해당한다.

본고는 그가 우유부단하게 의미의 확정을 지연시키는 평론가가 아니라 비평 대상에 대한 외연을 확정하는 정의형 문장을 전면에 배치하는 단정적 기술태도를 갖춘 비평가였음을 주목했다. 다만 단언명제식의 문장은 그 부연 설명을 명확히 기술함으로써 정당한 전제였음을 입증한다. 에피그램이나 인용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테제를 상징화하는 것은 이후 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이 추인하는 방식이 돼 김현체의 한 특징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김현체의 핵심은 개별 작가나 시인을 언급하면서도 대표적인 특징을 요약하고 압축함으로써 미학의 대표성을 명명하고, 다른 작가들과의 ‘비교와 재정의’를 통해 새로운 입체적 좌표를 설정함으로써 ‘성좌적 재배치’에 능한 비평가였음이 드러난다.

김현 문체의 중심에는 ‘나르키소스’와 ‘동굴 속 수인’의 문제의식을 내포한 ‘우리’로부터 출발한 ‘나’가 있다. 그 ‘나’는 자기 고백의 솔직성이라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동굴 속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유’와 ‘개인’의 발견을 주목한 4·19 세대의 자의식으로 무장한 비평가였다. 그리고 그 4·19 세대의 자의식은 ‘해방 이후 최초의 한글세대’라는 자부심을 밑면에 깔면서 문학주의적 입장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아름답고 유려한 고통의 문장들을 통해 빚어낸 세공인이 김현이다. 그의 문장은 짧게는 20여 년, 길게는 5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빛이 바래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의 유용한 고문이자 자극을 위해 김현의 문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효용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김현체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김현의 텍스트를 다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자기완결적인 유기체를 조각내어 해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의 문체는 나와 타자와 세계를 마주하며 ‘부정을 통한 긍정, 정의형 문장과 경구의 활용, 요약과 압축, 비교와 재정의’ 등을 통해 천변만화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가 저자와 텍스트의 욕망과 욕망의 뿌리를 마주하기 위해 고통스런 즐거움을 감내했던 시간들은 여전히 우리 앞에 빼어난 실체로 남겨져 있다. 김현의 ‘나’가 주춤거리듯 다가서며 적확하게 길어올린 텍스트들이 무수히 많은 의미망을 획득하기 위해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이종적 명명, 의미의 지연, 지시어의 활용, 장문의 유려함

“최인훈의 광장과 밀실의 이원적 대립, 유종호의 토착어 이론, 이어령의 상징 문학론, 선우휘의 행동 문학론…… 등이 나의 흥미를 끌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고은의 파멸로서의 문학은 그 주장의 극단화와 과격화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50년대의 정신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주의를 끈다.”

= 설명: ‘고은의 파멸로서의 문학은 주장의 극단화와 과격화 때문에 50년대의 정신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끈다.’라고 문장의 의미만을 축약했다면, 김현 문장의 맛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김현 문장의 핵심에는 ‘그’같은 지시 관형사와, ‘그것’ 같은 지시대명사, ‘나’의 잦은 등장이 자리하면서, 텍스트를 해체적으로 분석하고 종합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자연스런 미문이 탄생한다.

 

‘부정을 통한 긍정’ 구조와 양가적 역설의 사유

“시인으로서의 기형도의 힘은 그가 가난과 이별의 체험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런 체험을 한 것은 그만이 아니다. 다른 많은 시인들도 그와 같은 체험을 했고, 하고 있다), 그 체험에서 의미 있는 하나의 미학을 이끌어냈다는 데 있다. 그 의미 있는 미학에 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 설명: 인용문은 김현체 특유의 문장 구조가 드러난다. 즉 ‘시인 기형도의 힘은 가난과 이별의 직접 체험에 있지 않다(부정) →그가 자신의 체험에서 의미 있는 하나의 미학을 도출한 것에 있다(긍정) → 나는 그것을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한다(새로운 명명, 의미 부여)’로 이어진다. 기형도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입증해 가는 ‘부정 → 긍정 → 재정의 명명화’ 형태의 김현 문장 구조는 ‘역설의 미학’의 비평적 전환이라고 할 만하다.

 

요약과 압축, 비교와 재정의를 활용한 성좌적 재배치

“1980년대는 죽음-죽임의 연대이다. 그 연대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는, 40년대 후반의 아우슈비츠와 유대인 학살을 상기시키는, 아니 그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던, 불행한 연대이다. 처음에는 분노와 비탄과 절망, 그리고 침묵으로 점철됐던 광주는, 그  에는 일종의 원죄 의식으로 변화해, 그것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물론 육체적으로는 살 수 있겠으나, 정신적으로는 살기 힘든, 그런 장소가 된다. 그곳은 더구나 오랫동안 소외돼온 곳이어서 역사적 숙명론의 흔적-흔적? 차라리 실제가 아닐까?-까지 보여준다. 시인들도 그런 원죄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설명: 김현의 문체는 1980년대를 ‘광주와 죽음-죽임의 연대’로 요약하고 재정의한다. 그리고 불행한 연대의식을 ‘아우슈비츠와 유대인 학살’에 비교함으로써 ‘1980년 5월 광주’가 내포한 역사적 의미의 외연을 확대한다. 이어서 광주라는 장소성의 의미가 만연체로 부연 설명된다. 이때 ‘그 연대’에서의 ‘그’라는 지시관형사, ‘아니’라는 부정어, ‘그리고’라는 연결어, ‘그것’이라는 지시대명사, ‘어떤’이라는 관형어, ‘그런’이라는 지시관형어, ‘그곳’이라는 지시대명사, ‘차라리’라는 부사어, 쉼표 등의 잦은 활용은 의미의 지연과 유예, 휴지기로 작용하면서 문장의 호흡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리하여 그의 머뭇거리는 듯 주춤대는 사유 속에서 결국 1980년 광주가 시인들에게 원죄의식을 제공하는 역사적 숙명론의 실체로 각인돼 있다는 문학적 진실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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