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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 지명은 제국주의 유산 … 공동 倂記가 대안”
“‘일본해’ 지명은 제국주의 유산 … 공동 倂記가 대안”
  • 교수신문
  • 승인 2015.08.3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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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한반도, 서양고지도로 만나다』 정인철 지음|푸른길|331쪽|28,000원
▲ 프랑스인 드릴이 만든’인도와 중국 지도’(1705년)의 한반도와 일본 부분 확대. 자세히 보면 ‘동해’라는 표기가 보이지만, 정인철 교수는 단일 표기보다 병기가 국제적으로 설득력있다고 주장한다.

지명은 감정적인 문제에서 접근한 결과다. 따라서 우리나라 역시 서구인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그 방법은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흔적이 일본해 지명이라는 것을 홍보하는 것이다.

 

서양고지도는 유럽인들의 한반도 인식에 대한 귀중한 사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서양고지도 연구는 지도 속에 수록된 한반도의 형태나 코리아 지명, 아니면 동해 표기나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서구에서는 철학자, 문학자, 정치학자, 예술사학자들이 지도를 활용해 풍성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면 왜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서양고지도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까? 이것은 서양고지도에 표현된 한반도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서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구인들의 조선의 인식에 대한 학계의 논문을 읽는 가운데 많은 오류를 발견했다. 이러한 오류의 원인은 지도제작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부족 때문이지만, 지도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지 않고 평론이 불가능하듯이 지도를 보지 않고 자신의 주장에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나 외국에서 발행된 기존의 고지도 연구서에서는 제한적으로 한반도 지도를 수록하고 있으며, 설명 또한 제한돼 교양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가 수집한 지도와 문헌자료를 정리해서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고자 이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고려가 지도에 표기되기 시작한 1375년부터 1895년의 만주지도까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약 500년 동안의 서양고지도를 연구대상으로 한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는 한반도는 지상낙원인 에덴동산의 주변지역 또는 성서에서 말하는 말세의 민족인 곡과 마곡이 거주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곡과 마곡의 땅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중세의 우주관에 의한 것으로 자신들의 소우주를 벗어난 가장 먼 곳이 만리장성 이북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만리장성을 곡과 마곡을 가두기 위해 알렉산더 대왕이 건축한 성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또 중세의 여행가들은 고려를 ‘카우리’ 또는 ‘솔랑기’라고 불렀다. 필자는 이들 명칭이 표기돼 있는 지도들을 새롭게 발굴했다. 또 16세기의 대항해시대에는 조선이 섬이나 반도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학계에서는 최초로 조선이 반도로 표시된 시기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필자는 실제 자료를 찾아 이를 명확하게 정의했다. 그리고 한반도를 반도가 아닌 섬으로 그린 이유 역시 제시했다.

17세기 전반기에는 포르투갈인들이 한반도를 가장 정확하게 그렸다. 중국과 일본에서 수집한 지리자료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해를 한국해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제작자인 에레디아는 조선을 프롤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수록된 로마와 교역한 동남아 도시인 ‘카티가라’라고 보았다. 그는 조선을 코리아의 카티가라라는 의미의 ‘카타코리아’로 불렀다.
 
17세기 후반 프랑스의 상송은 제주도를 괴물인간이 사는 섬인 ‘사티로룸’으로 표기했다. 제주도가 ‘사티로룸’이 된 이유를 당시의 서구인들이 괴물이 사는 섬을 배치하던 지리적 원리에 의해 설명했다. 이외에도 18세기의 서구인들이 그린 지도에 한국해 명칭이 등장한 배경, 그리고 한국해 명칭이 일본해 지명으로 바뀐 배경을 문헌 고증을 통해 살펴봤다.

그리고 18세기에 제작된 프랑스와 영국의 지도에는 간도 지방이 조선의 영토로 표기돼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당시 조선의 강역이 간도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1885년과 1887년의 조선과 청나라 간의 국경회담의 조선 측 대표인 이중하가 우리 국토를 지키기 위해 근거 자료로 사용한 지도는 ‘황조일통여지전도’이다. 필자는 이 지도를 발굴해 조청국경이 표시된 지도의 해석에 활용했다.

19세기까지 동아시아에 관한 지도제작을 주도했던 국가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다. 따라서 이들 국가의 도서관과 고지도상을 5년 동안 매년 방문해 자료를 수집했다. 어려운 점이라면 지도자료실에서는 하루에 10장의 열람만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람한 지도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자료를 신청한 보람이 있지만, 대개는 제목과 내용이 다른 경우가 많다. 또 다른 문제는 저녁에 시간을 보낼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어둡고 책상도 없는 민박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 기간이 길면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향후 외국의 도서관을 방문하실 분들에게는 민박이나 호텔보다는 숙박공유 서비스를 통해 주거를 해결하기를 추천한다.

한일 두 나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동해 표기와 관련, 필자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했다. 동해 표기와 관련한 기존의 고지도 활용은 고지도상에 일본해와 한국해가 표기된 비중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러한 논쟁의 틀에서는 우리가 일본을 이길 수 없다. 20세기에 제작된 지도의 수는 이전 세기에 제작된 모든 지도 수를 합친 것보다 많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동해 지명 표기에 적용할 수 있는 사례로는 북해와 영국해협을 들 수 있다. 북해는 이전에는 독일해와 북해로 병기됐는데 1897년 독일의 제국함대 창설에 영국인들이 감정적으로 반발한 결과 북해로 통일됐다. 그리고 현재의 영국해협을 포함하는 영국주변의 바다는 로마시대부터 브리턴해로 표기됐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프랑스 주변의 바다를 프랑스해라고 주장한 이후 영국과 프랑스간의 지명을 둘러 싼 감정적인 갈등은 300년간이나 지속됐다. 결국 2002년에서야 영국해협은 프랑스어 지명인 라망쉬와의 병기가 확정됐다.

이상의 사례를 보면 지명은 감정적인 문제에서 접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역시 서구인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그 방법은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흔적이 일본해 지명이라는 것을 홍보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일본과의 교역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라페루즈를 아시아에 파견하면서 일본해라는 명칭을 사용한 다음, 대부분의 지도제작자들이 동해를 일본해로 바꿔 표기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해 지명이 국제수로기구에서 채택됐다. 따라서 일본해 지명은 제국주의의 유산이다.
 
서양고지도를 보여주면서 이전에는 한국해로 불리었는데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일본해가 됐으며, 일본해 지명은 우리의 식민지 경험을 계속 자극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저해한다고 주장하면, 세계의 많은 국가 특히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들의 심정적 동조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동해 단독 지명 표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며 일본인들을 존중해 일본해와 병기되기를 원한다고 주장하면 반대하는 국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또 독일이 독일해 명칭을 포기하고 영국이 영국해협 단일 명칭을 포기하듯 일본해 지명 단일 명칭을 버리고 양국의 실리를 도모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일본에도 설득할 필요가 있다.

 

 

 

정인철 부산대·지리교육과

필자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지도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지도의 역사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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