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7 06:30 (수)
성적평가 바뀌자 인기강의 분반이 사라졌다…‘학점의 노예’는 누가 만들었나
성적평가 바뀌자 인기강의 분반이 사라졌다…‘학점의 노예’는 누가 만들었나
  • 허보빈 이화여대·화학과 4학년
  • 승인 2015.08.24 16: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생들이 원하는 ‘대학개혁’은?

『독학자』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 교양 수업에서였다. 작가 배수아는 80년대 전체주의에 대한 맹종을 거부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한 인물에 대한 소설을 썼고, 그를 독학자라 불렀다. 80년대 대학 풍토에 대한 독학자의 성토는 오늘의 대학에 대한 비판과 놀랍도록 맞닿은 부분이 많았다. 

기대와 달리 아무 것도 배울 게 없는 대학 강의에 피로를 느끼는 주인공의 한탄이 특히 그랬다. 좋게 보면 외곬, 냉정하게 보면 사회부적응자 소리를 듣기 십상인 캐릭터임에도 나는 그에 공감했고 위안을 얻었다. 이는 4년간 대학을 다니며 가장 많은 배움을 얻은 강의라 자신하는 ‘명작명문 읽기와 쓰기’ 덕분이었다.

▲ 허보빈 이화여대·화학과 4학년

‘명작명문’에서는 인문·이공·예체능 등 각기 다른 전공의 학생들 30명 남짓이 모여 12권의 책을 읽은 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글을 돌려 읽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는 데 방점을 둔 토론시간은 언제나 흥미진진했고, 수업시간 90분은 늘 부족했다. 이 수업의 모든 과정은 세상을 좀 더 폭넓게 바라보고, 깊게 이해하는 데 피와 살이 되는 ‘진짜 공부’였다. 

언제부턴가 이 교양강의가 곧 없어질 것이란 소문이 심심찮게 들리기 시작했다. 2012년까지만 해도 ‘명작명문’은 매 학기 개설된 분반이 10개로 운영되는 인기강의였다. 매주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기에 품이 많이 들지만 그만큼 남는 게 많은 수업이라 선배들이 추천하곤 했다. 

그러나 2013년부터 성적평가와 수업방식이 바뀌면서 선호도는 급감했다. 개설된 강의 분반은 서너 개로 줄어든 대신, 한 반에 배정된 인원은 늘었으며, 성적평가 방식은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뀌었다. 졸업 요건에 해당하는 핵심교양에서 일반교양으로 조정된 데 더해 바뀐 성적 평가방식의 영향은 컸다. 학생들에게 이 강의는 ‘힘들어도 참 배움을 얻는 수업’에서 ‘힘든데 학점 받기는 더 힘든 수업’이 돼버린 것이다. 

취업난에 조금이라도 학점을 올려보고자 소수점까지 목매는 학생들의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다. 화살은 배움의 장을 제공할 책임을 유기한 대학에 돌아가야 한다. 순수학문을 위협하는 타 대학의 구조조정 소식과 모교의 인문학을 홀대하는 수업과 학과개편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취업률, 교육비 환원율 등의 수치 비율이 좋고, 논문 발표 수가 많으면 훌륭한 대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수치를 높이기 위한 대학의 노력이 학생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실제 이어지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취업을 준비하는 한 친구는 지난 학기에 수료 신청을 ‘휴학 신청’으로 바꿨다. 2014년부터 졸업유예제도가 폐지돼 학교 열람실을 이용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려면 선택은 ‘휴학’ 내지는 ‘수료’뿐이었다. 그런데 학교와 산학연계가 된 인턴을 하려면 학점을 등록해야 했다. 하지만 수료생은 학점을 등록할 수 없어 부랴부랴 휴학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친구는 학점은 모두 이수했음에도 취업에 필수라는 인턴 경험을 위해 인턴비보다 비싼 등록금을 학교에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런 비효율적 시스템을 두고 대학이 학생들의 취업을 제대로 지원한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대학과 구직 시장 간 일자리 미스매치를 해결하고, 청년 구직난을 타개하기 위한 대학의 노력은 분명 필요하다. 다만 단순히 취업률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 학생들이 직접적으로 겪는 취업준비 과정에서의 불편사항을 간과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 취업자 배출만이 대학의 존재 이유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학생들이 다양한 학문을 경험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한다.

11학번인 내가 경험한 대학은 상아탑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마저 포기하고, 효율을 위한 취업 사관학교로 변모하려는 과도기였던 것 같다. 『독학자』의 저자 배수아는 나와 같은 학교, 같은 학과를 졸업한 선배다. 몇 십년 후에 혹시 나의 후배가 ‘명작명문’ 강의를 들을 수 있다면, 그래서 혹시 이 책을 접할 수 있다면, 그 때는 부디 나와는 다른 감상을 얻기를 바라본다.

허보빈 이화여대·화학과 4학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