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6:55 (금)
불모지 시절 뛰어들어 지금까지 ‘미세조류’ 2천419종 발견
불모지 시절 뛰어들어 지금까지 ‘미세조류’ 2천419종 발견
  • 이재 기자
  • 승인 2015.09.01 1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플랑크톤 연구에 30년 쏟은 허성범 부경대 명예교수

한 중년 남성이 하얀 가운을 입고 현미경을 주시하고 있다. 그는 부산 해운대 앞바다에서 떠온 바닷물을 한참 들여다본다. 육안으로 보면 평범한 바닷물에 불과하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무수히 많은 플랑크톤이 숨어 있다. 남성은 작은 '미크로피펫(액체의 일정량을 가하거나 꺼내는 실험기구)'을 바닷물에 찔러 넣고는 솜씨 좋게 플랑크톤을 분리했다.

분리된 플랑크톤은 항생제로 세균을 제거한 뒤 '배지(미생물을 배양하는데 쓰는 영양물)'로 옮겨 배양한다. 1~4개월마다 새로운 배지로 옮겨 배양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손쉽게 플랑크톤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한 개의 플랑크톤을 순수 배양하는 데 평균 6개월이나 걸릴 정도로 어렵고 긴 과정이다. 

허성범 부경대 교수(양식생물학, 사진)는 이 작업을 약 30년간 계속했다. 1982년 그가 처음 연구에 나선 당시 국내 플랑크톤 보유종은 단 1종도 없었지만, 30여년이 흐른 지금은 세계 5대 미세조류 종 보유국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허 교수가 찾아낸 미세조류만 2천 419종에 달한다. 지난 2월 정년퇴임한 뒤에도 연구소 이전 작업을 위해 분주한 허 교수를 26일 전화로 만났다. 

△플랑크톤 연구에 나서던 1982년에는 선행연구도 없었고 플랑크톤 자체도 생소했다. 어떻게 이 연구에 뛰어들게 됐나.
“사실 박사학위는 자원학으로 받았다. 연구소에서도 한 3년 근무했다. 그런데 부산수산대(부경대)에 교수로 들어왔더니 느닷없이 ‘플랑크톤 연구를 해보라’고 원로교수들이 권하는 게 아니겠나. 막내이고 젊으니까 앞으로 양식업에 꼭 필요한 미세조류 연구에 나서야 한다고 하더라. 당시 우리나라는 플랑크톤 연구 불모지로 원로교수들도 플랑크톤이 필요할 때는 일본학자들에게 읍소해 들여오는 상황이었다. 그게 좀 못 마땅했다.”

플랑크톤은 새끼어류나 전복‧조개 등의 먹이다. 바다 생물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아래에 놓여있다. 플랑크톤이 없으면 해양 생태계 자체가 무너진다. 플랑크톤을 활용하면 새끼를 잡아다 기르지 않고 직접 부화시키는 인공양식을 할 수 있는데, 80년대 국내에는 아직 플랑크톤 활용기술이 없어 인공양식이 어려웠다.

플랑크톤을 채집해 분리하는 작업은 이론적으로는 어렵지 않다. 잠자리를 잡듯이 플랑크톤이 통과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망으로 채집을 한다. 망이 촘촘하지만 플랑크톤은 크기가 2미크론(100만분의 1미터) 정도라 모두 채집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쓰는 방식이 아예 바닷물을 길어올리는 것이다. 채수기라고 부르는 기구를 통해 깊은 바다의 바닷물을 통째로 떠오는 것이다.

△물을 떠서 현미경으로 보고 추출하는 작업이라니. 설명 자체는 단순하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 채집환경에 따라 플랑크톤이 변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어떤 환경에선 어떤 방법을 택하라는 정해진 길이 없다. 채집하는 순간과 분리하는 상황의 미세한 환경변화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걸 하는 사람의 노하우라고 해야 할지, 감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것이 필요하다.”

△전국의 연안을 돌며 채집에 나섰다고 알고 있다. 처음엔 어딜 갔나. 
“대학이 부산에 있지 않느냐. 처음 간 곳은 부산 해운대의 동백섬이다. 동백섬과 낙동강 하구 등에서 채집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1995년 정부가 연구소재특성화사업을 도입하면서 내가 선정됐는데, 이때부터 처음으로 정부연구비라는 것을 받아서 전국으로 나섰다. 독도도 가고 제주도도 가고 그랬다. 그리고 국립대로서 정부가 지원한 실습선이 2척 있는데 이 도움도 많이 받았다. 한 척은 국내의 바다를 일주하고 다른 한 척은 동남아시아로 항해하는데 국내 바다를 일주하는 배에 탑승해 채집하고 그랬다. 내가 타지 못해도 실습선에서 직접 채집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당시엔 멀미도 많이 하고 그랬다.”

허 교수가 소장을 맡기도 한 부경대 수산과학연구소는 현재 부산시 기장군에 위치해 있지만 2008년까지는 부산 해운대구 동백섬에 있었다. 지난 2008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렸던 누리마루가 원래 연구소 터다. APEC회의로 인해 연구소가 기장군으로 이전하면서 덩달아 보금자리(?)를 옮겨야 했던 2천500여종의 플랑크톤은 올해도 또 한번 대규모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허 교수가 정년퇴임하면서 그간의 연구성과를 모두 한국해양과학연구원에 이전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한 학자의 연구성과를 온전히 이어받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닌가.
“맞다. 정년퇴임하면서 이 플랑크톤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았다. 사실 30년간 플랑크톤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데는 국가의 도움도 컸다. 1995년 처음 국책연구소로 선정된 뒤 30년간 계속 같은 지원을 받았다. 정권이 바뀌고 담당자가 바뀌었지만 정부가 일관된 의지를 갖고 이 연구에 투자했다. 플랑크톤이 해양자원이기 때문에 해양수산부가 보유한 출연연구원인 한국해양과학연구원에서 이를 더 잘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허 교수는 필생의 연구를 국가에 귀속시킨 채 대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대신 후학양성과 플랑크톤 연구를 정리하기 위한 대규모 저술작업을 벌일 계획이다. 이미 『플랑크톤의 배양과 응용』이라는 먹이생물학을 다룬 이론서를 지난 7월 냈다. 지난 2006년에는 『유용 미세조류의 배양과 응용』이라는 양식학 전공서도 낸 바 있다. 앞으로는 30여년간의 연구성과와 과정을 집대성하고 회고하는 저술에도 나선다. 

그런데 그의 이 같은 저술활동의 한켠에는 독특한 이력도 남아있다. 바로 시집 출판이다. 그는 지난해 『물고기마음』이라는 시집을 자비를 들여 출판했다.

△저술에 매우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시집도 한 차례 냈는데.
“그것은 내가 쓴 책이 아니다. 책에는 350여편의 시를 수록했는데 모두 내 제자들의 시다. 연구를 하면서 또 강의를 하면서 미세조류, 플랑크톤, 물고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구를 하게 되더라. 학생들도 그러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를 쓰는 과제를 내줬는데 그 시들이 좋아 간직하던 것을 정년퇴임을 앞두고 엮었다. 자비를 들여서 출판해 학생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긋하다. 학생들에게는 어떤 교수님이었나.
“엄했나보더라. 시를 보니까 ‘가까이 가기엔 너무 먼 당신’ ‘그대 앞에 서면 난 너무 작아집니다’ 같은 내용들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잘 가르쳐야겠다는 마음에 학생들 하나하나를 돌보지 못하고 내 생각을 전달하는 데 급급했던 것 같다. 현미경을 잘 다루지 못하는 학생을 보면 화도 내고 혼내기도 해서 어떤 여학생은 울기도 했다.

이재 기자 jael@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