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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의 말잔치
교육부의 말잔치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5.08.17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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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교육부 보도자료가 배포되기 전날인 지난 11일 오후, 문자메시지 알림이 4시간 간격으로 연이어 울렸다. 주간계획에 없던 일정이 추가된 것이라 교육부의 상황이 긴급해 보였다. 제목도 ‘교육부, 강도 높은 교육개혁을 위한 로드맵 제시’라는 짐짓 비장한 내용이었다. ‘강도 높은’ ‘교육개혁’ ‘로드맵’… 게다가 일정에도 없던 일 아닌가.

▲ 최성욱 기자

더 의아했던 건 교육부가 ‘교육개혁 로드맵’을 긴급히 발표하겠다고 예고한 12일은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의 하계휴가(10~13일) 기간이었다. 정부의 교육개혁에 관한 중대발표가 이렇게 갑작스레 나오는 것도 이례적인데 심지어 부처 장관의 휴가 중에라니, 혹시 비상사태라도 일어난 건 아닐까 기자는 밤새 잠을 설쳤다.

발표 당일인 12일 오전 10시 30분. 교육부가 관련 보도자료를 내면서 ‘엠바고’를 설정한 시각이다. 전날 보도자료를 먼저 받은 매체들에서 일제히 온라인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보다 한 시간 앞서 교육부의 고위책임자가 정부세종청사에서 보도자료를 낭독(!)하는 생생한 사진기사도 올라왔다. 이 책임자의 표정은 짐짓 비장하기까지 했고 사진기사는 시간을 다퉈 수십 건이 경쟁적으로 게재됐다. 제목도 하나같이 ‘교육부, 교육개혁 로드맵 발표’였다. 기사가 한꺼번에 몰리자 포털사이트에선 관련기사를 묶어 ‘헤드라인’을 만들 정도였다.

이메일 오류로 인해 기자는 공교롭게도 보도자료를 당일에야 받았다. 이땐 이미 보도자료를 정리해서 올린 1차 속보가 온라인을 수놓은 상황이었다. 보도자료를 열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고, ‘교육개혁 로드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간 추진해온 교육부의 정책을 모아둔 정책홍보 혹은 계획표에 불과했다. 여기에 제목만 은근슬쩍 갖다붙인 것이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통상적으로 대통령에게 보고할 목적으로 만든 교육부의 정책계획서가 대통령에게 가기 전에 언론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도된 것이다.

늘 해오던 일상적인 정책을 어느 날 갑자기 한 데 묶어서 ‘로드맵을 제시하겠다’고 전국민의 이목을 끄는 사례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자칫 교육부가 대통령에 잘 보이기 위해 국민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오해할 여지도 있다. 실제로 교육부는 이번 문건의 첫머리에 “지난 6일 있었던 대통령 대국민 담화의 후속조치로 (중략) 교육개혁의 차질없는 추진을 다짐했다”고 썼다. 계획에 없던 문건이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닷새만에 만들어진 것이다. ‘보고’해야 할 문건을 ‘보도’로 대신 하고 있는 격이다. 

가장 큰 문제는 문서로 눈속임 하고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교육부의 얕은 수다. 이는 최근 초중등교육과정에 소프트웨어분야를 정규과목에 포함시키겠다고 한 보도자료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미래창조과학부 등과 부처간 협의해 발표했던 내용과 유사하다. 

이럴 때마다 교육부는 그때는 ‘계획’이고 지금은 ‘실행’이라서 같지 않다는 투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교육부가 ‘언론플레이’와 ‘포털사이트 제목 장사’를 통해 정부의 업적을 홍보하는 데만 관심을 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교육부의 한 책임자는 “교육개혁 실행계획은 있던 것들이지만 향후 일정을 명확히 한 것이니 로드맵이 맞다”고 설명했다. 교육부는 이번 문건이 ‘로드맵’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듯하다. 

실체는 없는데 문서로만 존재하는 것을 가리켜 ‘페이퍼 워크(paperwork)’라고 한다. 교육만큼은 페이퍼워크가 아닌 ‘필드워크(fieldwork)’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간 백년대계를 목표로 전 국민의 혈세가 투입된 교육부의 고강도 정책들이 이번처럼 문서상으로만 존재해온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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