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17:55 (수)
비판이론으로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발가벗기다
비판이론으로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발가벗기다
  • 김만권 연세대 국제대학원·정치이론
  • 승인 2015.09.08 11: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깊이읽기_ 『배제, 무시, 물화: 한국사회를 보는 세 가지 시선』 김원식 지음 | 사월의책 | 304쪽 | 17,000원

저자가 제시하는 본연의 의미에 충실한 민주주의가 (정치학을 전공한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여전히 ‘원칙적’ 수준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은 못내 아쉽다.
예를 들어, 차이를 인정하는 민주적 연대에 대한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대안을 찾는 이가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그것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인가가 아닐까.

 

근대 및 그 이후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대부분의 사회 및 정치철학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 문제는 ‘세계의 병폐에 대한 진단만 있고 대안은 없다’는 점일 것이다. 예를 들어 근대세계의 근본적 병폐가 무엇인가를 다룬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그렇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진단한 문제를 해결할 그 어떤 대안도 제공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렌트에게 근대 세계의 문제는 ‘노동’의 지배와 ‘행위’의 상실로 인해 뒤집혀진 양자 간의 관계를 바로 잡을 길이 없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최근에 발간된 사회철학자 김원식의 『배제, 무시, 물화: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은 그 자체로 매우 도전적이다. 저자가 “한국사회의 주된 부정의와 병리현상에 대한 비판적 진단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과제를 직면”하겠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당당히 이런 과제에 맞설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의 지적 토대가 ‘비판이론’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 비판이론가들이 근대세계를 ‘도구적 이성의 총체화’로 파악하며 맞았던 바로 그 이론적 난관을 목격한 하버마스 이후의 ‘비판이론’은 문제를 해결할 길 없어 보이는 근대 세계에서 이성적인 탈출구를 꾸준히 모색해왔다. 우리가 이런 비판이론을 도구로 삼을 때 생겨나는 난점은 이런 진단과 시도가 근본적으로 서구의 것이라는 데 있다. 분명 한국 사회는 서구와 다른 특수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 서구적인 지적 전통이 드러낼 수 있는 한국 사회에 내재한 보편적 부정의와 병리현상은 무엇이며, 이것만으로 “해명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특수한 맥락”에서 생겨나는 문제는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는 이 도전적인 과제에 어떻게 맞서고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대안을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불의의 해결책으로 ‘정치적 정의’도입

저자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균형을 잡는 방식으로, 한국사회가 특수성이란 변명으로 피해갈 수 없는 보편적 규범의 잣대를 제시한다. ‘동등한 자유의 실현’이 그것이다. 이 “동등한 자유 이념은 현대사회의 모든 불의와 병리현상을 규정하는 기초”다. 이를 부정하는 사회제도 및 구조는 불의이기에 현대사회의 다차원적 부정의를 진단하고 비판하기 위한 기초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런 규범 아래 저자는 현대사회 비판전략으로서 사회적 병리현상을 폭로하는 현시적 비판과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토대인 규범적 비판의 공조를 내세운다.

규범잣대를 제시하고 방법론의 기반을 다진 저자는, 비판이론의 중심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시대진단을 종합적으로 점검하며 현대 사회에서 ‘동등한 자유의 실현을 억압하는 사회적 불의와 병리현상’으로 경제적 배제, 문화적 무시, 삶의 물화라는 세 범주를 제시한다. 물화는 하버마스의 생활세계 식민화 테제를, 문화적 무시는 호네트의 인정투쟁을, 경제적 배제는 마르크스의 통찰을 반영한 것으로 현대사회의 부정의와 병리현상을 비판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틀이다. 저자는 분배와 인정이 다른 것이지만 서로를 요구한다는 입장에서 경제적 배제와 문화적 무시를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정의론을 내세우는 동시에 이런 불의들이 오로지 정치 영역에서만 해결 가능함을 주장하며 정치적 정의의 도입을 내세운다. 한편 정의의 문제와 구분되는 사회병리현상으로서 삶의 물화의 다면성에 주목하며 “타인에 대한 물화가 상호인정을 파괴한다”는 점, “자기물화가 스스로를 도구화하고 억압한다”는 점, “물화된 개인이 물화된 사회를 낳고 물화된 사회가 물화된 개인을 낳는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제 저자의 과제는 이런 서구적 이론으로 한국 사회를 진단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 이론이 진단하고 있는 근대사회의 핵심적 부정의와 병폐들이 우리의 고유한 근대화 과정 속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인가?

저자는 차분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우리 사회가 당면한 구조적 부정의와 병리현상으로, 경제적 배제와 문화적 무시가 결합되면서 나타나는 ‘양극화’와 물화의 기반이 되는 ‘시장화’를 제시한다. 부정의로서 양극화 현상은 빈곤뿐만 아니라 부와 사회적 지위가 세습되는 등 계층과 계급 간에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공고한 경계선을 긋고 있다. 이 현상 뒤에는 경제적 원인뿐만 아니라 학력 및 학벌, 여성 및 소수자에 대한 편견 등 “한국사회 특유의 문화적 인정-무시 질서”가 존재한다. 한편 병리현상으로서 시장화는 “성원들의 욕망 자체를 속물화하고 획일화하며, 이로 인해 개인들의 내면이 황폐화”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사회적 저항을 낳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찾는 대안

이런 한국사회의 부정의와 병리현상을 시정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민주주의의 역량 강화’다. 그러나 저자가 의미하는 민주주의란 진부해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민주주의 본래 이념에 충실한 민주주의’다. “시민의 참여를 확대해 자치를 실현하고 경제생활과 문화생활 영역에서도 민주주의 질서를 적극적으로 확장하자”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민주주의가 대안으로 기능하려면 배제, 무시, 물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배제, 무시, 물화』의 저자는 비판이론가답게, 정확한 인식 없이 올바른 문제해결은 불가능하다는 전제와 더불어 사회경제적 문제를 정치의 통제 아래 두어 해결하려는 비판이론의 기본적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전제와 원칙 아래, 차이 나는 존재들의 민주적 연대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자유주의적 요소를 결합시켜 한국사회에 내재해 있는 배제, 무시, 물화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 책의 감출 수 없는 미덕은 비판이론의 틀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이를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데 유효적절하게 쓰고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진단은 이론적으로 정확하고 현실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다.

반면 저자가 제시하는 본연의 의미에 충실한 민주주의가 (정치학을 전공한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여전히 ‘원칙적’ 수준에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은 못내 아쉽다. 예를 들어, 차이를 인정하는 민주적 연대에 대한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대안을 찾는 이가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그것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인가가 아닐까. 이런 아쉬움은 돋보이는 진단으로 인해 대안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동등한 자유의 실현이라는 규범이 실현될 수 있는 곳은 연대가 가능한 열린 민주주의뿐이라는 저자의 대안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김만권 연세대 국제대학원·정치이론

필자는 뉴욕 뉴스쿨 정치학과에서 정치이론 및 법철학을 전공했다. 「정치적 적들의 화해를 위한 헌법 짓기」로 박사를 하고, 『자유주의에 관한 짧은 에세이들: 현대자유주의 정치철학 입문』 등을 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