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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에 했어야 할 반성”… 어떤 대담집이 던진 질문
“200년 전에 했어야 할 반성”… 어떤 대담집이 던진 질문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
  • 승인 2015.08.1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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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헌학

답답하다. 한국 사회의 현재 모습일 것이다. 나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진퇴양란의 올무에 걸린 형국이다. 애처롭기까지 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 하나로 『만남의 철학: 김상봉과 고명섭의 대담』(김상봉·고명섭 지음, 도서출판 길, 716쪽)은‘자기 철학’의 부재를 지목한다. 십분 동의한다. 이런 이유에서다. 내 생각에, 책은 200년 전에 나왔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외세에 의해 강요된 근대가 아니라 기획된 근대를 맞이할 수도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책은 일단 18세기 유럽의 지성계를 달궜던 물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주체’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책은 당시 유럽의 지성들이 피력한 주장들을 전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은 이것들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단적으로 김상봉은 그동안 학계는 칸트의 철학을 ‘인식론’의 관점에서만 주목했다고 일갈한다. 칸트 철학의 정수는 ‘존재론’에 있다고 한다. 그의 주장이다.

“존재가 정신이라는 것, 곧 존재의 정신성이 플라톤과 칸트가 공유하는 존재 사유의 지평이지만 그것이 플라톤의 경우에는 파르메니데스가 정식화했듯이 생각과 존재의 일치로 나타난다면, 칸트의 경우에는 주체와 존재, 나와 존재의 일치로 나타나는 거지요. 이런 의미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플라톤적인 길이 ‘생각의 존재론’이라면 칸트의 길은 ‘나의 존재론’이라는 것.”(99쪽)

이 주장 자체만으로도 그 안에 잠재된 논란의 폭발성 때문에 이를 따져보는 학술 자리를 따로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인정하자. 더 큰 볼거리들이 뒤따르기에. 김상봉은 곧장 칼날을 칸트에게로 겨눈다. 한 마디로 칸트의 ‘나의 존재론’에는 ‘나’만 있다는 것, 너와 우리의 ‘만남’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실은 김상봉의 ‘만남의 철학’이 시작된다. 그의 선언이다.

“만남은 존재의 아르케(arche) 곧 존재의 시원이요 원리(principium)이다.”(43쪽)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만남’을 존재의 시원으로 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책은 이 점에서 약점을 노출한다. ‘만남’을 존재의 시원으로 상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많은 물음들이 많은데 이것들에 대한 따짐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만남이 무엇인지’에 대한 엄밀한 개념 규정이 없다. 물론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말이다.

“만남이란 언제나 언어를 초과하는 사건, 언어를 뛰어넘는 사건이에요. 우리는 언어를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언어를 통해 타인을 이해한다 하지요. 하지만 만남은 언어의 그물에 포획되지 않아요. 그것은 언제나 언어의 그림자로만 흔적을 남길 뿐이지요.”(288쪽)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어도 ‘만남’을 존재의 아르케로 상정하려면 말이다. 요컨대 ‘만남’이 단순하게 비유적 표현인지 아니면 존재의 양태를 지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존재의 시원인지를 논구했어야 했다. 이와 관련해서 또한 ‘만남’이 ‘수’에 있어서 단수인지 복수인지, 성격에 있어서 인격인지 사건인지 등의 물음에 대한 엄밀한 논증과 단단한 근거가 제시됐어야 했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답답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현재 모습이 그를 사변적인 탐색에 머무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은 200년 전에 했어야 할 반성을 함께 해야 하는 과제도 떠맡은 처지였기에하는 말이다. 즉 한국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로 작동하기위해 요청되는 최소공통덕목(moralia minima)를 탐색하는 일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이 우리의 시대사적 과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예컨대 장사익의 「섬」이 제기한 물음에 대해서 이의를 할 수 있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늘 하나라고 건배를 하면서도/등 기댈 벽조차 없다는 생각으로/나는 술잔에 떠있는 한 개 섬이다/술 취해 돌아오는 내 그림자/ 그대 또한 한개 섬이다.”

장사익의 노래대로 사람이라는 ‘섬’을 잇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상봉에게 이런 무거운 과제를 “김상봉의 출발점은 섬이다”(17쪽)라고 아예 못 박아 버린 고명섭을 나는 적극 지지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0년 전에 했어야할 일을 우리는 이제 시작하고 있기에. 지금도 많이 늦었다는 소리다. 이런 의미에서 김상봉에게 후속 작업을 강권하는 고명섭의 ‘못박음’은 정당하다. 물론 ‘만남’문제 일반을 철학 담론의 세계에 상정한 것 자체만으로도 김상봉의 큰 기여이긴 하지만 말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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