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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에 묻힌 ‘월지’의 발자취 … 이름으로 더듬어낸 그들의 역사와 공간
고원에 묻힌 ‘월지’의 발자취 … 이름으로 더듬어낸 그들의 역사와 공간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08.12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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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44. ‘인도의 玉’ 힌두쿠시 山脈과 ‘파의 高原’ 파미르 산중의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 소발률 정복을 위해 고선지장군과 휘하의 당나라 군대가 넘었을 탐구령(Darkot Pass).사진= 장영주 KBS PD

唐나라 開元 15년(727년) 음력 11월. 마침내 慧超 스님(704~787년)은 당나라의 수도 長安에 당도한다. 약 4년간 천축(인도)과 서역을 巡遊한 뒤다. 20대 초반의 젊은 승려가 교통과 숙식이 용이치 않았을 낯선 세상 험한 곳으로 장기간 장거리 여행을 감행한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은 즐거움과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말이 있다. 여행은 인내를 요구한다. 혜초 스님이 겪어야 했던 갖가지 고생이 대략이나마 그려진다. 그가 귀로에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고산병으로 얼굴이 호빵처럼 붓고 울렁증이나 두통으로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었을 것이다.

서역과의 교류에 대한 중국 사신의 말을 기록한 『宋書』 「夷蠻傳」 第57 豫州蠻條는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漢代 서역의 언어를 번역할 수 있어 먼 곳까지 통할 수 있게 되니, 길이 난 곳이 수만 리가 됐다. 頭痛之山을 넘는데, 밧줄을 타고 건너가야만 하는 험난한 곳을 넘고, 죽음의 길을 살아서 지나가려니, 몸은 앞으로 나가는데 魂은 돌아가려 할 지경이었다.”

파미르를 넘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목숨을 건 도전인지를 보여주는 기사다. 두통산이란 표현은 웃음을 자아낸다. 필경 고산증 증세로 나타나는 두통 때문에 산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 같다. 그러나 해발 3천 미터만 되면 어느 곳에서고 두통이 생기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頭痛之山이 특정한 山이름인지는 모르겠다. 『通典』 卷193 「邊防」 渴槃陀條와 『漢書』 「西域傳」에 따르면, 두통산이 지금의 신장 타시쿠르간(Tashkurgan) 타지크 자치현의 갈반타 서남쪽에 있고, 고대 인도의 계빈(Kapisa)으로 통하는 험준한 산으로, 大頭痛山과 小頭痛山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 수그드 강 남쪽에 자리한 소그디아나의 도시들. Rabinjan(혹은 Arbinjan) 근처에 월지의 Kush clan(玉氏族)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Kushaniya가 있다.사진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abinjan

혜초 스님은 토화라에 있던 겨울 어느 날 문득 눈을 만나 난감한 심정을 오언시로 표현했다. “차디찬 눈보라 얼음까지 섞여 몰아치고/ …… / 우물가는 도사린 뱀처럼 얼어붙었다/ 횃불 벗 삼아 오르며 노래 불러보건만/ 저 파미르 고원 어찌 넘을 것인가.” 蔥嶺 즉 파미르를 넘기 전이다. 파미르고원이 어디든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산악고원지대다. 이곳에 과거 護蜜國이 있었다. 호밀이란 나라 이름은 胡麥 또는 黑麥이라고도 하는 호밀(rye)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왕의 居城은 색가심성(塞迦審城). 여기가 심상치 않은 곳이다.

『신당서』 「서역전」이 전하는 호밀국 이야기를 먼저 읽어본다.

“護蜜은 달마실철제(達摩悉鐵帝) 혹은 확간(???侃)이라고도 부른다. 북위 때에 발화(鉢和)라고 불렀던 것인데 역시 吐火羅의 고지이다. 왕의 거처는 색가심성(塞迦審城)인데 북쪽으로  湖河(아무다리야 강)에 임해 있다. 사람들은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다. 현경 연간에 그 땅을 鳥飛州로 삼았고, 국왕 사발라힐리발(沙鉢羅???利發)을 자사로 임명했다. 그 곳은 四???이 토화라로 들어가는 길의 입구에 해당하며, 예전에는 토번에 복속했. 개원 8년(720) 그 왕인 나려이타골돌록다비륵막하달마살이(羅旅伊陀骨???祿多毗勒莫賀達摩薩爾)를 왕으로 책봉했다.”

놀랍지 않은가. 여기 사람들이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다니. 기억을 더듬어보자. 돌궐과 오손인의 신체적 특징이 푸른 눈에 붉은 머리라는 사실을 인문학기행 초반부에 얘기했다. 그렇다면 호밀국의 주민은 돌궐, 오손과 같은 종족일 수도 있다. 왕의 이름도 흥미롭다. 사발라힐리발. 沙鉢羅는 어떤 음, 어떤 의미를 지닌 말일까. 돌궐제국(552~744년)의 5대 카간 阿史那 攝圖(ashina shetu or setu, ‘white dragon’이란 뜻)의 칭호도 沙鉢略(또는 始波羅)이었다. 돌궐비문에 근거해 이 이름은 이시바라(Ishbara)라고 읽는다. 돌궐제국의 창건자 伊利可汗(Illiq Qaghan) 阿史那 土門의 동생으로 西面可汗 즉 서돌궐의 엽호(yabghu)였던 阿史那 室點密(재위: 552~575년)은 Istemi의 음차어다. 어쨌든 왕의 칭호로 Ishbara를 같이 쓰는 이상, 그렇다면 호밀국(왕)은 돌궐과 같은 언어와 칭호를 사용하는 족속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開元 8년(720년) 唐 조정에 의해 왕으로 책봉됐다는 당시 호밀왕의 官稱 ‘나려이타골돌록다비륵막하달마살이’도 그가 돌궐과 동계임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 긴 칭호에 포함된 한자어 骨???祿, 莫賀는 돌궐인명에서 흔히 보는 어휘다. 위구르 제국 초대 가한 칭호의 한자어 표기도 골돌록으로 시작한다. 골돌록비가궐가한. 이는 고대 투르크어 Qutlugh bilge k¨ul qaghan의 음사로 ‘고귀하며 현명하고 강한 군주’라는 의미 깊은 칭호다. 그 왕의 거처가 색가심성이라 했다. 이 또한 파미르에서 발원하는 아무다리야강, 정확히는 지류인 판지강(the Panji)의 南岸에 있는 이시카심(Iskashim)城의 음차자다. Iskashim을 한자어로 전사하는 과정에서도 어두 모음 /i/가 탈락됐다.

파미르고원 와칸 계곡(중국 사서의 호밀)에 생활 터전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은 스스로를 이시코슈미(ishkoshum´l) 내지  이시코시미(ishkoshim´l)라고 부른다. 인도-아리안 자료에 근거할 때 첫음절 ish-는 Saka(索種)를 나타내며, koshum은 ‘land, earth’의 의미를 지닌다. 이 둘이 합쳐져 이시카심이 탄생했다. 이시카심은 ‘색종(사카족)의 땅’인 것이다. 월지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진 색종이 세계의 지붕 파미르, 판지강이 흐르는 와칸 계곡에 터전을 잡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 고대 색종의 후예일 수도 있는 이시카미 마을의 어린이들.

아프가니스탄 북부 바닥샨주(the Province of Badakhshan) 판지강 상류 좌안에 사는 1천500에서 2천 명 정도의 이시카시미들이 예나 지금이나 무심히 흐르는 판지강 건너 타지키스탄 고르노-바닥샨 자치구(the Gorno-Badakhshan Autonomous Region) 이시카시미구 뉴트(Nyut) 키시라크(qishlaq: ‘촌락’)의 동족들을 바라보며 생활하고 있다. 역사의 비극이다.

그렇더라도 자연경관은 비경 중의 비경이다. 판지강 북쪽은 와칸산맥, 남쪽은 그 유명한 설산 힌두쿠시. 『魏書』 「서역전」과 『北史』 「서역전」 第85 鉢和國條는 힌두쿠시의 장관을 이렇게 말한다. “발화국은 갈반타의 서쪽에 있다. 그 풍토 역시 추우며, 사람과 가축이 함께 사는데, 땅을 파서 그곳에 거주한다. 또한 큰 설산이 있는데 바라보면 마치 은색 봉우리와 같다. 그 주민들은 오로지 보리떡만 먹고 밀로 빚은 술을 마시며, 모전으로 만든 외투를 입는다.”

여기서 말하는 발화국은 와칸의 한자어 음차어로 바로 호밀국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 하려 한다. 위의 글에서 ‘바라보면 마치 은색 봉우리 같은 대 설산’이라고 한 산이 다름 아닌 힌두쿠시다. 이번 글의 표제 일부분을 ‘인도의 玉’ 힌두쿠시 산맥이라고 한 건 Hindukush에서의 kush가 다름 아닌 ‘玉’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Kush라는 어휘를 재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토템으로서 玉을 부족명으로 삼은 월지의 갈래가 본거지를 떠나 서역으로 이주해 간 경로나 흔적을 찾는데, 이 kush라는 어휘가 큰 역할을 한다.

천산일대를 거점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색종은 월지에 밀려 어디로 갔을까. 그것이 한동안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원이나 언어 풍습 등은 어떠했을지도 무척 알고 싶었다. 일단 호밀국 혹은 발화라국으로 알려진 파미르 산중의 나라가 색종의 왕국이었음을 알았고, 그들의 신체적 특징과 언어에 대해서도 다소간의 정보를 얻었다. 잠정적인 결론이지만 색종은 돌궐과 동종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신당서』, 『구당서』의 호밀국은 休密(『후한서』), 胡密丹(『梁書』), 胡蔑(『一切徑音義』) 등으로도 표기된다. 『대당서역기』는 호밀을 拘迷陀라 적고 있다. 이는 프톨레미(Ptolemy, AD 83년경~168년경.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점성학자인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를 말한다)가 말하는 Komedai와 아랍 문헌 자료에 보이는 Kumed와 같은 것이다.

“실크로드는 로마령 시리아의 수도인 안티오크를 출발해 …… 메르브(Merv)를 거쳐서, 그리고 이 시기 인도-스키타이 사람들 즉 중국에서는 월지 또는 인도에서는 토화라인으로 기록된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던 박트라(Bactra, 大夏)로 이어졌다. 이곳에서 실크로드는 파미르 고원으로 들어갔다. 프톨레미에 의하면 이 산맥의 계곡 즉 ‘코메다이(Komedai) 언덕’의 아랫자락에는 돌탑이 있고, 그 부근에서 ‘비단’을 운바하는 중국(seric) 상인들과 레반트 상인들이 물품을 교환했다”.(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90쪽)
결국 護密 등의 다양한 이표기는 구미타의 拘迷와 같은 음 즉 /kume/을 다른 한자로 전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호밀의 또 다른 명칭인 鉢和나 확간(둘 다 Wakhan의 음차)의 의미를 검토하면 혹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위서』 「서역전」 伽倍國條는 흥미로운 내용을 전한다. 가배국이 옛 휴밀흡후이고 도읍은 和墨城이라는 것이다. 사차의 서쪽에 있고 代와는 1만3천리 떨어져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고도 했다. 가배국이 옛 휴밀흡후라는 것은 과거 휴밀흡후였던 곳이 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가배국이라 불렸다는 말로 이해된다. 도대체 흡후(yabghu)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月氏의 수령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은 원래 토하라어에서 ‘땅, 지방’을 뜻하는 ‘yapoy 혹은 ype’라는 말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이에 대해 자신이 없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마침내 총령을 넘어간 월지의 또 다른 행적을 찾을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귀중한 문헌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후일 쿠샨왕조를 세운 大夏(Bactria)의 오흡후 중의 하나인 귀상흡후는 옛 휴밀흡후였던 가배국의 서쪽 560리, 代와는 1만3천56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겸돈국이라고 『위서』 「서역전」 겸돈국條는 기록하고 있다. “겸돈국은 옛 귀상흡후로 도읍은 호조성이다. 절설막손의 서쪽에 있고 대와는 1만3천560리 떨어져 있다.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

그런데 『위서』 「서역전」보다 훨씬 오래전에 쓰여진 『前漢書』 「서역전」 第66 大宛國條에 대완국의 도읍이 貴山城이며, 서남으로 690리 떨어진 곳에 대월지국이 있고, 토지, 풍토, 물산, 민속이 대월지, 안식과 동일하다고 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貴山은 月氏가 복속시킨 오흡후 가운데 하나인 貴霜과 어원적으로 동일하며 둘 다 Kushan 내지 Kushaniya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월지의 한 갈래인 Kush족이 이동 중에 흩어져 여기저기 자리를 잡으며 자신들의 흔적을 지명 등으로 남겼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다. 참고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사마르칸드 서북쪽에 과거 소그드인의 도시라고 알려진 Kushaniya가 있다.

가배국(휴밀흡후)과 겸돈국(귀상흡후)의 사이에는 절설막손(雙靡흡후)이 있었다. 가배국에서 서쪽으로 500리 떨어진 곳이다. 쌍미흡후의 위치와 관련해서 『신당서』 「서역전」은 호밀의 북쪽은 識匿(Shighnan), 남쪽에는 商彌가 있다고 했다. 덧붙여 말하기를, “상미는 오흡후의 하나로 그 지방의 크기는 2천 리가 넘는다. 포도가 많이 나고, 자황도 나오는데 돌을 굴착해서 그것을 얻는다. 동북으로 산을 넘어 700리를 가면 波謎羅川(파미르강)에 이른다. 동서가 천리이고 남북이 백리이며, 봄과 여름에 비와 눈이 내린다”고 했다. 

과거 귀상흡후였던 겸돈국에서 서쪽으로 100리 떨어진 지점에 옛적에 힐돈흡후였던 불적사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代와는 1만3천660리 떨어진 곳이며, 이 나라 사람들 역시 여타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산 계곡 사이에 거주했다. 도읍은 薄茅城이다. 弗敵沙는 이 일대의 지명인 Badakhshan의 音譯이 아닐까 싶다.

불적사국에서 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閻浮謁國이 나오는데 여기는 과거 高附흡후이고 도읍은 高附城이다. 代와는 1만3천760리 떨어져 있으며, 여기 주민들도 역시 산 계곡 사이에 거주한다. 『後漢書』는 다섯 번째 흡후로 고부가 아니라 都密을 들고 있다. 그 진위야 어찌됐든 大夏를 구성하던 오흡후의 하나인 옛 귀상흡후 겸돈국이 나머지 4개 흡후를 규합해 쿠샨왕조를 수립하게 된다. 중국사서가 계속해서 쿠샨제국을 월지라 부른 이유를 알만하다. 귀상흡후는 물론 파미르 산중의 다른 흡후들이 모두 월지에 속하는 씨족 내지 부족이었던 것이다. 귀상이 玉을 뜻하는 월지어 kush이듯, 나머지 네 흡후의 명칭도 월지어를 한자로 전사한 것이며 나름대로의 상서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다 아는 것은 현재로선 역부족이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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