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詩_ 허형만
녹을 닦으며
허형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였던 뽀오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공초』(문학세계사, 1988)
□ 시인 허형만은 194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197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영랑시문학상, 전라남도 문화상, 한국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에는 『淸明』, 『풀잎이 하나님에게』, 『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 『진달래 산천』, 『영혼의 눈』, 『불타는 얼음』 등이 있다. 평론집으로 『시와 역사인식』이 있고, 연구서로 『영랑 김윤식 연구』 등을 썼다. 목포대 명예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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