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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치는 그리움 태우다 사라진 그대!
사무치는 그리움 태우다 사라진 그대!
  •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 승인 2015.09.07 15: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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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137. 능소화
▲ 능소화

며칠 전에 妻家(경북, 청송)를 다녀왔는데, 가는 곳마다 능소화가 주렁주렁 늘어뜨린 가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이 꽃은 겨울추위에 약해서 중부 이남에만 피는 여름 꽃이다. 한 마디로 머잖아 늦더위(老炎)와 함께 떠날 대표적인 여름꽃인 능소화가 지금 남녘 곳곳에는 발에 채일 정도로 한창 피었다.

한여름에 까마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傳說 하나를 옮겨와 조금 脚色하여 전한다.

옛날 어느 궁궐에 복사꽃빛 고운 뺨에 자태도 아리따운 앳된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다. 임금의 남다른 사랑을 받은 소화는 嬪의 자리에 올라 궁궐 외딴 한 구석에 처소가 마련됐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빈의 거처에 통 오지 않았다. 착한 빈은 이제나 저제나 임금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다른 妃嬪(왕비와 후궁)들의 시샘과 음모 때문에 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억울하게 밀려나게 된다.

참한 그녀는 그런 것도 모른 채 임금이 찾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혹 임금의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가를 서성이기도 하고, 담너머로 하염없는 눈길을 보내며 사무치게 애태우는 사이에 모진세월은 부질없이 흘러만 갔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뼈저린 기다림과 외로움에 지친, 당차지 못한 소화는 相思病(lovesick)에 걸려 ‘담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는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 끝내 쓸쓸히 죽어갔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한여름 날, 모든 꽃과 풀들이 더위에 시들어 축 늘어져 있을 때, 빈의 처소를 둘러친 담을 덮으며 주홍빛 입을 넓게 벌린 꽃이 넝쿨 따라 곱게 피어났다. 이 꽃이 바로 능소화라 전해진다. 그렇다. 능소화는 아리따운 소화를 능가하는(능가할 凌), 오히려 소화보다 더 예쁜 꽃이란 뜻이로다!

이어서 이해인 시인의 ‘능소화 연가’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은/당신이 보고 싶어/내 마음이 흔들립니다./옆에 있는 나무들에게/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나도 모르게/가지를 뻗은 그리움이/자꾸자꾸 올라갑니다./저를 다스릴 힘도/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찬미의 말보다/침묵 속에도/불타는/당신의 눈길 하나가/나에겐 기도입니다/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은 임을 기다린다는 능소화(Chinese trumpet vine), 그래서 능소화의 꽃말(花詞)은 기다림, 그리움이라 한다.

능소화(Campsis grandiflora)는 능소화과의 갈잎(낙엽) 덩굴성(creeper)목본식물로 꽃은 8~9월에 피고, 꽃잎지름이 6~8cm로 황적색이다. 학명의 속명 Campsis는 능소화, 종소명 grandiflora는 꽃이 크다는 뜻이다. 벽에 붙어서 올라가는 덩굴줄기(蔓莖)로 길이가 어림잡아 10m에 달한다.

꽃 한 송이도 허투루 피는 것이 없다 했지. 중국이 원산지인 능소화는 습기가 차고 기름진 토양에, 태양이 가득 비치는 곳에 잘 살고, 붙잡고 기대 올라갈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담벼락이나 큰 나무 밑에 심었다. 담쟁이덩굴처럼 줄기의 마디에 생기며(공기뿌리의 일종임) 다른 물체에 잘 달라붙는 원반 꼴인 흡착뿌리(吸着根)를 건물의 벽이나 다른 물체에 잔뜩 내려, 타고 오르며 자란다.

옛날에는 능소화를 ‘양반꽃’이라 불러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었다 하고, 평민의 집에 심으면 잡아다 곤장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능소화는 양반가, 접시꽃은 상민의 상징이 됐다.

그리고 또 옛날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下賜하던 종이꽃 御賜花가 능소화였다 한다. 잎은 마주나고 홀수깃꼴겹잎이다. 홀수깃꼴겹잎(奇數羽狀複葉)이란 콩과식물인 아까시나무 잎처럼 잎줄기 좌우에 몇 쌍의 小葉이 짝을 이뤄 달리고, 그 끝에 한 개의 소엽으로 끝나는 것을 말한다. 작은 잎(소엽,leaflets)은 7∼9개로 달걀 모양이고, 길이가 3∼6cm이며, 끝이 점차 뾰족하고 가장자리에는 톱니와 털이 있다. 나팔처럼 벌어진 주황색의 꽃이 이맘때(늦여름)즘에서 부터 초가을에 걸쳐 핀다.

꽃은 가지 끄트머리에 5∼15개씩 열리는데 다른 꽃들처럼 우러러보지 않고 연방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달린다. 꽃받침길이는 얼추 3cm로 다섯 갈래로 갈라지며, 갈라진 조각은 바소꼴(披針形,lanceolate)이고 끝이 뾰족하다. 꽃 전체를 이르는 花冠(꽃부리)은 깔때기와 비슷한 종(나팔) 모양으로 위쪽이 5갈래로 갈라진다. 수술은 4개이고 그중 2개가 길며, 암술은 1개다.

무르익으면 果皮가 말라 쪼개지면서 씨를 퍼뜨리는, 여러 개의 씨방으로 된 열매로, 네모지며 두쪽으로 갈라진다. 추위에 약해 중부 이남에서만 관상용으로 심고, 엇비슷한 種으로 능소화보다 꽃이 좀 작고 색은 더 붉은 미국능소화(C.radicans)가 있다.

능소화 花粉(pollen)이 눈에 들어가면 失明할 수도 있다는 흉흉한 뜬소문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여태 능소화의 화분으로 인해 덧나거나 실명피해를 본 사례가 한 차례도 없을 뿐더러 연구결과 능소화의 꽃·잎·줄기·뿌리에는 세포독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한다.

일반적으로 꽃가루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것은 풍매화가 대부분인데, 더더욱이 능소화 꽃가루는 꿀벌·호랑나비 등의 곤충에 의해 受粉(꽃가루받이)이 되는 충매화다. 생사람 잡는다더니만, 잘못했으면 애먼 능소화가 독성식물로 취급당할 뻔 했다.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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