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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학은 ‘87년 체제’의 모순을 끊어야 한다
한국 정치학은 ‘87년 체제’의 모순을 끊어야 한다
  • 박동천 전북대‧정치외교학과
  • 승인 2015.08.17 17: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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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광복 70주년을 다시 생각하다_ 정치

대한민국은 탄생한 지 불과 70년도 안 돼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놀라운 나라다. 국내총생산은 세계 190여개 나라 중에서 13위 근처고 일인당 GDP로 봐도 30위에서 35위 사이에 들어간다. 흔히 ‘압축 성장’으로 부르는 산업화 과정에 적지 않은 야만과 폭력이 수반됐지만 콩고, 수단, 시리아, 이라크 등의 사정에 비할 정도는 물론 아니고, 1789년 이후 프랑스가 겪어야 했던 내부 갈등만큼도 아니다. 북한과는 열전도 벌였고 냉전은 아직 계속되고 있지만 규모면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나 미소 냉전에는 미치지 못한다. 어쨌든 현재의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선진국’을 추려 34개국만 받아들인 OECD의 회원국이다.

반면에 풀어내야 할 숙제도 많다. 북한과 통일을 해야 하는지, 통일 과정에 폭력을 얼마나 감수해야 할지, 통일된 한반도의 정부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골치 아픈 질문이 꼬리를 물지만 어쨌든 현재 북한 땅을 차지한 정권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예측가능한 수준까지 안정화할 필요가 있다. 일본‧중국이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감행하고 있는 팽창주의에 대응해서 한국의 영토 주권을 지켜내야 하는 과제와 함께 역내에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선도할 길도 찾아내야 한다. 이 문제는 다시 한미동맹의 위상 및 성격과 결부되는 만큼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동태적인 균형점을 포착할 지혜가 상시적으로 요구된다.
 
“낙원을 기대했다가 절망에 빠진 심리적 악순환”

▲ 박동천 전북대‧정치외교학과

시선을 국내 정치로 돌려보면 한 눈에 들어오는 숙제들만도 대단히 많다. 먼저 복지, 교육, 균형발전 등 상시적으로 등장하는 단골 의제가 있다. 구조적으로 들어가면 지대로 대표되는 불로소득과 노동자의 소득 사이에서 계급 갈등을 평화롭고 공정하게 해소할 길을 찾아야 한다. 이는 사회적 강자의 기득권과 약자의 권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문제로 일반화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정치 본연의 임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민들 사이에는 불만스러운 정치에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기보다는 혐오하고 경원하는 풍조가 지배적이다. 머지않아 시민이 될 고등학생 중에서도 ‘정치’라는 과목을 선택하는 학생은 20% 선에 그친다.

광복 70년의 역사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간 동안 한국의 정치판은 이치와 설득, 타협과 양보보다는 무력을 선점한 세력에 의한 횡포로 점철됐다. 군부의 무력이 직접 정치판을 주름잡은 사례들도 있었고,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관료제를 앞장세운 조직적인 권력이 검찰, 경찰, 법원, 그리고 언론기관의 협조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을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이치나 진실을 따지는 목소리는 일방적으로 진압되거나 격리되는 신세를 면치 못하다보니, 정의를 추구하는 높은 기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단순히 집단적 원한을 공유하는 수준의 또 다른 패거리 행태에 빠지기 일쑤였다. 국가와 자본 등 강자가 전횡을 부리고 그것을 또 은폐하려 들 때마다 분개하는 여론이 일어나는 것은 아직 한국 정치에 희망이 남아 있다는 증거지만, 정치적 대안이 유력한 수준으로 세력화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무력과 전횡으로 점철되는 정치판을 이치와 설득, 토론과 승복이 주도하는 것으로 바꾸려면 일단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많은 개인들의 희생과 거기에 수반되는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민주화를 이만큼 달성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87년 체제가 향상된 미래를 약속해주기는커녕 도리어 정치혐오를 확대재생산하는 이유로는 단번에 낙원을 기대했다가 금세 절망으로 빠지는 심리적 악순환이 있다.

이와 같은 악순환을 끊을 임무는 정치학을 비롯한 학문의 몫일 것이다. 세상을 단번에 바꾸겠다는 발상은 자체로 권력정치에 매몰된 심리에서 비롯된다. 세상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바라보면서, 악을 척결하면 선만이 남으리라고 착각하지만, 악을 척결하는 무기가 권력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는 철저히 눈을 감는 것이다. 하지만 권력 자체는 선보다 악에 가깝다. 현실에서 선을 세우기 위해 어쩔 수없이 권력이 동원돼야 하는 경우는 분명히 있지만, 그런 경우에조차 가능하면 감화가 더욱 선한 방법이다. 권력이 필요한 경우가 있음을 부정한다면 무모한 이상론이며, 그런 경우에조차 권력이 필요악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면 무지한 현실론이다.

‘정부란 무엇인가’ 한국 정치학이 미뤄온 과제

한국의 정치학은 공동체에서 권력의 위상, 다시 말해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정부의 성격에 관해 지금까지 분명한 입장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 고려나 조선 등 전통시대부터 현대의 군부독재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속성을 비판적으로 파헤치는 관점은 권력에게 환영받을 수 없었던 환경이 있다. 깡패를 만난 한신이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우기보다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지나가는 굴욕을 참고 적응했다는 고사는 특별히 비겁해서가 아니라 일반화해도 괜찮은 합리적 결정이다. 서너명의 깡패를 상대할 때도 그럴진대, 현대국가라고 하는 거대 조직의 잠재적 폭력성에 개인이 정면으로 대항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지식인 중에 특별히 지사적인 기질의 소유자라면 권력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악한 속성을 까발리기도 하지만, 그런 기질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지식인 노릇을 못하게 막는 자격심사 따위는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무엇보다, 권력의 속성을 까발리기 위해 권력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도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20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성장한 한국 정치학계에서는 ‘과학적 정치학’이라는 이념 아래 정치적 중립성과 객관성을 학문의 본령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함께 자라났다. 하지만 과학적 객관성이란 오로지 연구 주제를 착취와 조작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서 규정된다. 과학적 중립성이란 과학적 성과를 실제적 이익으로 전환하는 효용에 동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자연스럽게 공인되는 중립성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자연과학 내부에도 과학적 중립성이나 과학적 객관성에 관해 여러 갈래의 이견이 존재한다. 하물며 인간의 삶과 행동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인 정치연구에서 과학을 흉내내다보면, 강도가 내 가족을 겁탈하는 상황에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 소외가 발생한다.

학문이 운동과 무분별하게 뒤섞여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무분별은 지성의 적이다. 모든 운동은 불가피하게 권력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반면에 지성의 본령은 분별에 있다. 권력이 언제 무엇을 위해서 필요한지를 분별하는 힘이 지성에서 나오듯이, 운동 가운데 어떤 운동이 누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분별하는 힘도 오직 지성에서만 나온다.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 그리고 한국의 정치학이 현재 당면한 과제를 요약해 봤다. 한국의 정치와 한국의 정치학이 지금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없다고 보는 사람이나, 바뀌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는 객관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며, 중립적이라기보다 가치개입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차원에서 정치성과 가치개입성을 배제할 길은 없다. 그것을 배제하려는 순간 인간은 주체의 지위를 모두 상실하고 오직 객체로만 전락하며, 그 틈에서 정부나 기업의 관료조직이 눈먼 권력을 무한정 휘두르는 결과가 빚어진다. 

박동천 전북대‧정치외교학과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샴페인)에서 정치학 박사를 했다. 주요 저서로는 『깨어있는 시민들을 위한 정치학 특강』 『플라톤 정치철학의 해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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