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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고국땅을 밟은 미인들 … 고려시대의 능숙한 화풍 돋보여
마침내 고국땅을 밟은 미인들 … 고려시대의 능숙한 화풍 돋보여
  •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5.09.1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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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14 高麗美人圖
▲ 사진⑥ 투명한 겉옷을 입은 모자상

일본인의 소장품으로 알려져 오던 「高麗美人圖」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세폭(三幅對)의 그림으로 우리나라에서 반출된 宮中遺物이다(사진① ② ③).

1993년 발간된 故 崔淳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韓國美術』에는 (사진③)이 소개돼 있으며, 1998년 대한민국헌정회에서 발간한 『찬란한 문화유산』 225쪽과 226쪽에는 (사진① ②)의 두 유물이 소개돼 있다. 최순우 선생은 (사진③)을 고려불화와 비교해 설명했고 일본에서 (사진① ②)의 유물을 조사한 대한민국헌정회는 이미 사라진 (사진③) 자료를 입수하지 못해 유물 두 점만을 게재한 것으로 보인다.

최순우 선생은 『韓國美術』 157쪽 참고도판 43 「蓮池美人. 日本 李英介」라는 항목에 이 그림(사진③)을 소개했다. 작품명은 「蓮池美人圖」이고 제작연대는 고려시대로, 유명한 일본 센소사에 소장된 고려불화 「楊柳觀音像」과 비교 설명하며 作者를 고려시대의 佛畵師 ‘慧虛’로 추정하고 소장자는 ‘일본소재 이영개’라고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헌정회의 『찬란한 문화유산』에는 (사진①)과 (사진②)를 「朝鮮初中期의 美人子愛圖」로 봤지만 낙관이 없어 작자와 제작연대를 명확히 기술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우리나라로부터 반출해간 궁중유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필자가 최근 국내에서 實見한 유물은 (사진①)의 그림 한 점이다. (사진②)는 국내로 반입돼 모처에 소장돼 있고 (사진③)은 이미 일본에서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고 한다. 다만 일본인 前 소장자의 전언에 의하면 세 폭의 그림이 같은 상자에 함께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인물화는 안향 초상화(국보 제111호), 이제현 초상화(국보 제110호), 염제신 초상화(보물 제1097호)가 있으나 모두 남자의 초상화이고 고려 여인의 그림은 現存하는 그림이 없고 다만 시대불명의 「공민왕과 노국공주 초상화」가 종묘에 전할 뿐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최순우 선생은 일본 센소사 소장의 고려불화 「楊柳觀音像」과 (사진③)을 비교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미인도 제1폭(사진①)은 꽃나무 아래서 蒙古風의 宮裝을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또 다른 아이는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어머니의 치마폭 옆에 서있는 모습으로, 갑자기 날아든 새 한 마리에 시선이 고정돼 있는 절묘한 순간을 묘사한 名畵다.

실제로 14세기 고려불화의 특유한 필법으로 그려진 정황이 「고려미인도」 제1폭의 여러 부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얼굴과 손의 신체부분은 얇은 먹선(墨線)으로 윤곽을 잡고 그 선을 따라서 다시 가느다란 붉은 朱線으로 먹선을 따라 이중선을 만든 뒤, 붉은 안료를 엷게 ‘바림(색깔을 칠할 때 한쪽을 짙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게 나타나도록 하는 일. 그림을 그릴 때 물을 바르고 마르기 앞서 물감을 먹인 붓을 대어, 번지면서 흐릿하고 깊이 있는 색이 살아나도록 하는 일)’해 입체감을 나타나게 했다. 그리고 얼굴과 손의 신체부분은 화폭의 뒷면에 호분을 칠해 흰색의 안료가 앞면으로 배어나오게 하는 背彩法을 사용했는데, 모두 고려불화의 제작기법과 동일하다(사진④).

채색은 白色, 赤色, 綠色, 靑色, 金泥의 黃色이 주된 재료인데 모두 광물성안료인 石彩이며 특히 청색의 코발트안료와 황색의 금니는 당시에도 高價의 안료여서 일반인은 사용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린 바닥천은 組織을 확인하면 經絲와 緯絲의 조직이 고려시대에 생산되는 高麗繪絹임을 확인할 수 있다(사진⑤).

여인의 옷은 金絲로 직조한 옷 위에 소매가 넓고 투명한 청색의 겉옷을 입었고 여인에게 안겨있는 아이도 투명한 붉은 옷을 입어서 속옷이 은근히 드러나 보이게 했는데, 고려시대 佛畵의 특징으로 투명 베일을 쓴 菩薩圖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高麗佛畵師들의 기법이다(사진⑥).

여인의 옷은 대부분이 가장 귀한 청색의 코발트안료와 금니로 채색돼 있고 부채를 든 아이의 몸에도 금니로 장식해 화려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고려왕실에서 의뢰해 畵師가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아울러 그림에 등장하는 화려한 복식의 여인과 동자는 모두 모자지간의 왕족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는 王妃와 王子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최순우 선생은 이러한 점 등에 착안해 작품 속의 인물이 고려 충렬왕(1236~1308)의 왕비인 齊國大長公主(1259~1297)와 그의 아들인 충선왕(1275~1325)(사진⑦)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일본 센소사의 고려불화 「양류관음상」을 그린 ‘慧虛’가 이 작품을 그린 것으로 추정했다.

이 三幅對의 「고려미인도」는 고려왕실의 의뢰를 받아 그려진 高麗畵師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림을 그린 천은 高麗繪絹이며, 墨線과 朱線의 線描와 바림, 畵法인 背彩法과 화려한 彩色의 조화, 金泥의 정교함이 고려불화의 특징과도 일치한다. 用筆과 用墨의 기법과 미적감각, 結體構圖의 기교가 또한 고려불화의 시대풍격과 일치하며 능숙한 붓놀림 사이사이로 高麗畵師의 숨결이 느껴지는 국보급 문화재다. 고려불화는 전 세계에 걸쳐 약 160여점이 전해지고 있지만 고려시대의 인물화로 남아있는 유물은 몇 점밖에 없을 뿐더러 여인의 인물화는 거의 전무하다. 그동안 일본에 반출됐던 3점의 「高麗美人圖」 중에 2점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해에 경사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는 되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특히 상대국의 박물관과 같은 공공기관에서 유물을 소장하게 되면 문화재는 잘 보존되지만 고국으로의 귀향은 더욱 어려워진다. 다행히도 필자가 實見한 遺物(사진①)은 안전하게 되돌아와 국내에서 잘 보존되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전공자들의 올바른 연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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