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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언어의 저항 … “동아시아는 위대한 詩人을 잃었다”
서정적 언어의 저항 … “동아시아는 위대한 詩人을 잃었다”
  • 히로오카 리호 일본 주오대 법학부 교수
  • 승인 2015.10.0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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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학자가 본 故 문병란 전 조선대 교수의 시 세계
▲ 지난해 12월 24일 인터뷰 뒤 나란히 앉은 문병란 시인(왼쪽)과 히로오카 모리호 교수. 사진제공=김정훈 교수

시 「직녀에게」와 「땅의 연가」의 시인이자 교육자로 민주화운동에 한 획을 그었던 문병란 전 조선대 교수가 암 투병 끝에 지난달 25일 오전 6시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은 1935년 전남 화순 출생으로 조선대 국문과를 졸업, 1963년 다형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가로수」, 「밤의 호흡」, 「꽃밭」,  「무등산」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1988년에 조선대 국문과 조교수에 임용됐으며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와 5·18 기념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1970년 대 시집 『죽순 밭에서』, 『벼들의 속삭임』, 『5월의 연가』, 『양키여 양키여』 등 저항과 비판의식을 주제로 한 시를 창작·발표하면서 민족문학의 지평 확장에 기여했다.

고인의 생전인 2014년 12월 24일 히로오카 모리호(廣岡守穗) 일본 주오대(中央大) 법학부 교수가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시인이기도 한 히로오카 모리호 교수는 이 내용을 <주오효론> 292호(2015년 7월호, 주오대출판부)에 「현대 한국의 저항시인 문병란」으로 발표했다. 그 역시 문병란 교수의 갑작스런 부음을 듣고 한국내 공동연구자로 인연을 맺었던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에게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문병란 시인이 수행한 역할은 더없이 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치권력과  현대문명을 동시에 비판하는 시점을 가진 보기 드문 시인이다.  동아시아는  위대한 시인을 잃었다.  광주만의  일이 아니다”라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히로오카 모리호 교수의 글은 김정훈 교수가 번역해 기고했다.
  
 
저항시인 문병란을 만났다

작년 12월 24일인 크리스마스 전날, 광주시 지산동 서은문학연구소에서 문병란을 만났다. 아내 히로오카 다츠미와 함께 방문했다.

문병란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시는 한국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고, 노래로 널리 국민에게 애창되고 있다. 시풍은 서정적이지만 오로지 내향적인 시점에서 서정성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 유명한 시는 남북분단을 견우와 직녀의 관계로 형상화한 「직녀에게」이다. 「직녀에게」는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로 시작되는 시다.

문병란은 1935년 전라남도 화순에서 태어났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문병란은 1945년 해방 때까지 일본이 제작한 교과서로 배웠다. 그때의 경험을 노래한 「식민지의 국어시간」이라는 시가 있다. 물론 국어는 일본어였다.

한국의 시인이라고 하면 매년 노벨상후보 대상으로 오르내리는 고은이 유명하지만, 문병란도 고은과 마찬가지로 민족통일의 염원과 민주화의 결의를 노래하는 저항시인이다. 통일과 민주에 대한 담론은 한국인들의 가슴 한복판에 자리하는 양심의 불빛과 같은 것이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일본인들의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과 상통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한국에 대한 인상과 호전된 민주화
문병란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부의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항거했다. 나는 사건 당시 29세였고 주오대학에서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광주는 봉쇄돼 있었기에 언론을 통해서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나 같은 사람은 알 길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군사독재정권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인상도 좋지 않았지만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건은 그런 한국에 대한 인상을 더욱 악화시켰다. 군은 국민을 지키는 존재다. 그런 군이 자국민을 살육하다니 한국 정치사에 일대 오점이다.                                                                       

그러나 한국은 1987년에 민주화를 쟁취한다. 더욱이 1992년에 김영삼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나의 한국 이미지는 결정적으로 뒤바뀌었다. 한국국민은 자력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자력으로 정권교체를 이루는 정치시스템을 이룩한 것이다.   

민주화가 뿌리내린 후 5·18희생자의 명예는 회복됐다. 그때까지는 국가전복을 획책한 반역자로 취급받았지만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투쟁한 유공자로 인정받게 됐다. 한국국민들은 그 희생자들을 광주시 교외(망월동)의 국립묘지에 지금 정중히 모시고 있다.

30주년에 발표된 문병란의 시
매년 5월 27일에는 희생된 사람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광주시 중심가 금남로에서 ‘금남로부활제’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문병란 시가 낭독된다. 「5월이여 다시 부활하라」도 30주년 기념행사 때 발표된 시다.

이 시를 읽고 나는 의외로 놀랐다. 시에 엿보이는 비애감 사이로 초조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게 시의 앞부분 “무딘 입술로 5월을 찬미하라 하십니까”라는 물음에 표현돼 있다고 직감한 순간 ‘사건 발생 후 30년이 지나 5·18정신이 풍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게 묻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작품에 등장하는 ‘우금치’는 1894년 발생한 동학당 난의 최대 격전지다. 동학당 난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우금치’를 금남로에 접목시켜 문병란은 5·18정신을 잊지 말라고 노래하고 있다.

5·18정신은 무엇일까. 시에는 “5월에서 통일로! 그날의 구호”라는 표현이 있다. 남북통일과 민주화에 대한 염원과 희구가 이제 5·18정신이 아닐까. 민주화는 이뤄졌다. 하지만 최근 30년 동안 남북의 격차와 간극은 현저하게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남의 경제발전과 데모크라시와 비교하면 북의 빈궁과 독재의 참상은 한층 두드러진다. 하지만 체제와 빈부격차는 어찌됐건 동포는 어디까지나 동포다. 통일을 잊는다면 아무리 한국만이 민주화를 이룬다고 해도 그것은 환상의 민주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문병란은 그렇게 묻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 직접 질문했다. “5.18정신이 후퇴하고 있다고 느끼고 계시는 겁니까?”

그러자 문병란은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족 모순이 폭발해 일어난 사건이었죠. 그러므로 나는 ‘민족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미를 담아 ‘부활’이라는 언어를 쓴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민족 모순이란 의미는요?”라고 묻자 “외부세력에 의해 민족이 분단됐다는 뜻이에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문병란은 다음처럼 설명했다.

“외부세력은 민족통일을 방해하고 있어요. 1980년대 미국은 전두환 정권을 방치했어요. 광주민주화운동 때 전두환이 군을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미국이 암묵적으로 승인해줬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으면 군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미국은 직간접적으로 여러 의미에서 민족정신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중국도 일본도 러시아도 힘을 합해 남북통일을 지원해야 해요. 이를 위해서 3국은 미국을 견제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3국 모두 미국을 꺼리거나 혹은 미국을 추종하고 있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문병란의 마지막 한마디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남북분단이 한일화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서정과 저항
문병란에게는 서정성 짙은 시가 적지 않다. 「꽃씨」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시다. 단지 한 알의 작은 씨앗에 가을의 정취가 온통 응축돼 있다. 그 찬란한 무게를 손바닥으로 감지하려는 속삭임. 어쩐지 쓸쓸하다. 하지만 충만하게 마음에 꽉 차오르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어느 가을날 이런 기분을 맛본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기분을 맛본 과거 나날을 그리움으로 회상한다.

중학생 시절 나는 10월에서 12일초에 걸친 시기를 좋아했다. 가을에는 운동회나 문화제 등의 행사가 있었는데 그 준비 과정에서 비일상적인 흥분을 접할 수 있었기에 나는 열중했다. 그런데 그 열중했던 상황이 끝나면 문득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쓸쓸함을 느끼곤 했다. 쓸쓸한데도 혼자가 되고 싶었고, 혼자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혼자 있는 모습을 누군가가 봐주기를 원했다. 그런 상태로 쓸쓸함이 헤아릴 수 없이 겹쳤다.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희망가」에는 마늘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문병란의 시에 자주 나오는 것이 마늘이다. 코를 톡 쏘는 냄새가 자주 시어로 표현되는 것이다. 어째서 마늘인지를 묻자, 쓴맛은 희망의 상징이며 쓴맛은 시련을 극복하는 힘을 안겨준다고 문병란은 강조했다. 나는 시적 형상화의 본질을 짚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병란은 손이나 꽃과 같은 작은 대상에서 민주나 통일과 같은 광활한 대상으로의 확장성을 추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인간은 무엇에서 희망과 용기를 얻는 것일까. 목숨을 걸고 권력에 맞서다가 사회 변방으로 밀려나 궁지에 몰렸을 때 인간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것은 자연이 아닐까. 일본 저항시의 효시는 막부시대 말기 지사의 漢詩일 테지만 지사들은 자연의 품에 안길 때 용기가 세차게 용솟음침을 전신으로 느꼈다.

일본의 저항시라고 하면 전쟁 전의 프롤레타리아 시의 계보를 연상할 것이다.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가 “붉은 그대로의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노래했듯이 프롤레타리아 시는 너무나도 자연을 노래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전후의 반전시도 전혀 자연을 노래하지 않았다. 학대받은 대상, 참화를 입은 자의 분노를 한꺼번에 도색한 시가 적지 않다. 물론 나카노 시게하루가 “붉은 그대로의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노래한 이유를 잘 안다. 사회모순 따위는 뒷전으로 돌리고 별이라는 둥 제비꽃이라는 둥 로맨틱하게 노래한 ‘세이킨파(星菫派)=메이지시대의 낭만파’가 다수였으므로 나카노 시게하루가 자연을 노래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은 세이킨파와 같은 감성은 결코 공유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기분은 가슴이 저리도록 알고 있으며 일찍이 그 말에 감동한 독자가 적지 않음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인간사의 고역밖에 묘사하지 않는 발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을 모사하는 거울을 깨뜨린 채 저항정신을 계속 지탱할 수 있을까. 마지막엔 한순간에 꺾여버릴 위험성이 그곳에 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독재정권에 화염병 대신에 시를 던졌다
도입부에 거명한 서은문학연구소는 문병란의 창작 장소 겸 강의실로 이곳에서 그는 시를 쓰기도 하고 문학을 지도하기도 한다. 문병란은 늘씬한 장신이었다.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용모에는 80년 세월의 관록이 배어 있었다. 복장은 검은색이었고 매우 멋스러웠다.

인터뷰 후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 도중 문병란은 하루 내내 시만을 생각하며 보낸다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 보면 연구소 사무실 커다란 책상 뒤쪽에는 침상이 놓여 있었다. 시를 쓰다가 지치면 침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시상이 떠오르면 일어나서 펜을 드는 일상이리라 상상했다.

문병란은 유소년 시기부터 뛰어난 시적 재능을 발휘했다. 초등학교 때 쓴 시가 음악가에게 노래로 채택된 적도 있다. 해방의 기쁨을 맞본 것도 잠시, 1950년 6·25전쟁의 혼란기를 맞아 문병란은 향리에서 농사일을 도우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1956년에 화순농업학교를 졸업했다.

문학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조선대 문리과대학에 입학, 시인 김현승(당시 조선대 교수)의 제자로 입문한 뒤의 일이다. 뛰어난 소질을 바탕으로 군 시절에도 스승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심한 지도를 받았다. 1959년 군 복학 후 김현승의 추천으로 문단에 입문하게 됐으니, 건실한 사제관계가 이 시대의 빼어난 문인 한명을 배출한 셈이다(일본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훌륭한 결과를 낳는 경우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초기에는 서정시를 발표했지만 이윽고 저항시인으로 알려지게 된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광주민주화운동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투옥당하기도 했다. 6월 항쟁 직후 <뉴욕타임즈>가 독재정권에 ‘화염병 대신에 시를 던진 시인’으로 분류했을 만큼 문필활동과 실천운동으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치열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 후 민주화운동과 교육운동에 전념한 행보에 대해서도 익히 알려져 있다.

초기시집 『문병란 시집』(1971), 『정당성』(1973), 『죽순 밭에서(1977)』에서부터 만년의 육필시집 『법성포 여자』(2012년), 그리고 최후의 시집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2015년)에 이르기까지 35편이 넘는 다작을 집필한 시인이니 투철한 시 정신으로 시대상황을 충실히 반영한 작품을 빠뜨리지 않고 담아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일본의 독자 입장에서 보아도 문병란의 시는 오로지 저항성만을 추구하며 거친 호흡으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다. 지면의 한계로 이곳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에게 애송되는 시는 밑바탕에 서정성이 짙게 깔려 있으면서 그게 현실극복과 저항성을 이미지화해 형상화의 빛을 발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리라.

남북분단이 클로즈업되고 있다. 사실 코리언은 남북뿐만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분단된 민족이다. 중국 길림성의 동부는 연변 조선족의 자치주다. 중국과 조선 국경에 우뚝 솟은 백두산은 단군신화의 옛터이며 산 정상 天池의 경치는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한국에서 방문하는 관광객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도 식민지시대에 끌려온 사람들이 다수 생활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이주해간 코리언이 살고 있다. 문병란 시인은 1997년 『직녀에게』의 재판을 간행했는데, 이처럼 현실에 대한 극복 이미지를 시에 담는 일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다. 문병란 시인의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을 그린 통일시가 꽃을 피우는 그날이 속히 찾아오길 바란다.

 

히로오카 모리호 일본 주오대 법학부 교수
1951년생. 도쿄대 법학부 졸업. 시집에는 『처음으로』, 저서에는 『근대일본의 심상풍경』 외 20여권이 있다. 최근 시민사회와 정치에 대해서는 물론, 문학과 한일 사회현상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점에서 공개적 발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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