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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益 대신 思想을 담는 출판하려면 … “초창기 옥스퍼드대 출판부 모델을 보자”
私益 대신 思想을 담는 출판하려면 … “초창기 옥스퍼드대 출판부 모델을 보자”
  • 김용훈 경북대출판부 기획편집실장·<시선과 시각> 편
  • 승인 2015.10.06 1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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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출판부의 미래를 위한 제언

대학에는 학술서 수요와 교재 수요가 늘 공존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내의 교재 수요를 흡수해 시장에 회수되는 자금의 비중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대학 당국의 의지와 구성원들의 협조만 있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출판시장의 불황은 이제 失速 상태(기체가 양력을 잃어 조종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접어든 듯하다. 디지털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불러온 사회 변화와, 기술 발전을 제때 따라잡지 못하는 법 제도가 불황의 배후로 지목되곤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수요의 측면만을 설명할 뿐, 공급의 관점에 대한 분석은 결여된 것이다.

미국의 저명 출판인 앙드레 쉬프랭(Andr´e Schiffrin)은 자신의 저서 『열정의 편집』에서 바로 이 ‘공급의 문제’를 다룬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공급의 문제는 결국 ‘공급 실패’의 문제다. 전통적으로 출판사들은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는 책, 어떤 대상에 담긴 다양한 가치와 의미를 독자 스스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을 지속적으로 출판해 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책 대신 시장성이 확실한 책들만 과잉 공급되는 ‘공급의 실패’가 일어났고, 이것이 책에 대한 대중의 수요를 감소시켰다는 것이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쉬프랭은 거대 복합기업의 출판시장 잠식을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는다. 거대 미디어 기업들이 건실한 출판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다수의 출판사들을 인수합병한 후 시장경제 논리를 들이댔고, 이 과정에서 문화적·학술적 가치가 있는 (그러나 상업성은 없는) 책들은 자동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출판에 가격 대신 가치가, 私益 대신 思想이 담길 수 있을까. 일단 쉬프랭은 자신이 몸담았던 출판사(팡테온)가 자본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벌어진 바 있다. 전후 일본의 지적 문화를 주도하던 중앙공론사는 도산해 요미우리에 흡수됐고, 이와나미쇼텐도 부도 위기를 겪은 후부터는 예전 같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독일은 또 어떤가. 이익 창출을 최고의 지표로 삼지 않고, 사고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판적 담론을 가능케 한 출판사”라는 찬사를 받던 독일 주어캄프(Suhrkamp) 역시 적자 누적 등의 문제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올해 주식회사로 전환됐다. 주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주식회사 체제하에서 주어캄프 특유의 출판철학이 종말을 고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처럼 주변을 둘러보면 볼수록, 가치 있는 책을 내는 것과 거기에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버는 일 사이의 조화는 점점 더 불가능해 보이고, 대학출판부가 가치출판의 유일한 버팀목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출판부는 학술출판을 그 본령으로 하는 비영리단체이고, 현재 학문적 진전의 대부분은 대학 내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대학출판부야말로 상업성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학문과 정보를 사회에 공급하는 원천이 될 기본 조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이 경우에도 財源이 관건일 것이다.

미국 대학출판부들의 경우 시장에서 회수되는 자금만으로 경영해 나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모체 대학과 다른 공공기관들로부터 예산과 보조금을 지원받아 학술출판에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학술출판에서는 이것이 이상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대학 당국과 공공기관으로부터의 지원이 미국에 비해 약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라면 아무래도 시장에서 회수되는 자금의 비중을 좀 더 높이는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 방안은 당연히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한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학생을 교육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대학에는 학술서에 대한 수요와 교재 수요가 늘 공존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내의 교재 수요를 흡수함으로써 시장에서 회수되는 자금의 비중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대학 당국의 의지와 구성원들의 협조만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학의 구성원인 교수가 집필하고 또 다른 구성원인 학생이 구입하는 책을 대학 구성원인 대학출판부가 아니라, 사익을 추구하는 외부 상업출판사에 맡겨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혹자는 이런 방식이 너무 손쉽게 돈을 벌려는 대학출판부의 꼼수가 아니냐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교재 출간에서 창출된 수익을 학술출판에 보태는 방식은 초창기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시작된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문 앞의 밭을 두고 왜 한나절이나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먼 밭으로 달려가야 하겠는가.

일단 교재출판의 선순환 구조가 확립되고, 여기에 몇 가지 학내외적 가능성이 더해지면 대학출판부는 큰 학문의 숲을 가꿔 갈 수 있다. 이 일의 핵심은 아직 종이 위에 머무르고 있는 귀중한 자료와 사상을 발굴하고 번역해 세상에 내놓는 일과, 양질의 모노그래프(monograph)를 출판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전자는 학문의 진전을 추동하는 중요한 토대이고, 후자는 연구자의 시간과 노력과 열정이 단 하나의 주제에 녹아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탄생하는 학문연구의 결정체다. 특정 주제에 대한 저자의 열정과 오랜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출판부 역시 저자의 의욕을 북돋우는 에디터십을 발휘해야 한다. 대학출판부는 늘 학계의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고, 그곳에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존재여야 한다.

지식의 전달과 수용, 즉 수업 지원의 측면에서도 대학출판부가 해야 할 일이 많다. 디지털 시대에 대학출판부는 단순한 교재 공급자의 수준을 넘어, 교수자와 학습자 모두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이런 일의 핵심은 여전히 ‘콘텐츠 기획력’일 수밖에 없다. 대학출판부가 중심이 돼 나서야 하는 이유다.

대학출판부의 활동영역은 학문과 학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학출판부는 출판을 매개로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는 지역과 사회의 이익을 모색하고, 유대감을 강화할 수 있는 사업도 꾸준히 펼쳐야 한다. 출판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이라면, 대학출판부가 그 지역 출판문화의 중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기능하는 대학출판부를 가진다는 것은 평생 함께할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용훈 경북대출판부 기획편집실장·<시선과 시각>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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