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민족문화는 어떻게 역사학을 주저앉혔나
그을린 민족문화는 어떻게 역사학을 주저앉혔나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8.1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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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 ‘민족문화’ 현창과 역사학의 한계_ 한 역사학자의 시선

역사적 맥락을 상실하고 주체적인 민족문화의 이데올로기로 포장됨으로써,

재현된 대상들은 ‘역사’에서 ‘규범’으로 전환됐다. 세종로의 동상은 규범의 본보기다.

 

한국역사연구회(회장 정용욱·서울대)가 펴내는 학술지 <역사와 현실> 제96호가 특집으로 내건 ‘독재 권력의 역사 기억 통제―내용과 방식’은 시의 적절한 기획이다. 광복 70주년, 한일협정 50주년 등 굵직한 ‘기념’의 해에 ‘독재 권력의 역사 기억 통제’를 남북한에 걸쳐 진단해냈기 때문. 권력의 기억 통제는 역사학계를 비롯 국문학·사회학계 등에서도 일정한 성취를 이뤄내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번 특집논문들 가운데 오항녕 전주대 교수(역사문화콘텐츠학과)의 「그을린 민족문화: 전유, 내면화 그리고 근대주의」가 독특하다.

▲ 오항녕 교수

오 교수의 논문에 다가서려면 제목인 ‘그을린 민족문화’에 주목해야 한다. ‘그을린’은 ‘햇볕이나 불, 연기 따위를 오래 쬐어 검게 되다’라는 뜻의 동사 ‘그을다’의 피동형 수식어다. 이런 명명법이 흥미롭다. 대개 ‘가슴 뿌듯한’ 긍정적 의미로 채색되는 것이 ‘민족문화’이며, 실제 한국 역사학계 역시 민족문화와 관련해서는 이 ‘그을린 민족문화’를 꺼려왔다는 게 오 교수의 지적이다. “그을려진 민족문화를 꺼리는 것, 그 꺼림 속에 유럽 중심의 근대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 유신체제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국 역사학자들은 무엇보다 계몽주의적 근대주의에 무척 경도돼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을려진’은 ‘왜곡되거나 과장된, 편향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실증성을 강력한 무기로 삼고 있는 역사학이 문학적 은유를 차용한 것도 흥미롭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오 교수는 “분단 고착 또는 정권 안보를 위한 한국적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민족문화’”를 겨냥해 “그 민족문화에서 정책과 정권의 지향을 해석하는” 작업을 밀고나갈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는 박정희 정권이 민족문화를 전유, 수용과 내면화하는 과정을 짚어내면서도, 이 과정에서 ‘역사학(계)’ 자체를 문제 삼는 자기비판의 경로를 생략하지 않았다. 과연 그는 박정희 정권 기간 국사교육의 강화를 반겼던 역사학계(그는 이것을 ‘비껴간 근대주의’라고 지적한다)로부터 어떤 문제의식을 이끌어냈을까. 오 교수의 논문에서 관련 내용을 발췌했다.

 

 역사학계에서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역사학적 비판’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국사교육’을 강화하자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근대 역사학이 이미 ‘정치-역사학’, ‘국민국가사’였기 때문에 국사교육의 강화는 당시 근대 교육을 받은 역사학자들에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아니 반가웠다.

1972년 10월유신을 앞두고 대통령 비서실은 국사교육 강화방안을 공식으로 건의했다. 이렇게 해서 국사교육강화위원회가 구성됐다. 국사과의 독립과 전 학교에서의 필수화를 추진했던 국사교육강화위원회는 박종홍·장동환·한기욱·박승복 등 정부 측 인사와, 이선근·김성근·고병익·이기백·한우근·이우성·김철준·강우철·김용섭·이원순·이광린·최창규·이현종 등 학계 인사가 참여했다.

그러나 국정교과서 편찬 어간에서 균열이 생겼다. “주체적인 민족의식에 투철하고 민족중흥의 의욕에 충만한 후세 국민을 길러내기 위해” 국사가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잡다기한 주관적 학설을 지양해야 하고, 국정교과서의 국정화가 필요하다고 문교부는 주장했다. 이로 인해 위원회 위원 중 김철준, 이현종만 국정교과서 집필진에 선정됐다. 이외에 민병하, 한영우, 윤병석이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임병태, 강진철, 차문섭이 중학교 국사교과서 집필을 맡았다. 이는 역사학계가 국사교육의 강화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국정화에는 동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10월유신 이후 국정화 시기에 역사학자들의 박정희 정권 비판이 표면에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조선시대 민족문화와 관련해서 역사학자들이 ‘그을민 민족문화’의 재현에서 느꼈을 꺼림직함 두 가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그 재현이 권위주의 체제인 박정희 정권에 의해 주도되고 현창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不正한 주체의 실천 일반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부정한 권력의 손때를 탔다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전유의 결과이자 효과였다.

더 근본적인 꺼림직함은 무엇보다도 박정희 정권의 민족문화 선양이 뭔가 ‘역사적 뿌리’가 뽑혀져 있는 재현이라는 역사학자들의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었을 것이다. 고대 첨성대와 석굴암이 그렇듯이, 조선시대 훈민정음 역시 과거로부터 ‘옛날 우리집에 있던 금송아지’로 호출됐다. 세종대황, 이순신, 이황, 이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적 맥락이 빠져버린 호출과 재현을 정상적인 역사학자라면 흔쾌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결국 역사적 맥락을 상실하고 주체적인 민족문화의 이데올로기로 포장됨으로써, 재현된 대상들은 ‘역사’에서 ‘규범’으로 전환됐다. 세종로의 동상은 규범의 본보기다. 민족적 영웅의 신화화는 이렇게 규범이자 본보기로 안착하면서 완성된다. 박정희 정권의 민족주의 신화화는 곧 ‘분단국가의 국가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러한 민족문화의 현창이 갖는 탈역사화, 신화화와 관련해 한 가지 더 짚을 문제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민족문화 현창은 ‘시련과 극복’ 논리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시련과 극복’의 논리에는 ‘약소민족으로부터의 탈피’=‘민족중흥’의 논리가 함께 들어 있었다. 이는 경제발전 논리로 보면 ‘가난의 탈피’였고, 이는 곧 ‘조국근대화’로 대변할 수 있다.

이순신의 현창을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국립국장 개관 기념으로 상연된 이재현의 「성웅 이순신」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영웅이라기보다 더러운 당쟁에 희생된 비극적 인물이었다. 「성웅 이순신」은 박정희 시대를 임진왜란 때와 비슷하게 상정하면서, 수구와 당쟁, 시기와 모함을 일삼는 무리들이 지배층을 자처하면서 국론 통일을 해치고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형상화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인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인 윤근수’가 이순신을 죽이려고 했다든가, 이순신이 유성룡의 실각을 알고 죽음을 선택했다든가 하는 등, 당시 사료를 읽은 사람이면 성립하지 못할 소설보다 못한 서술이 이어지고 있다. 선조의 질투심만 남는다. ‘당쟁’에 대한 언급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종종 그 ‘전쟁’을 잊는다. 그 ‘침략’ 전쟁을 잊는다.

민족문화 특히 조선시대와 관련해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및 민족주체성, ‘한국적 민주주의’ 담론을 이해할 때 짚어야 할 문제는 근대주의라고 생각한다. 사실과 가치, 두 측면에서 근대가 목적론적으로 도달해야 할 시대로 설정되는 것. 사실의 측면이란 어느 사회나 적절한 과정을 거쳐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고, 가치의 측면이란 자유와 평화, 인권의 실현을 위해 근대는 바람직한 시대라는 뜻이다. 이전 시대와 근대의 위계를 설정하는 진보 관념. 그 진보 관념은 막강한 과학의 힘과 생산력이 뒷받침한다.

물론 근대주의 역사학이라고 해서 다 같지 않다. 로스토우식 발전사관과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같을 수는 없다. 박정희의 경제개발론과 진보적 민주진영의 복지사회론이 같을 수 없다. 현실 합리화 수준의 로스토우논리와는 달리, 역사적 유물론, 사회경제사학의 발달은 역사를 정치사 중심으로 서술하던 한계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개인에서 사회구조나 형태로 눈을 돌림으로써 인간의 역사적 조건을 이해하는 데 진전을 가져왔다. 경제사나 사회사 연구가 활발해진 것이 그 예다.

그러면서 역사발전의 동력을 주로 영웅이나 초월적 존재 또는 우연, 또는 시민에만 맡겨버리던 타성에서 벗어나, 생산하는 사람들, 곧 농민, 민중을 포착하게 됐고, 노동, 여성, 제3세계 등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역사학은 29세기 이래(한국은 20세기 반식민 투쟁과 민주화 투쟁)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성장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역으로 역사학이 그 성장에 기여하기도 했다.

여기가 끝이 아닌데, 이 대목에서 역사학은 방심한 측면이 있다. 역사학 본연의 문제, 즉 어떤 두 사회(시대)가 어떻게 다른가, 한 사회는 다른 사회로 이행하기도 하는데 어떤 사회는 이해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 문제를 건너뛰었다고 할 것이다. 건너뛰면서 사실의 측면에서 ‘민족문화’도 건너뛰었다. 조선사회 또는 문명에서 근대적 요소를 발굴해내는 데 주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동시적 것의 동시성(Gleichzeitigkeit des Ungleichzeitigen)’ 개념이 갖는 방점은 ‘비동시적인 것’에 있는 것도 ‘동시성’에 있는 것도 아닌 바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緣起)에 있다는 점을 놓쳤다. 결국 대부분의 근대주의 프레임을 그대로 둔 채, 조선시대를 무기력하게 변명하는 역할로 역사학은 왜소해졌던 것은 아닐까.

거기에 식민지가 됐던 역사에 대한 안타까운 조바심이 가세하면서 사회구성체의 복합성과 역동성은 쉽게 경제주의로 환원됐고, 상부구조와 토대의 조합에 따른 다양한 사회형태에 대한 탐구는 토대결정론으로 좌초됐으며, 역사전개의 다양성은 역사적 합법칙성이라는 사이비 보편주의에 휩쓸렸다. 근대를 전제로 해서만 의미를 갖는 조선가 연구가 된 것이다. 자연 ‘사실’로서의 ‘민족문화’가 운신할 폭은 좁아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근대’가 도달해야 할 목적론적 합법칙성의 산물이 아니라면? 이 합법칙성에 근거해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논하는 것이 전형적인 ‘선험적 관념에 의해 역사적 사실을 휘두르는 행위[以論帶史]’라면? 아마 우리는 KTX를 타고 천안→대전→대구→부산을 향해 달리듯, 정작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무대는 스쳐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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