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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三癡
書三癡
  • 남태우 중앙대
  • 승인 2002.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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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남태우 / 중앙대·문헌정보학

세상에서 가장 한적한 일은 배를 타고 유랑하는 것과 술 마시고 장기나 바둑을 두는 것 등인데, 이 일들은 모두가 짝을 찾아야 하고 상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직 독서만은 한 사람만으로 하루도 보낼 수 있고, 1년 아니 평생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독서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애서가가 돼야 한다. 세상에는 ‘책’을 생활의 중심으로 삼아 평생의 희로애락을 책의 숲 속에서 누리는 일군의 비빌리오마니아(bibliomania)가 있다. 하지만 책에 대한 애착이 지나치다 보면 자칫 병이 되기도 쉬울 것이다.
이태준은 그의 冊론에서 “물질 이상의 것이 책이다. 한 표정 고운 소녀와 같이, 한 그윽한 눈매를 보이는 젊은 미망인처럼 매력은 가지가지다”라고 했다. 프랑스 속담에도 여자와 책과 말은 빌리고 빌려줄 것이 못된다라고 했다. 여자와 말은 그렇다 치고 책이 끼어 있는 게 색다르다. 하긴 동양에서도 예부터 ‘三癡’라고 해서 독서인 사이에 책의 貸借行爲를 경계하거나 비웃는 말로 전해지고는 있다.
‘書三癡’라는 말이 있다. 이른바 책을 빌려달라는 사람이 첫 번째 어리석은 ‘書一癡’요, 빌려주는 사람이 ‘書二癡’요, 빌려보고 돌려주는 사람이 ‘書三癡’인 셈이다. 남의 장서를 훼손하고 서가의 균형을 허물어 버리고 낙질을 만드는 무리들, 즉 ‘책을 빌려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찰스 램은 세상에서 남의 돈을 교묘히 이용해 먹고사는 후안무치배 이상의 무서운 약탈자들로 낙인찍고 있다.
법률가이자 한학자이기도 한 山康齋 卞榮晩(1889~1954) 옹은 책에 대한 寄話와 풍류가 많았던 인물이다. 일단 손에 넣은 책엔 보통 ‘山康齋卞榮晩自旻印’ 등의 장서인이 찍히게 마련이었고, 평소 여간해서 남에게 책을 빌려주는 일이 없었다. 그 까닭인즉, ‘애지중지한 책은 사랑하는 여인과 같다. 자기의 애서를 남에게 내줘서 정조를 더럽힐 순 없다’는 신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 속담과 합치된다. 그러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책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양도해 버리고 말았다. 과연 애서가다운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장서인이란 일찍이 동양에서 발생한 인장의 한 분파로서 책의 반포와 보존, 그리고 소장 계층에 따라 발달해왔다. 애서가에게 이 장서인의 의미는 별다른 맛이 풍겨지는 또 하나의 풍류다. 귀한 책을 수집하자마자 장서인을 찍는 맛이란 낯 모르는 여인과의 로망스를 즐기는 짜릿함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陶南 趙潤濟(1904~1967)박사가 70여년전 ‘增補文獻備考’(250권 50책)을 살 때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한국 상고 때부터 대한제국말까지의 문물 제도를 분류, 편찬한 것으로 순종 때인 1908년 신식 연활자를 사용해 간행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그 때 돈으로 50원을 주고 입수했다. 그 때 그의 월급은 65원이었는데 이 엄청난 지출로 해서 그 달의 가계는 형편없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책이 없어서는 내 연구에 지장이 있다고 한다면 그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언제는 돈이 있어서 책을 샀던가? 책을 사고 나머지를 가지고 먹고사는 것이지…’ 이렇게 뒷날 조 박사는 당시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들은 책을 장식용으로 생각하는 무조건적인 비빌리오마니아들은 아니다. 책이 없다면 신도 침묵을 지키고, 정의는 잠자며, 자연과학은 정지되고, 철학도 문학도 말이 없는 세계라는 것을 알고 정신적 양식으로 생각해 박봉을 쪼개 구입한 것이다. 그러니 책을 빌려주는 아픔이 얼마나 진했을까. 책과 독서로 현실을 유유히 사는 방법을 터득하는 지혜로운 조상들의 풍류는 본받을 만하다.
문자는 언어의 부호요 언어는 마음의 형식이니 문자보다 언어가 먼저요 더 완전하고, 언어보다는 마음이 더 먼저요 완전하다. 거문고 줄은 소리를 내는 기구요 소리는 움직이고 부딪치는 가락의 형식이니 가락은 소리로서 이뤄지고 소리는 줄로서 나타난다. 문자 없는 책은 마음이요 줄 없는 거문고도 마음이다. 보이는 것만 볼 줄 알고 형체가 있는 것만 쓸 줄 알아서는 참 맛을 모른다. 멀리 산에 빛이 있음을 보고 가까이 물이 소리 없음을 들으며 현이 없는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줄 알아야 바야흐로 책과 거문고가 없어도 그 뜻 가락을 알리라는 의미다.
독서의 최종 목적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끊임 없는 자기수양과 정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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