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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밤하늘 아래 낙타가 춤을 추는 ‘사람들의 도시’
사막의 밤하늘 아래 낙타가 춤을 추는 ‘사람들의 도시’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08.1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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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45.간다라의 중심 페샤와르, 여기에 소월지국의 都城이 있었다
▲ 페샤와르 버스 정류장 풍경. 나그네길에 오른 여행자의 시선과 필름 카메라에 담긴정류장 풍경은, 삶의 길이 다양하면서도 그 냄새만큼은 서로 닮아있음을 보여준다.

“봄날이 사막의 풀을 적시고, 우리 까필라들이 카이버 고갯길을 굽이 돌아갈 때,
낙타들은 여위었지만 여자들은 살쪄 있네.
지갑은 가벼우나 짐들은 묵직해라,
눈에 막힌 북풍이 남으로 내려와 페샤와르 시장터로 불어들 때”

 ―루디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의 「카이버 고개(Khyber Pass)」중에서

 

오래 전에 나는 이렇게 썼다.

1996년 말 나는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을 향해 떠났다. 무슬림들의 삶과 문화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해에 면한 상공업 도시 카라치(Karachi)에서부터 시작한 보름여의 여행 기간 중 송구영신의 시점을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서 맞았다. 그리고 다음 해 첫날. 古都 탁실라(Taxila)를 경유해 페샤와르(Peshawar)에 도착했다. 현지인들은 파키스탄을 빠끼스딴, 카라치를 까라치, 페샤와르를 뻬샤와르라고 발음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땅’을 의미하는 ‘-stan’. 우리도 옛날에는 ‘땅’을 ‘ ’으로 표기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유사성의 발견으로 새로운 궁금증과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다.

북서변방주(NWFP: North-West Frontier Province)의 주도인 페샤와르는 불교 미술과 고대 실크로드의 십자로 역할을 하면서 교역과 문화, 예술의 중심지이자 군사상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현재도 인도의 델리, 파키스탄의 라호르, 라왈핀디, 탁실라를 거쳐 이웃 나라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연결하는 GT 로드(Grand Trunk Road) 상에 놓여 있는 중요한 교통 요지다.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을 따라 장장 1천100km에 걸쳐 펼쳐져 있는 북서변방주에는 카불강과 스왓강이 흘러들어 페샤와르 분지를 비옥하게 만든다. 한편 페샤와르는 아프가니스탄의 국경 역할을 하는 굽이굽이 험준한 카이버 패스(Khyber Pass, 원어로는 ‘Darra Kheybar’라 하며, ‘darra’는 페르시아에에서 차용한 말로 ‘門 , 들어오다’는 뜻)에서 불과 17km 거리에 위치한다.

역사상 이곳을 밟은 사람은 알렉산더와 그의 동방정벌군, 칭기즈칸이 이끄는 용맹한 몽골군, 현장법사 등이 있다. 신라의 혜초 스님도 어쩌면 이곳을 거쳤을지 모를 일이다. 기왕에 페샤와르까지 간 김에 나도 시절 인연에 따라 사연 많은 카이버 고개에 올라 잠시 역사를 반추하고, 인간과 국가의 현실적 명운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잠겨 있는 비운의 나라 아프가니스탄을 굽어보니 형언키 어려운 감회가 솟구쳤다.

해발 1천80m의 카이버 고개에 오르려면 우선적으로 NWFB(North-West Frontier Bureau) 발행의 허가증이 있어야 하는데, 여간해서는 얻기 힘든 출입 허가증을 운 좋게 얻었다. 하지만 난관이 있었다. 무장 경찰 10여 명의 호송을 받으며 위험천만한 파탄족 거주지 트라이벌 에어리어(Tribal Area)를 통과해야 했다. 그곳은 파키스탄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파탄족 자치권이 인정되기 때문에 생사여탈권이 전적으로 파탄족의 손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하야따바드를 지나자 검문소가 있었다. 여기가 양국의 국경. 파탄족 거주지는 이 일대에 있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곳을 지났다. 휴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너무나 황량해 을씨년스런 느낌마저 주는 카이버 고갯마루에 올랐다. 황토 바람 휘날리는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련한 실크로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환영이었을까? 비단과 보석, 향료를 한 짐 가득히 싣고 고개를 비실비실 넘는 행상들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페샤와르로 돌아와 보니 사정은 달랐다. 우선 인종 전시장이나 박람회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잘 생겼으며 친절했다. 나는 남자들의 기품 있게 기른 수염과 모자에 주목했다. 이곳의 남자들은 콧수염이나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기본 덕목이요, 남자다움을 배가시켜 주는 것이라 믿는 듯했다.

또한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대부분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사람의 생김과 성품이 제각각이듯 모자의 빛깔과 모양도 무척이나 다양했다. 훈자, 길기트, 라호르, 카멜라 등 파키스탄 어디를 가 봐도 남자들의 머리에는 모자가 얹혀 있었다. 장수 마을 훈자의 노인, 파키스탄 사람들의 주식인 ‘난(naan)’을 구워 파는 중년 남자, 시장에서 차이를 끓이는 한 무리의 남자들, 거리의 유랑 악사 ‘까왈(qawal)’, 유쾌한 보석상인, 차 배달하는 소년, 모두들 친근감 넘치는 미소 위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무슬림 남자들은 남성의 상징이자 권위의 징표로 수염을 기르고 있다. 대신 위생상의 이유로 청결을 유지하고자 겨드랑이의 털과 거웃은 제거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어떤 남자들은 가슴에 난 털은 그대로 둔다. 그 이유는 만만해 보이는 외국인 여성 여행자를 만나면 가슴을 열어젖히며 자신의 남성다움을 자랑하기 위함인데 치졸하기 그지없다. 모쪼록 조심하길.

참고 사항. 파키스탄 남자들 중에는 앉아서 소변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뒤처리는 근처에 있는 조약돌로 한다. 한낮의 태양열로 달구어진 것이라면 더욱 좋다. 이렇게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들이 아내가 외간 남자와 통정을 하면, 심지어는 친정에 가고 싶다고만 해도 얼굴에 염산을 뿌린다거나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지르기까지 하니 남자의 질투와 속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물론 이렇게 극악한 남자들은 극소수라 믿고 싶다.(연호택,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중에서)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Kushan_coinage

생각해보니 이십년 전의 일이다. 그 때는 젊었다. 불과 40대 초반이었으니 거칠 게 없었다. 나 홀로 배낭여행은 더 없이 즐겁고 스릴 넘치는 자유여행이었다. 그 후 두 번인가 더 파키스탄에 다녀왔다. 중앙아시아 국가 명칭의 어미가 ‘땅’을 뜻하는 ‘-stan’으로 끝나는데, Pakistan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예를 들어 Tajikistan은 ‘타지크족의 땅’인데 비해, Pakistan은 이 나라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총독이었던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 1876~1948년)가 파키스탄을 구성하는 5개 지역 즉 Punjab, Afghan, Kashmir, Sindh, Baluchistan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두문자어(acronym)다.

이 나라도 우리나라처럼 8월 15일 독립을 했다.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여기는 영국으로부터. 이슬람국가라서 금요일이 공휴일이다. 술과 담배는 금지돼 있다. 그렇다고 돈 있고 세력 가진 사람들이 그런 금지사항을 준수할 것이라 믿는다면 그건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다. 내 친구 아미르(Amir)네 집 냉장고엔 맥주가 가득(?)했다.

파키스탄에서의 감동 하나. 길을 묻는 내게 극도의 친절을 보여준 현지인에게 감사를 표하니, 그의 답 왈 “우리 무슬림들은 이방인에게 친절하라고 배웠답니다.”

파키스탄에서의 안 좋은 추억 하나. 고인이 된 매제와 파키스탄에 갔던 때가 8월 15일 며칠 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라호르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숙소인 호텔을 찾아가고 있는 길. 마침 8월 14일. 이 나라는 독립기념일이 연속 이틀. 평소 술 못 마시고, 담배 못 피우고, 야동 없고(?), 따라서 세속적 재미라고는 없는 이 나라 젊은이들이 독립을 축하한다며 거리로 몰려나왔다. 트럭에 올라타고, 소를 몰고, 또는 걸어서. 거리는 사람과 차로 넘쳐 내가 탄 자동차가 움직이기조차 어려웠다. 사람 걸음보다 더뎠다.

그런 상황에다 자동차는 에어컨이 없는 찜통 차. 창문을 열고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그 때 느닷없이 젊은 친구 하나가 우리 차 보닛 위로 뛰어올랐다. 열린 창문 밖에서는 잘 생긴 젊은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환영의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반갑다고 마주보고 손을 흔들었다. 누군가가 차창에 가까이 다가왔고, 사건은 찰나에 생겼다. 눈 깜짝할 사이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내 목에 찬 폴로 타이와 손목의 시계를 나꿔 챘다. 다행히 시계는 내 무릎 위로 떨어졌다. 폴로 타이를 손에 넣은 ‘배드 가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미국인 청각장애인이 선물한 것이었는데…….

이런 찜찜한 감정은 촐리스탄 사막에서 만난 그 지역 왕자 형제의 융숭한 대접으로 이내 사라졌다. 사막의 밤하늘 아래에서 유목민 로히왈이 보여준 전통음악 연주는 신명나고 흥겹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다. 낙타가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을 거기서 처음 알았다. ‘사따봐따’라는 이색 혼인제도에 따른 전통결혼식도 매우 이채로웠다. 도시의 사정은 다르지만 시골에서는 아직도 사촌간의 결혼이 흔히 행해지고 있다. 결혼식 날이 다가오면 신부는 자신의 집 외진 방에 들어가 결혼식 준비를 한다. 전통에 따라 노란 바탕의 옷을 곱게 차려입고 여자친구들이나 친척들과 함께 지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짧게는 3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실내에서 지내면 피부가 하얘진다고 믿는다. 이 기간 동안 손이나 팔에 꽃무늬 따위를 헤나로 그려 넣는 맨디(mahndi)를 한다.

무슬림 국가라고 해서 위험하다는 선입견을 버리면 여행이 즐겁고 상당히 이색적인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파키스탄이다. 문제는 그렇게 매력적인 나라에 지금은 쉽게 갈 수 없다는 점이다. 알카에다의 테러 위험 때문에 외교부에서 여행경보 3단계인 철수권고 또는 특별여행경보 1단계인 특별여행주의보를 발령한 것이다. 그러니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만 파키스탄을 여행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사정이 특별히 있을 법하지 않다.

현재 파키스탄의 인구는 약 1억 6천만~1억 9천만 명. 전체 인구 97% 이상이 이슬람 신자인 무슬림으로 인도네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이슬람 신도가 많은 나라다. 6·25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물자 원조를 해 준 19개 나라 중 하나가 파키스탄으로 그 무렵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다. 그러나 계속된 정치 불안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현재 이 나라의 경제 상황은 썩 좋지 않다. 미국 단체인 평화기금(Fund for Peace)에서 발표하는 실패국가지수로는 세계 10위에 랭크돼 위험국가에 속한다. 이 정도면 아이티, 짐바브웨 수준의 위험 상태다.

내가 푸르다(purdah)를 말할 때면 예로 드는 나라가 파키스탄이다. ‘여성 격리’라고 할 수 있는 이 제도는 보호라는 명분하에 여성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아주 나쁜 악습이자 만행이다. 이 나라 (특히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한 북서변방주의) 여자들은 여느 이슬람 국가 여성들보다 갑갑한 의상 부르카(burqa)를 입는다. 상상해보라. 섭씨 40도를 웃도는 기온, 90도에 육박하는 습도 속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르카를 뒤집어쓴 여자의 고통을. 겨우 눈 부위만 철조망처럼 뚫려 있어 외부세계를 볼 수 있다.

古都 페샤와르는 산스크리트어로는 ‘사람들의 도시(city of men)’라는 의미의 Puruṣa-pura로 알려졌었다. 산스크리트어 ‘-pur(a)’는 ‘성곽도시’를 가리키는 말로 우리말에 차용돼서는 ‘서라벌’, ‘황산벌’ 등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도시는 또한 기원 전 2세기 그레코 박트리아 왕국 시절에는 오늘날의 탁실라(Taxila)에 해당하는 Takshashila를 통치했다. 박트리아를 당시 중국에서는 大夏라고 불렀다. 대하를 월지가 접수했다. 그리고 5흡후로 나눠 통치했다. 백제나 고구려, 부여 등의 통치방식도 이와 비슷했다. 흉노라는 부족연맹체도, 거란족의 요나라도 이런 지배 시스템을 택했다.

“……월지가 흉노에 멸망당하자 마침내 대하로 이주하고, 나라를 휴밀(休密)·쌍미(雙靡)·귀상(貴霜)·힐돈(肹頓)·도밀(都密)로 나눠 모두 五部의 흡후(翎侯)가 됐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서 귀상흡후인 구취각(丘就卻)이 (다른) 4흡후를 멸하고 스스로 왕이 돼 국호를 귀상이라고 했다. 안식을 침공하고 고부의 땅을 취했다. 또한 복달과 계빈을 멸하고 그 나라를 모두 차지했다. …… 다시 천축을 멸하고 장군 1인을 두어 그곳을 감령케 했다. 월지는 그 뒤로 극도로 부강해졌다. 여러 나라들은 모두 그 나라 왕을 ‘귀상왕(貴霜王)’이라 칭하지만, 한나라는 그 옛날의 칭호를 써서 ‘대월지’라고 부른다.”(『後漢書』 「西域傳」 第78 大月氏國條)

그랬다. 5흡후 중의 하나인 귀상흡후가 나머지 흡후를 병합하고 통일 국가를 세웠다. 간다라 지방도 수중에 넣었다. 쿠샨왕조(30~375년)가 탄생했다. 이 왕조와 관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니슈카 (Kanishka, 迦色伽: 127~151년. 중국 사서는 78년에 즉위한 것으로 기록) 왕을 떠올릴 것이다. 이 왕조의 수도 중 하나가 페샤와르였다. 베그람Bagram(Kapi´si)도, 탁실라Taxila(Taks·a´silā)도, 마투라Mathura(Mathurā)도 수도였다.

『魏書』「列傳」第九十 西域 小月氏國條와『北史』「列傳」第八十五 西域 小月氏條는 동일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小月氏國,都富樓沙城. 其王本大月氏王寄多羅子也。寄多羅?匈奴所逐,西徙. 後令其子守此城,因號小月氏焉. …… 其城東十里有佛塔,周三 百五十步,高八十丈. 自佛塔初建計至武定八年,八百四十二年,所謂百丈佛圖也.”

소월지국의 도성인 ‘富樓沙城’은 바로 Peshawar의 고대 산스크리트어 명칭인 Purus·a-pura의 음차어다. 결국 페샤와르는 한 때 소월지국의 도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서가 전하는 바로는 그 나라 왕은 본래 대월지왕 寄多羅(Kidara)의 아들이었다. 1세기 초 월지의 한 갈래인 ‘玉의 부족’ 貴霜이 여타 부족을 통합하고 그레코-박트리아의 영토에 쿠샨제국을 건설했다. 그 강역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대부분과 파키스탄 페샤와르는 물론 인도아대륙 북부를 망라했다. 중국은 이 대제국 쿠샨을 여전히 월지국이라 불렀다. 월지의 나라 쿠샨제국은 375년에 멸망했다. 그렇다면 東魏 孝靜帝(재위 543~550년) 마지막 해인 武定 8年(550년)을 전후한 시점에 중국인이 월지국으로 간주한 이 나라의 정체는 무엇일까? 320년경 寄多羅(Kidara) 1세에 의해 시작된 寄多羅 왕국(the Kidarite Kingdom)은 스스로 쿠샨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마지막 왕조였다. 이 왕조의 마지막 왕은 Kandik로 500년대 초의 인물이다. 뭔가 복잡하다.

이와 관련해 『魏書』「列傳」 第九十 西域 乾陀國條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건다국(乾陀國)은 오장국(烏???國) 서쪽에 있는데 본명은 업파(業波)다. 에프탈(백흉노)에게 공파돼 이름을 바꿨다. 그 나라 왕은 본시 칙륵(???勒)인이다. 나라를 통치한 지 이미 2세대가 지났다.”

乾陀國은 乾陀羅國을 말한다. 간다라국의 본명 業波는 東魏의 楊衒之가 撰한 『洛陽伽藍記』에는 業波羅로 기록돼 있다. 간다라를 왜 업파라라고 했을까? 그것이 나는 오래 궁금했다. 그러다 마침내 간다라를 가리키는 고대 페르시아어 Para-upari-sena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業波羅는 upari의 한자 표기였던 것이다.
乾陀羅(Gandh ̄ara)는 도시 이름이자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했던 고대 왕국의 명칭이다. 이미 살펴봤듯, 간다라의 중심 페샤와르를 인도인들은 ‘사람들의 도시’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로 Purus·a-pura라고 불렀다. 한편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Para-upari-sena 라고 지칭했다. 그 말뜻은 ‘beyond the raised lands(높은 땅 너머)’다. 여기서 upari-sena 즉 ‘높은 땅’은 파미르와 힌두쿠시산맥을 가리키며, Para-upari-sena는 파미르와 힌두쿠시 너머 간다라가 위치한 페샤와르 계곡을 말한다.

고대 페르시아어 Para-upari-sena를 그리스인들은 Paropamisadae와 Paropamisus라는 희랍어로 차용했다. Paropamisadae는 원래는 Para-upari-sena에 거주하는 민족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지명(toponym)으로 사용됐다.

간다라(Gandhara)라는 지명을 칸다하르(Kandahar)와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魏書』는 간다라를 乾陀羅國이 아닌 건다국(乾陀國)이라고 적었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이 香料(perfume)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gandha의 음차자로 간주한다. 지금도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등의 주민들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사원에 꽃과 향유를 바치고, 음식에 다양한 향신료를 사용한다. 이 일대는 고래로 향료무역의 중심지였다. 간다라를 香國이라 한 것은 그 말뜻을 따른 것이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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