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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빈현상’과 영국 청년들의 바람
‘코빈현상’과 영국 청년들의 바람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 승인 2015.10.12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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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지난 겨울 런던을 방문했을 때 지하철을 이용하려다 낭패를 볼 뻔한 일이 있었다. 아침에 시간적 여유를 갖고 기차를 타기 위해 호텔을 나섰지만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는 바람에 가까스로 기차역에 도착한 것이다. 얼마 뒤 지하철 운행은 재개됐지만 역 입구로 진입하기 위해 출근하는 수백 명의 영국인들과 지하철 탑승 전쟁을 벌인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 당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런 사태를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듯한 영국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선진국 국민답다고 생각했지만 이유는 다른 데도 있었다.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는 사태가 매우 잦다는 것이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서 영국의 진보적 영화감독 켄 로치의 영화 「네비게이터」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는 철도가 민영화되면서 숙련된 철도노동자들이 생존 자체가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해가는 현실을 생생하게 고발한다.

마지막 장면이 몹시 씁쓸한데,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가 사라질까 두려워 열차에 치여 죽어가는 동료의 절체절명의 순간을 외면해버리는 것이다. 80년대 대처 집권 이후 이윤 극대화를 위해 노동력의 대대적 감축을 밀어붙였던 민영화의 어두운 그림자를 역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감한 얼굴에서 엿보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지난 9월 영국정치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철도 국유화, 공교육 무료화, 공공 주택 정책, 진보적 세금 정책, 최저임금 인상 등과 같은 정책을 내세우며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 당수로 당선된 것이다. 전 수상 토니 블레어가 선거 과정에 개입하여 코빈이 당선될 경우 2020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 수준이 아니라 대패 혹은 전멸을 당할 것이라고 위협했지만 결국 코빈은 승리했다.

그의 당선은 역설적이게도 풀뿌리민주주의를 외면하고 그동안 노동당을 신자유주의적 토리당의 추종자로 전락시킨 신노동당 시대의 해체를 의미할 것이라는 평도 있다. 물론 코빈의 앞날은 밝지 않다. 하지만 그의 당선은 영국의 대중정치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블레어주의로 불리는 신노동당의 정책은 90년대 중반 노동자 및 풀뿌리 대중들의 소망은 외면한 채 보수당의 지지기반을 공략하는 데만 혈안이었다. 그 결과 반대당 대처의 계승자라는 오명을 쓸 정도로 우클릭했다. 하지만 이는 정책의 우클릭만이 아니라 노동당을 ‘노동자’를 외면하는 엘리트적이고 특권적인 정당으로 바꿔놓았다. 『차브』라는 책으로 유명한 오언 존스는 전망도 이념도 없는 신노동당의 무기력함이 코빈의 등장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코빈 현상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지지자들 중에 청년과 학생들의 참여가 매우 활발하다는 점이다. 보수언론으로부터 정치에 무관심하고 페이스북이나 해대며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들로 조롱당했지만 그들은 기꺼이 3파운드를 내고 노동당의 선거인 명부에 등록한 것이다.

전임 에드 밀리반트 노동당 당수 시절 도입된 제도로 노동당에 3파운드를 내고 등록하면 비노동당 당원도 당대표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이들의 활약은 예상 외로 뜨거웠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2010년 토리당과 자유민주당이 결탁하여 대학 교육의 질적 제고라는 명분으로 등록금을 3배까지 인상할 수 있는 법안을 밀어붙였을 때, 학생들은 의회 진입을 시도할 정도로 격렬히 저항했다. 그 당시 런던대 학생이자 운동을 주도했던 마이클 체섬은 “코빈의 승리는 바로 이 등록금 투쟁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코빈 현상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30년 동안 실시된 신자유주의의 피로감 축적, 일자리가 사라지고 등록금 인상으로 대학조차 다닐 수 없게 된 청년들의 불만 고조, 블레어주의가 저버린 풀뿌리 민주주의의 위기감 등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코빈의 정책 중 다수는 대처 정권이 무력화시킨 전후 타협에 실패한 정책의 재판처럼 보이지만 2015년 현재 그의 정책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온다.

2011년 한국에서도 치열한 반값 등록금 투쟁이 있었다. 그것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다음 선거에서 어떤 정치적 힘을 얻을까?

김용규 편집기획위원/부산대·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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