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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의 히말라야, 가슴 뒤흔드는 ‘향신료길’의 슬픈 절경
혹한의 히말라야, 가슴 뒤흔드는 ‘향신료길’의 슬픈 절경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09.0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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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46.까왈리(Qawwali)와 함께 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 여행
▲ 훈자지역 알리아바다에서 만난 소녀. 추운 겨울날 수직 전통모자를 쓰고 숄을 두르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맨발이었다.

여기 내가 있나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맘 알리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만하고 허세에 찬 사람의 불손함에 놀랄 뿐이다. 어제만 해도 그는 한 방울의 정액에 불과했고, 내일이면 그는 시신이 될 것인즉.”

 

이맘 알리가 누구인가. 본명 알리 이븐 아비 탈립. 59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카바 출생.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 무함마드의 보호자인 삼촌 아부 탈립의 아들.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남편. 이슬람의 초기 지도자이자 4대 칼리파. 수니파는 그를 이슬람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정통 칼리파로 여기고, 시아파는 그를 무함마드 이후 첫 번째 이맘이자 첫 번째 정통 칼리파인 라시둔(Rashidun)으로 간주. 661년 암살당했다. 후세인, 핫산, 압바스 등의 자녀가 있다.

 “몰라 알리, 몰라 알리,……” 뜻도 모르면서 나는 누스랏 파테 알리 칸(Nusrat Fateh Ali Khan)이 부르는 까왈리(Qawwali)를 따라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파키스탄으로 겨울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미리 그 동네 음악을 듣던 중의 일이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유튜브로 손동작, 얼굴 표정, 심취한 눈빛까지 관찰하며 그가 신과 예언자에게 바치는 노래를 감상할 수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CD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몰라 알리’가 아니라 ‘알리 몰라(Ali Master, 알리님 혹은 알리시여!)’라야 되는데, 멜로디와 반복되는 노랫말을 멋모르고 따라하다 보니 앞뒤를 몰랐다.

까왈리가 어떤 음악이고 누스랏이 얼마나 대단한 藝人인지, 청중들은 어느 정도로 그의 음악에 열광하는지 호기심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다. 무더운 여름 무사히 보낸 기념으로 누스랏의 연주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유튜브 주소를 세 개 소개한다. 장담컨대 이색적인 체험이 될 것이다. 까왈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슬프고, 아름다운지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과연 최고의 악기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목소리의 향연을 즐기게 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9Ui2deAKr8

https://www.youtube.com/watch?v=Hgln8m6DFzA

https://www.youtube.com/watch?v=gXwFEeEG664

오늘은 내 생일. 점심으로 이름하여 ‘쟁반 짜장’이라는 걸 먹었다. 짜장은 짠 맛으로 먹는 것이다. 싱거우면 맛이 없다. 문제는 짜장의 느끼함이다. 빨간 고춧가루를 뿌렸다. 느끼함이 잡힌 짜장면이 입안에 착 붙으며 감칠맛이 난다. 나는 옥수수를 구워 먹을 때도 고춧가루와 후추와 소금을 뿌리고 발라 먹는다. 고개를 갸우뚱 거릴 사람도 있겠지만 막상 먹어본 사람들은 양손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린다. 향신료가 없다면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번 글에서 간다라(Gandhara, 乾陀羅)라는 지명은 香料(perfume)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gandha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乾陀, 健達 등 무수한 음차 표기가 존재한다. 간다(乾陀, gandha) 내지 간다라(乾陀羅, Gandhara)를 香國이라 한 것은 그 말뜻을 따른 것이다. 간다라를 고팔라(Gopāla)라고도 불렀다. 범어 Gopāla의 글자적 의미는 ‘소의 수호자(cow protector)’로, 인도인들이 좋아하는 크리슈나 신(Lord Krishna)을 소몰이 목동에 빗댄 유아 용어다. 인도 신화에서 이 목동신은 신비로운 피리 소리로 소몰이 소녀들(Gopinis)을 유혹한다.

『新唐書』「西域傳」에 “개원·천보 연간에 (토화라에서) 자주 말, 노새, 진기한 약재, 乾陀婆羅 200品, 紅·碧璃 등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건타파라가 무엇일까.

『大正新脩大藏經』 第54冊 梵語 제7권을 보면 ‘摩尼乾陀(譯曰珠香)’라 하여  摩尼(mani)는 그 뜻이 구슬(珠), 乾陀(gandha)는 ‘香’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唐 慧琳 撰(807년)의 『一切經音義』는 ‘婆羅是香花’라 하여 婆羅(pala; bala)가 곧 香花라고 풀이한다. Gopālla의 -pālla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한편 『대정신수대장경』은 摩竭婆羅를 설명하며 婆羅가 힘(力)의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婆羅가 힘(力)을 뜻하는 梵語 pala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무튼 『華嚴經音義』등의 불교 문헌에서는 간다라를 香遍國, 香行國, 香淨國, 香風國, 香林國, 香地國, 香潔國, 妙香國이라고 표기함으로서 이곳이 香과 관계가 깊은 지역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간다라는 향료의 생산지가 아니었다. 간다라는 레바논과 시리아와 같은 동부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 즉 레반트(the Levant)에서 생산되는 향료가 인도와 중국 등지로 전해지는 향료 무역의 중개지였다.

『신당서』 「서역전」과 같은 내용을 『太平宇記』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四庫全書/史部/地理類/總志之屬/太平宇記/卷一百八十六 吐火羅國條의 내용을 일부 옮겨본다.

“吐火羅國은 일명 土壑宜(토학의)라고도 하는데 後魏때의 吐呼羅國이다.…… 葱嶺 西쪽 수백리 烏滸河 즉 媯水 南方에 위치해 있다.…… 당나라 초기에는 서돌궐에 예속돼 있었다. …… 開元 7년(719년) 그 나라 葉䕶 陁支邦帝賖가 황제에게 표문을 올리고, 이듬해인 8년(720년) 名馬와 노새(䮫)를 바쳤으며, 十二年(724년)에는 異藥 乾陁婆羅 等 200여 品을 바쳤다. 17년(729년) 그 나라 首領 骨吐祿頓達度를 葉䕶로 책봉했다. 葉䕶가 사신을 보내 須那伽帝釋麥을 바치고, 26년(738년)에도 사신을 보내 紅玻瓈碧玻璃, 生馬腦, 金精 및 質汗 등의 藥을 바쳤다. 天寳 8년 그 나라 葉䕶 失理忙伽羅가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국경에 인접한 오랑캐 羯師(羯師라고도 함)가 있는데 깊은 산중에 거주하며 험하고 먼 것에 의지한 채 황제의 聖化를 위배하고 吐蕃에 귀부해 국내에 吐蕃城을 쌓고는 勃律要路를 장악할 뿐 아니라 토번을 본떠 신의 경내에 들어오니 신은 매번 두렵고 걱정되어 이 흉당을 쳐 없애러 安西兵馬가 와줄 것을 청하는 바입니다.”

▲ 훈자지역 칼리마바다 마을의 돌집 풍경.

이 기록을 통해 당과 토화라 간의 공물교역을 확인하는 외에, 놀랍게도 토화라 역시 한 때 월지의 강역이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葉?라는 官號와 수령 이름 骨吐祿頓達度를 보고 토화라의 지배계층이 돌궐과 동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간다라를 떠나 발률국(勃律國)이라는 곳으로 간다. 간다라와 토화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발률국이 있었다. 『資治通鑑』 卷二百十六에 의하면, “大勃律은 布露라고도 하는데 吐蕃(티베트)의 서쪽에 있으며, 그 북쪽에 小勃律이 있다.”

여기가 어디인가. 1996년 12월말 시작한 파키스탄 여행은 이듬해 1월 3일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길기트(Gilgit) 공항에 도착해 방문자 신고서를 작성하자니 그 해 최초의 외국인으로 등록됐다.

『舊唐書』 「西戎列傳」 第148 계빈條는 발률국의 위치를 이렇게 전한다.

“또한 발률국(勃律國)이 있는데, 계빈(罽賔)과 토번(吐蕃) 사이에 있었다. [玄宗] 開元 연간(713~741년) 자주 사자를 보내와 조공을 바쳤다. [개원] 8년(720), 그 나라의 왕 소린타일지(蘇麟陀逸之)를 책립하여 발률국왕으로 삼으니, 조공이 끊어지지 않았다. [개원] 22년(734) 토번에게 격파 당했다.”

『新唐書』 「西域傳」은 발률국의 위치를 보다 소상히 전한다.

“대발률은 布露라고도 부른다. 토번의 서쪽에 해당되며 소발률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北天竺·烏萇과 이웃하고 있다.”

옛날의 소발률 왕국이라고 하는 길기트(Gilgit)는 현재는 파키스탄 길기트-발티스탄(Gilgit-Baltistan) 주의 주도로 파키스탄이 통치하는 카시미르 북서부 지방에서 스카르두(Skardu)와 더불어 산악 등반을 위한 주요 거점 지역이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해발 7천 미터가 넘는 고산준봉이 60여개에 달하는 카라코람 산맥이나 히말라야 등정 혹은 트레킹을 위해 이곳을 먼저 방문한다. 그리고 고산에 대한 적응과 산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며 며칠간 머문다.

육로로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Islamabad)와 길기트를 연결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Karakoram Highway)를 이용할 경우 꼬박 하루 24시간이 걸린다. 경우에 따라 더 걸릴 수도 있다. 나는 길기트에서 예고 없이 비행기 운항이 취소되는 바람에 기사 딸린 지프를 빌려 탔다. 한낮에 출발해 밤새 달려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도착한 건 해뜨기 직전 새벽. 두 번 다시 겪을 일은 아니다. 옛 실크로드를 따라 건설된 좁은 고속도로 길을 따라 펼쳐지는 풍광이 대단한 절경임에도 불구하고 장시간 자동차를 타고 몸이 시달리다 보면 K2고 낭가파르밧이고 라카포시고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1시간이 채 안 걸리는 비행기를 타고 길기트를 찾는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히말라야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가슴이 시려 사나이 눈가에도 이슬이 맺힌다. 감동의 하늘 사파리에 취해 가슴이 먹먹해지면 일순간이지만 조국을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윽고 도착한 길기트의 평균 해발고도는 1천500미터. 시선을 들어 사방을 바라다보면 주위가 온통 카라코람 산맥을 이루는 고봉들이다. 그리고 땅에는 라다크와 발티스탄을 지나온 인더스강과 길기트강이 흐르고 있다.

지금껏 학자들은 길기트가 과거의 소발률국 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별 이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좀 이상한 부분이 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이 지금도 사용하는 옛 지명은 Sargin이다. 그래서 여전히 /g/가 빠진 Gilit나 Sargin-Gilit라고 부른다.

Sargin은 또 뭘까. 모든 이름에는 의미가 있는데…… 모를 때는 인터넷 검색이 최고다. Sargin은 페르시아어로 ‘sun prince’라는 의미를 지니며, Sargon의 변이형이라고 한다. 이 말이 맞다면 왜 도시의 이름이 ‘태양의 왕자’가 됐을까. 햇살이 충만한 곳이라서?

곧 찾아가 만나게 될 훈자(Hunza)는 ‘활과 화살(Hun(bow) Za(arrow))’이라는 뜻의 부루샤스키어(Burushaski) Huntsu niza에서 왔다. 훈자 계곡이 꼭 활과 화살 모양을 하고 있어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짐작된다.
 
Hunza왕국은 Kanjut라고도 하는데 그 말뜻은 모르겠다. 다만 훈자(중부 훈자)의 공용, 공식어가 부루샤스키어이며, 윗동네 훈자에서는 와키어(Wakhi), 아랫동네 훈자에서는 시나어(Shina)를 쓴다는 정도만 안다. 와키어를 사용하는 와키인은 킥(Khik)이라고도 불리고 윗동네 훈자에서는 구잘리(Guhjali)라고 불린다. 이름을 보고 짐작할 수 있듯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와 타지키스탄 남동부에 위치한 바닥샨 주 와칸 계곡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부루샤스키어는 길기트 구 북쪽의 훈자-나가르(Hunza-Nagar) 구 8만 7천여 부루쇼人(Burusho or Brusho people)만 사용하는 언어다. 부루쇼인은 치트랄에도 산다. Hunzakuts(혹은 Hunzakuz) 즉 훈자인들은 인종적으로 훈자 계곡 토착민인 부루쇼인들이다. 이들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가 이끄는 동방정벌군으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돌아가지 못한 그리스인 병사들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인지 훈자 주민들은 영락없이 코가 매부리코인 色目人이었다.

수염을 길러서인지 훈자에서 만난 나이 지긋해 보이는 현지인이 그런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길기트에서 지프차를 빌려 타고 세 시간을 달려 훈자에 도착해 돌집 여관에 유일한 손님이 돼 짐을 풀고 난 뒤의 일이다.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고산병을 다스릴 목적으로 컵라면을 끓였다. 따끈한 국물 한 모금에 마법처럼 몸이 풀렸다. 철사줄이 머리를 칭칭 감고 있는듯하던 두통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행복했다. 그 대목에서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외지인의 등장에 호기심 많은 현지 남정네가 出班奏차 밤마실을 나선 것이다. 어차피 내일이면 잊을 것이지만, 진지하게 통성명을 하고 서로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나는 훈자의 역사와 언어에 대해 물었고, 그는 나의 국적과 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이렇게 낯선 남자들 간의 대화 속에 훈자의 밤이 깊어갔다. 뼛속까지 추운 겨울밤이었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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