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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투각기법 동원했지만 차분하고 정갈한 맛 뛰어나
화려한 투각기법 동원했지만 차분하고 정갈한 맛 뛰어나
  •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5.08.19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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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13)백자투각 청화동화 연꽃무늬 벼루(白磁透刻靑畵銅畵蓮花文雙面硯)
▲ 사진⑨ 백자투각청화동화연꽃무늬벼루

文房四友에 속하는 벼루(硯)는 記錄을 남기는 도구로서 붓을 이용한 서사작업과 함께 발전했으며 한 민족의 문화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遺物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가장 이른 시기의 벼루는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前漢時代의 돌벼루이고 삼국시대부터는 다양한 材質의 벼루들이 출토되는데 돌벼루, 토기벼루, 도자기벼루 등이다.

삼국시대 벼루의 모양은 대부분 圓形이나 원형에 다리가 달린 형태로 평양 정릉사터에서 출토된 고구려 도기벼루(사진①), 연천 호로고루산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벼루, 몽촌토성 벼루파편과 사비산성에서 출토된 백제 녹유벼루 파편(사진②), 부여부근에서 출토된 백제 청자벼루(사진③) 등이 있고 신라시대에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土器나 陶磁器로 만들어진 벼루가 남아있다. 남북국시대 후반부터 고려시대에는 대체로 風字硯(사진④)이 유행하며 조선시대는 日月硯, 四角硯을 비롯해 모양과 형식이 다양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벼루의 材質은 돌벼루로 고려시대는 靑石을 사용했고 조선시대는 충남 보령의 남포석, 장산곶의 해주연, 평북 압록강변의 위원석이 유명하다. 특히 渭原石은 시루떡의 단면처럼 두 가지 층으로 된 紫色과 白色인 돌의 특성을 이용해 화려하게 조각을 한 日月硯으로 유명했고 渭原端溪石으로도 불렸다.

벼루는 먹(墨)이 잘 갈리고 갈아진 먹 고유의 색이 잘 드러나야 한다. 먹을 가는 硯堂의 표면은 미세한 鋒芒이 있어서 봉망의 강도가 알맞아야 좋은 벼루라 할 수 있다. 봉망의 강도가 너무 강하면 먹빛이 좋지 않고 너무 약하면 먹이 잘 갈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삼국시대 토기벼루는 實使用에 적합했을까? 고구려 정릉사터, 신라 안압지, 백제 미륵사지 등의 建物址에서 토기벼루가 출토됨으로 실제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토기벼루의 강도가 硬質인 것이 대부분으로 돌처럼 단단하다. 다만 먹의 강도를 돌벼루에 사용하는 먹보다 연하게 해 잘 갈리도록 했을 것이다.

도자기벼루(陶磁硯)는 현존하는 유물이 매우 희소하고 실제 사용한 것과 장식용 혹은 부장용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용한 도자기벼루는 먹을 가는 연당부분의 유약을 깨끗하게 닦아내서 胎土의 거칠한 부분에 먹이 갈리도록 했고(사진⑥·사진⑦), 부장품으로 보이는 도자기벼루는 연당부분의 유약이 그대로 남아 먹을 가는 기능이 없고 다만 형태만 벼루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사진④).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작된 도자기벼루는 (사진③)의 삼국시대 백제의 벼루이며 부여인근에서 출토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전시돼 있다. 먹을 가는 연당부분의 유약이 깨끗하게 정리돼 실제로 먹을 갈고 사용하게 만든 벼루다. 남북국시대는 신라와 발해에서 綠釉벼루를 생산했으며 고려시대부터는 여러 형태의 수준 높은 청자벼루를 제작했다. 고려시대 청자벼루로는 (사진⑥)의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출토된 보물 제1782호 청자퇴화문두꺼벼루(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사진④)의 보물 제1382호 청자상감모란문‘신축’명벼루(소장자 홍라희), 뛰어난 조각의 청자기린벼루(사진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사진⑥)과 (사진④)는 국가지정문화재다.

필자가 부안청자박물관에 기증한 靑磁陽刻龍文硯(사진⑦)는 삼국시대부터 유행하던 圓形벼루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대칭으로 두 마리의 용을 화려하게 조각했다. 동물이나 사람, 사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청자(像形靑磁)로는 靑磁硯滴이 대부분이며 상형청자벼루는 희귀한 사례이다.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상형청자 연적과 벼루는 조선시대 후기에 다양한 형태의 白磁로 제작돼 절정을 이루게 된다(사진⑧) .

(사진⑨)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王室官窯인 경기도 광주의 분원리에서 제작된 백자벼루로 명칭은 ‘白磁透刻靑畵銅畵蓮花文雙面硯’이다. 명칭을 그대로 풀이하면, ‘청화안료와 동화안료를 사용해 색칠하고 연꽃무늬를 투각한 두면의 백자벼루’로 해석된다. 크기는 가로 22cm, 세로 16.4cm, 높이 6.8cm, 판의 두께 1cm다. 도자기벼루로서는 대형벼루에 속하며 조선시대 士大夫家에서 사용한 귀한 유물이다.

이 벼루의 제작기법은 다섯 장의 점토판을 만들고 투각연꽃무늬를 조각한 후에 상자모양으로 이어 붙였는데, 먹을 가는 硯堂과 먹이 모이는 硯池부분의 상판은 한 쌍으로 구획을 나눠 만들고 벼루의 머리 부분에는 특이하게 커다란 연지를 하나 더 만들었다(사진⑩). 이러한 사례는 1994년에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에서 개최한 「李朝의 文房具」전에 출품됐던 白磁辰砂唐草文雙面長方硯(사진⑪)에서도 확인된다. 벼루의 다리역할을 하는 네 개의 측면은 연꽃무늬와 연밥무늬, 연잎무늬를 정교하게 透刻하고 銅畵顔料와 靑畵顔料를 칠했다(사진①·사진⑬·사진⑭). 특히 벼루 측면에 대칭이 되게 연꽃에 칠한 동화안료의 發色은 전형적인 19세기 분원관요의 발색으로 검붉은 색을 띠고 있다(사진⑮). 청화안료를 칠한 머리 부분의 연밥무늬와 아래 부분의 연잎무늬는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활달한 느낌을 주고 세련된 조각솜씨를 보인다. 硯堂의 중심 일부는 유약을 닦아내어 먹이 갈리도록 했으며 태토의 철분을 잘 걸러내고 맑고 투명한 백자유약을 시유해 모래받침으로 燒成했다(사진?·사진?). 도자기벼루는 현존 수량이 많지 않고 雙面硯의 경우는 더욱 희소하다. (사진⑪)의 雙面陶磁硯은 일본에 있는 것이고 (사진?)의 쌍면도자연 역시 일본 민예관의 소장품이다. (사진⑨)의 白磁透刻靑畵銅畵雙面硯은 청화안료와 동화안료를 함께 사용하고 透刻技法의 화려한 수단을 동원해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맛이 차분하고 정갈하다.

 

古代부터 時代에 따라 여러 材質을 사용해 벼루를 제작한 우리민족은 後世를 생각해 記錄을 남기고 詩·書·畵를 즐기는 높은 수준의 문화민족이었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도자기벼루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적으로 발달한 도자기 제작기술의 선행점을 높여준다. 특히,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진⑤)의 상형청자벼루는 세계적인 陶磁文化를 꽃피운 뛰어난 기술력의 증거다. 조선시대로 이어진 陶磁製作技術은 유교사회의 선비정신과 어우러져 조선후기까지 다양한 文房具를 白磁로 생산했다.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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