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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부터 경제까지 … 『大唐西域記』는 최신 국제정세 보고서였다
정세부터 경제까지 … 『大唐西域記』는 최신 국제정세 보고서였다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8.12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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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13. 현장과 왕현책, 천축과 서역을 탐색하다
▲ 현장이 가져온 불교전적들을 보관하기 위해 세웠던 대자은사 대안탑. 이 지역은 현재 시안을 상징하는 대안탑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앞에 보이는 입상과 입상 앞쪽의 좌상이 현장의 동상이다

현장은 한 권의 여행기록 보고서를 작성해 태종에게 제출하게 되는데,

『大唐西域記』가 바로 그것이다. 태종으로서는 대당제국의 영역에

복속시켜 안정시킨 지 얼마 안 된 서역과 그 서역의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천축의 동향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보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관 3년(629년), 젊은 당 태종이 막 장악한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을 때, 한 명의 젊은 승려가 길을 떠났다. 길을 떠난 명목은 단순했다. 표면적으로는 장안성 일대에 들이닥친 기근을 피해 지방으로 흩어지라는 황제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었다. 젊은 승려의 이름은 玄(600~664년)이었고, 그가 향하는 목적지는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감숙성의 하서회랑 지역이었다. 그의 내면에 새겨진 진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지방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처의 나라, 천축으로 가서 불법을 배우는 것이 진정한 목표였다.

하지만 이즈음의 서역 정세는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강성한 힘을 지닌 돌궐은 새롭게 들어선 중원의 당나라를 언제든 위협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는 상태였고, 서역의 여러 제국들은 그런 당나라와 돌궐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직 신생제국인 당나라는 돌궐을 압도해 서역 제국을 복속시킬 만한 힘이 없었다. 때문에 당나라는 서역과의 통교를 엄격하게 통제할 필요가 있었고, 승려들의 서역 여행 또한 금지시킨 상태였다.

하지만, 스물아홉 살의 젊은 승려 현장은 그 당연하게 보이는 조치를 쉽게 수긍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국가의 조치보다는 求法의 열망이 훨씬 컸던 까닭이다. 644년 현장은 귀국하던 도중 호탄에 이르렀을 때, 이제는 서역을 완전히 평정한 대당제국의 황제 태종에게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일찍이 불교가 서역에서 일어나 그 가르침이 동방으로 전파되면서 훌륭한 경전이 전래됐다고는 하나 원만한 宗旨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인도에 가서 배울 생각에 신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정관 3년 4월에 국법을 어기고 몰래 천축으로 향했습니다. 망망한 사막을 밟고 높은 雪嶺을 넘고 鐵門의 험준한 길과 熱海의 파도를 지나, 비로소 長安 神邑에서부터 王舍城 新城에 이르게 됐습니다. 중간에 경유한 거리는 5만여 리였고, 풍속은 천차만별이며, 위험은 첩첩으로 쌓였으나 천자의 위엄을 믿고 의지했으므로 가는 곳마다 막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후한 대접 덕택으로 몸이 고달픈 일 없이 마음속 서원을 이루게 됐습니다. 마침내 耆闍崛山을 보게 됐고 보리수에 예배할 수 있었으며, 보지 못했던 부처님의 자취를 보았고 들어보지 못했던 경전을 들었습니다. 우주의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을 다 보았고 음양에 의해 만물이 자라는 이치를 터득했으며, 그리고 우리나라 황제의 덕과 은택을 선양했으며 풍속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흠모하는 생각을 내게 했습니다.”(『大唐大慈恩師三藏法師傳』)

현장이 당나라를 떠날 때, 당은 신생제국에 불과해서 아직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당 조정의 허락을 얻어서 길을 떠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현장의 구법 행로는 평탄하지 않았다. 다행히 고창국의 국왕 麴文泰( ? ~640년)나 서돌궐의 칸이 현장에게 적잖은 호의를 보여줬고, 이것이 서역 실크로드의 험로를 지나 천축으로 들어가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현장이 만난 서역의 여러 나라들은 이미 확실하게 당 제국에 복속된 상태였고, 서돌궐 역시 더 서쪽으로 본거지를 옮긴 상태였다. 현장이 떠날 때의 당과 현장이 귀국할 때의 당은 천지개벽이라 할 만큼 그 위세와 국력에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 대안탑을 배경으로 세워진 현장의 동상(섬서성 시안)

정관 19년(645년) 봄 1월 7일에 현장은 마침내 장안성에 되돌아왔다. 당시 장안성에 입성했을 때의 풍경을 『대당자은사삼장법사전』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경성 유수인 좌복야 梁國公 房玄齡 등은 법사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고, 右武侯大將軍과 雍州의 사마 李叔眷과 장안 현령 李乾祐 등을 보내어 받들어 영접하게 했다. 그들은 운하를 통해 들어와 都亭驛에서 법사 일행을 쉬도록 했는데, 법사를 따라온 사람이 구름처럼 많았다. …… 다음날 朱雀街의 남쪽에 법사가 가지고 온 수백 가지의 물건을 모아 진열해 놓았다. 행렬은 주작가에서 시작해서 홍복사 문 앞까지 뻗어 있었다. 그 사이 수십 리에는 성안의 사람들과 내외 관료들이 길 양쪽으로 열을 지어서 행렬을 우러러보며 서 있었다. 거리에는 이처럼 사람들로 가득 찼다. 有司는 서로 밀치다가 밟히기라도 할까 걱정해서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향을 피우고 꽃을 뿌려야 하며, 이동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향불 사르는 연기가 구름 같이 피어오르고 찬미하는 노래의 메아리 소리가 곳곳으로 이어져 갔다.”

과장이 없지 않은 묘사이겠지만, 국가의 허가를 받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떠났던 현장의 출발 모습과는 달리 성대하기 그지없는 환영을 국가적 차원에서 받았던 것은 분명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모습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 태종이 정변을 일으켜 국권을 장악할 때 불교를 외호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컸던 것이지 당 태종 스스로가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장안의 불교계가 현장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은 역시 당 태종의 불교에 대한 비우호적인 태도와 관련이 있었다. 현장은 귀국 이후 세월이 갈수록 불교계의 적극적인 지지와 호응을 받았는데, 이것 역시 당 태종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현장의 귀국을 계기로 당 태종이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장이 귀국했을 때, 당 태종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東都 낙양으로 떠나기 직전이어서 매우 바쁠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현장을 만났다. 이것은 당 태종이 현장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당자은사삼장법사전』의 저자인 언종은 태종의 기대치를 태종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의 나라는 멀고멀어서 신령스런 유적이나 불법의 가르침[敎法]에 대해 이전까지는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 없었소. 법사는 이미 직접 가보았으니 한 권의 책으로 엮어서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 하시오.”

부처님의 나라라고 했지만, 실은 돈황 이서의 모든 곳 곧 서역과 천축의 제국에 대한 모든 정세와 지리에 관한 정보를 태종은 현장에게 기대하고 있었던 셈이다. 태종은 이 말에 이어 좀 더 적극적으로 현장이 還俗해 대신이 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현장은 그것을 거절하고 불전 번역 사업의 지원을 요청한다. 더 자세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역과 천축의 제국에 대한 기록을 먼저 제출하면, 번역사업에 도움을 주는 형태로 정리가 이뤄졌던 것 같다. 이로부터 3년 동안 현장은 한 권의 여행기록 보고서를 작성해 태종에게 제출하게 되는데, 『大唐西域記』가 바로 그것이다. 태종으로서는 대당제국의 영역에 복속시켜 안정시킨 지 얼마 안 된 서역과 그 서역의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천축의 동향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보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시 북인도를 통일하고 지배했던 바르다나(Vardhana) 왕조와 하르샤 왕(한문으로는 戒日王이라 부른다)에 대한 다음과 같은 현장의 기록이 예다.

“정치는 화평했고 절약과 검소함에 힘썼으며 복을 짓고 선을 심는데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다섯 인도에 영을 내려 육식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생명을 해치면 벌해 용서함이 없었다. 강변에 스투파 수천 개를 세웠는데 각각 높이가 백여 척이었다. 다섯 인도의 성읍과 향촌의 번화한 길과 교통로에 정사를 세우고 음식과 의약품을 쌓아두고 여행객이나 가난한 사람에게 두루 공급하는데 나태하지 않았으며, 붓다의 유적지에는 가람을 짓고 5년에 한 번씩 무차대회를 열었으며, 창고를 열어 모든 이들에게 베풀고 보시했으며, 오직 병장기는 남겨둬 보시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1년에 한번 모든 나라의 사문들을 모아 삼칠일 동안 四事로써 공양했다. 법좌를 장엄하고 토론장을 넓게 꾸며 서로 대론하게 해 우열을 가리게 했다. 선을 기리고 악을 비난하며 공적의 유무에 따라 기용했다. 만일 계행이 바르고 굳으며 도와 덕이 두텁고 깊으면 사자좌에 추대해 법을 들었다. …… 지방을 순찰해 민심을 살폈으며 계속 그곳에 거주하지 않고 이르는 곳마다 띠를 엮어 초막을 만들어 사용했으며 우기 3개월 동안은 순행하지 않고 항상 행궁에서 날마다 진귀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異學과 승려 1천명과 바라문 5백명에게 공양했다.”(『大唐西域記』『若鞠    國』條)
이 부분은 당시 바르다나국의 왕이었던 하르샤(재위 606~647년)의 통치 전반과 불교에 대한 태도를 기술한 대목이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서역과 천축에서 경유했던 모든 국가의 역사, 지리, 정치적인 정보를 먼저 기술한 다음, 당대 통치자의 통치에 대한 평가와 민심, 그리고 그 나라 불교의 현재 상황과 함께 불교 관련 전설 및 현지의 전설들을 채록해 정리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대당서역기』 자체에서는 현장 본인과 관련된 사안들은 지극히 절제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아마도 태종에게 올리는 보고서였기 때문에, 좀 더 객관적인 정보 서술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외에도 현장은 각 지역에 대한 정보의 첫머리에 반드시 그 지역 사람들의 성향이 호전적인지 아니면 평화로운지에 대한 언급, 그리고 왕권의 안정 정도 등에 대한 언급을 놓치지 않고 있다. 태종은 이제 막 평정한 서역의 안정적인 경영을 위해서 서역과 천축에 대한 상세한 정세정보가 필요했고, 현장은 그에 부응했던 셈이다.

현장이 『대당서역기』를 완성해 바칠 즈음, 태종의 정관의 치세는 말년으로 치닫고 있었다. 고구려 정벌의 실패 때문에 태종은 정치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고구려까지 복속시켜 동쪽 변방까지 정벌한 전무후무의 황제가 되겠다는 욕심은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그 욕심을 다시 한 번 실현하기 전에 내외의 만류를 겪고 있었고, 그 만류를 꺾기도 전에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현장의 보고서는 태종에게 지극히 만족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현장의 불전 번역 사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대당서역기』의 말미에서 현장은 “태양이 지는 저 곳에서부터 여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폐하의 은혜를 흠뻑 입고 있으며, 대당의 교화가 퍼진 곳에서는 모두 폐하의 성덕을 우러러 받들고 있사옵니다. 천하가 大同을 이룩할 수 있게 폐하는 한 집안에 통일을 이루셨으니, 어찌 저 혼자만의 힘으로 이역만리 머나먼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겠나이까?”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아첨의 극치라고 할 만한 언사이지만, 죽음을 목전에 예감하고 있었던 태종으로서는 자신의 치세를 수긍하기에 족한 치사였을 법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현장이란 승려는 태종의 염두에 있었던 승려가 아니다. 현장이 호탄에서 표문을 올리기 전만 하더라도 태종이 현장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따라서 현장은 태종에게 있어서 서역과 천축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전해줄 횡재한 보물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미 현장이 귀국하기 전에, 태종 역시 서역과 천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이 세운 대당제국의 위세를 알리기 위해 서역을 거쳐 천축까지 이르는 사절단을 파견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절단을 대표한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王玄策(?~643~661~?)이다.

왕현책이 처음 인도를 방문한 것은 하르샤 왕의 사신으로 당나라를 방문했던 바라문의 귀국을 호위하는 副使의 자격으로였다. 643년에 출발해 북인도를 통일한 바르다나 왕조를 방문하고 중인도 각지의 불교성지를 둘러본 뒤 646년에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이미 앞서 귀국해있던 현장으로 인해 서역과 천축에 대한 관심이 극도로 고조돼 있던 태종의 명으로 곧바로 다시 인도를 방문하는 사절단의 책임자로 임명받는다. 이 두 번째 인도행은 647년에 출발해 648년에 걸친 것이었는데, 첫 번째 인도행과는 달리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두 번째 사절단이 북인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당나라와의 교류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이었던 하르샤 왕의 치세가 막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북인도의 새로운 실력가로 등장하던 아라나순(阿羅那順)에 의해 입국을 거부당했을 뿐만 아니라, 貢物과 무역품까지 약탈당했다. 왕현책은 겨우 몸을 피했다가 토번과 네팔의 원병을 얻어 아라나순을 격파하고, 그를 잡아 당나라로 압송하는 공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이 두 번째 인도행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행로였다. 그리고 다시 657∼661년 사이에 세 번째로 사신이 돼 중인도 각지를 순방했다.

그런 왕현책이 『中天竺國行記』 10권을 편찬해 남겼는데,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고 내용의 일부가 『法苑珠林』에 전해질 뿐이다. 그 내용 중에 645년 2월, 1차 방문시에 마하보리사 곧 부처의 성도지가 있는 부다가야의 성도지 서쪽에 당나라의 위엄을 과시하는 한문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법원주림』에 전하는 비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大唐이 천하를 장악하고 道가 모든 왕들의 으뜸이 되니, 文德이 더해지고 천하가 함께 귀부했다. 이 때문에 身毒(인도)의 여러 나라들의 승려와 속인들이 정성껏 귀의했다. 황제께서는 그 충성을 가엾이 여기시어 멀리 성스러운 심려를 보내시고, 이에 使人 李義表와 副使 王玄策 등 22인에게 명해 그 나라를 순무케 하셨다. 마침내 마하보리사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 이르렀으니, …… 황제께는 큰 교화를 멀리 떨치시어 보리수를 빛나게 하시고는, 이에 使人에게 명해 몸소 여기까지 와서 우러러 보게 했으니, 이는 세상에 다시없는 성대한 일이요, 불후의 신성한 공이로다. 어찌 노래에 침묵하여 金石으로 전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 비석은 산실돼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관연간에 동서교역의 안정적인 치세를 구가하기 위해, 태종이 얼마나 서역 경영은 물론 멀리 천축의 정세에 관심을 보였는지는 명료하게 보여준다. 왕현책은 전후 세 차례의 인도 방문을 통해 중국의 문물을 직접 인도에 전하는 한편 인도의 문물을 당나라 장안의 문화에 반영하는 문화사절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례로 왕현책이 마하보리사를 방문했을 때 그려온 석가모니불의 정각좌상도는 장안은 물론 중국 각지와 신라에까지 전해졌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경주 토함산 석불사(석굴암)의 본존불 또한 이때 그려온 정각좌상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추정도 존재한다.
현장의 『대당서역기』가 당나라 시절 변문의 소재로 사용되다가 『서유기』라는 중국의 4대 기서로 거듭나서 동아시아인들의 정신적 문화적 토양이 됐던 것처럼, 왕현책의 천축 탐색 역시 뚜렷한 족적으로 후대에 영향을 미쳤던 셈이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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